기타를 멘 남학생 둘과 가운데서 걷는 여학생 하나. 푸른 하늘 아래서 그들은 “뒤를 돌아보면 바로 거기에 피어 있던 여름의 꽃”을 노래한다. 그토록 눈부시고 청순한 나날이 막을 내리면, 어둔 밤 고가 도로 아래 홀로 서 있는 아츠히사(나카노 타이가)가 보인다. 방금 꿈에서 깬 사람처럼 그는 멍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다가, 발밑에 놓인 그림자를 지도 삼아 천천히 앞으로 걷는다. 미로 같은 길을 통과할수록 아츠히사는 점점 더 도시 깊숙한 곳으로 내려간다. 지하실이라 부를 법한 공간에서는 잠시 모국어로 말하기를 멈춰야 한다.
중국어 선생은 한 음절씩 끊어가며 천천히 문장을 읽어준다. “그는 정말 거기에 있었습니까?” 아츠히사와 타케다(와카바 류야)는 노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어설픈 발음으로 답한다. “그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어 수업을 마치면, 두 남자는 영어를 배우러 간다. 언젠가 같이 회사를 차려서 해외 사업에 도전할 계획이다. 아내 나츠미(오오시마 유코)와 딸 스즈(오오타 유노)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아츠히사, 그런 친구와 함께하겠다는 타케다. 영어 선생이 그들에게 어릴 적 꿈은 뭐였냐고 묻자, 간단명료한 대답이 돌아온다. 우리는 프로 가수가 되어 정상에 도달하기를 바랐으며, 그때는 함께 러브 송을 불렀다고.
말에는 힘이 있을까? 누군가는 진심을 전할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 여기고, 누군가는 너무나 쉽게 거짓을 담는 도구로 사용한다. 아츠히사는 말하기를 주저한다. 말하고 난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대가 어떻게 반응할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뭔가를 말하고 싶어도 입술만 달싹일 뿐이고, 마음으로는 울지만 실제로 눈물이 나오지는 않는다. 아츠히사는 스스로 진단한다. “일본인이라 그런가.” 그는 좋고 싫음을 분명하게 표현하지 않는 것을 미덕이라 배웠다. 속내를 감추고 겸양한 자세를 익히면서, 차츰 어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발화하지 못한 말들은 어딘가에 쌓이고 뭉친다. 어릴 적에는 노래로 흘러나왔다가, 지금은 외국어로 말할 때만 불현듯 “본심이 튀어나”온다.
그런 아츠히사 곁에서 나츠미는 줄곧 괴로웠다. 더는 러브 송을 부르지도, 기쁨도 슬픔도 내비치지 않는 남편에게선 사랑을 느낄 수가 없다. 아내와 엄마로서 가정에 헌신했던 시간은 나츠미를 풍요롭게 채우는 대신, 허기와 갈증에 시달리게 했다. 다른 남자와 섹스하는 장면을 들켰을 때, 나츠미는 눈을 부릅뜨고 아츠히사를 바라본다. 사과하며 황급히 자리를 피하는 쪽은 아츠히사다. 이혼을 결정하는 순간조차 그의 시선은 나츠미를 향하지 않는다.
이후 영화는 6개월 단위로 거듭 시간을 건너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세 인물에게는 불행이 연속한다. 아츠히사는 무기력과 소외감에 사로잡히고, 애인과 동거를 시작한 나츠미는 싱글맘으로 버거운 생활을 이어 나간다. 한편 타케다는 두 친구 사이에서 난처해할 뿐 이렇다 할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후반부에 다다를수록 현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린다. 겨우 마음을 다잡은 듯했던 나츠미의 애인은 살해당하고, ‘콜걸’로 일하던 나츠미 역시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아츠히사에게 아버지는 무심코 말한다. “쓸모없는 놈들만 살아남아 있어.” 그들에게 현실은 망가져 버린 프로그램과 같다. 손쓸 겨를도 없이 피해는 번져 나가는데, 손상을 복구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이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발생 후, 일본 사회에 깊이 스며든 불안과도 연결된다.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희망과 변화를 말하기에는 여전히 곤란하다. 영화 초반,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 문제를 고발하는 뉴스를 보던 나츠미는 가당치도 않다는 투로 냉소한다. “어찌 됐든 우린 아무것도 못 하잖아.”
<우리가 말하지 않은 것>은 2019년 상해국제영화제가 주최한 동아시아 감독 6인의 저예산 영화 제작 프로젝트 ‘백투 베이직: 어 러브 슈프림’(Back To Basic: A Love Supreme)의 일환으로 완성된 작품이다. 이시이 유야는 각본과 연출은 물론, 프로듀서까지 겸하며 작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국내에는 개봉 시기상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2021)이 먼저 소개됐으나, 실제 촬영은 <우리가 말하지 않은 것>이 먼저 이뤄졌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청춘 남녀의 멜로드라마를 중심으로 사회에 내재한 우울과 허무를 파고든다는 점에서 감독의 전작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2017)와 나란히 놓인다. 영화는 관계 맺기에 어려움을 겪거나 소통의 부재로 인해 고립 상태에 빠진 인물들을 통해, 공동체가 붕괴하여 가는 현대 사회의 보편적 풍경을 비춘다. 동시에, 감정을 절제하도록 요구하는 사회 분위기와 재난 이후 안전하다는 감각을 회복하기가 어려워진 상황에 주목하며, 일본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캐묻는다.
죽음과 이별 등 부정적 사건이 계속해서 벌어지지만, 영화가 주의깊이 바라보는 것은 그와 같은 결과를 맞닥뜨리기 훨씬 이전부터 일상을 어지럽혔던 미세한 균열이다. 삐걱대며 돌아가는 선풍기와 테이블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장식품은 근미래에 닥쳐올 위험을 예고하는 징후와도 같다. 아내의 불륜을 목격한 후 아츠히사의 삶은 도미노처럼 무너지지만, 과거를 돌이키거나 현재를 바로잡을 능력이 그에게는 없다. 다만, 그는 엔딩에서 마침내 울음을 터뜨린다. 딸 스즈를 찾아가서 함께 살고 싶다는 진심을 전하려 애쓰고, 타케다는 그 곁에서 아츠히사가 용기를 내도록 응원한다. 말이 힘을 지닌다고 믿어서라기보다는, 사랑하는 마음을 부정할 수가 없어서다.
<우리가 말하지 않은 것>은 솔직히 말한다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라고 주장하는 대신, 실패해도 계속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인정한다. 세상은 엉망진창으로 돌아가고, 말문은 곧잘 막혀버린다. 하지만 살아남은 두 남자가 부둥켜안고 우는 장면에는 바닥을 치고 나온 긍정이 깃든다. 정말 거기에 있었는지 헷갈릴 정도로 허망하게 떠나간 누군가를 기억하고자, 어떻게든 현실에 존재하고자 아츠히사는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본다.
리버스 reversemedia.co.kr
글 차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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