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때는 그렇게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을 견디는 일은 버거웠고, 남들처럼 착실하게 대학에 가고 착실하게 취업해서 착실하게 가정을 꾸리고 사는 미래는 어쩐지 타협 같았다. 어차피 소위 ‘정상 가정’에서 성장하는 일은 가족이 붕괴되면서 글러버렸는데, 고장난 인간이면서 억지로 멀쩡하게 돌아가는 인간인 척 하며 남들 사이에 섞여 사는 게 더 이상한 일이라고.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10대 후반의 나는 잡지 《페이퍼》에 연재되던 조병준 시인의 여행기를 읽으며 끊임없이 방랑하는 여행자의 삶을 상상했고, ‘저런 삶을 살아가려면 내 삶의 안정성을 어디까지 양보해야 할까’를 혼자 각오해보곤 했다. 영화감독이라는 꿈도 불안하기로는 남부럽지 않았는데, 그 꿈에서 도피하며 생각한 대안적인 삶은 더 답이 없었던 것이다.

왜 그렇게까지 도망가고 싶었던 걸까. 아마 ‘엄마’가 상징하는 많은 것들이 갑갑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그 무렵 나의 유일한 동거인이었던 엄마와 나의 사이는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쇼핑을 같이 가기도 했고, 시답잖은 농담에 함께 웃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모친과 유대감이 강한 사람들이라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우리 불효자들은 엄마를 미친 듯이 사랑하면서 동시에 엄마를 미친 듯이 지겨워한다. 시종일관 붙어 있는 탓에 남들보다 내 단점을 더 잘 알고 있는 엄마는, 가장 아픈 곳만을 골라서 펀치를 날리듯 내 단점을 후벼 팠다. 엄마는 내 체형에, 밤 늦게까지 잠들지 않는 내 생활 습관에, 무심하기 짝이 없던 내 내신 관리에, 영화감독이라는 불안정한 내 꿈에, 결혼 생각이 없다는 내 미래 계획에 맹비난을 퍼붓곤 했다. 차라리 내가 미워서 그러는 거라면 무시하고 말 텐데, 그게 엄마 딴에는 다 나 잘 되라는 의미로 건네는 애정 어린 이야기인 걸 알아서 더 화가 났다.

영화 〈레이디 버드〉(2017)를 보다가 군데군데 불에 데인 것처럼 놀란 건 그 때문이었다. 물론 엄마와 딸이 지닐 수 있는 섬세한 결을, 아들인 내가 다 이해한다고 하면 주제 넘은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래도 어떤 장면들은 꼭 내 성장기를 훔쳐 보는 것만 같아서 눈물이 핑 고이곤 했다. 갑갑한 새크라멘토를 떠나 문화의 도시 뉴욕으로 갈 거라고 말하는 ‘레이디 버드’ 크리스틴(시얼샤 로넌)과 그 꿈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지적하는 엄마 매리언(로리 맷캐프)의 대화에서, 크리스틴이 엄마와 함께 옷을 사러 가서는 대판 싸우다가 말고 돌연 “이 옷 잘 어울리겠다”라며 함께 환호하는 장면에서, 널 키우는데 얼마나 드는지 알긴 하냐는 엄마의 질문에 “얼마 드는지 말해. 싹 다 갚고 인연 끊고 살 테니까!”라고 대꾸하는 크리스틴의 독설에서, 나는 목표도 계획도 없이 막연하게 살던 곳을 떠나고 싶었던 나를 봤다. 가장 가깝기에 서로에게 더욱 크고 집요하게 상처 입힐 수 있었던 나와 내 엄마의 관계를 봤다. 절반쯤 자전적인 이야기로 감독 데뷔작을 만든 그레타 거윅 또한 그렇게 마냥 떠나고 싶었던 거겠지. 자신을 키워낸 새크라멘토를, 그 도시 안에서 평온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일상을,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지겨워 했던 거겠지.

대학에 진학한 크리스틴은 새크라멘토를 떠나 뉴욕에 도착하는데 성공했지만, 막상 와서 보니 뉴욕은 크리스틴이 꿈꿨던 것과 달리 영 시시한 곳이었다. 파티에서 만난 얼뜨기는 크리스틴이 건네는 섬세한 질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설명도 소통도 포기한 크리스틴은 자신을 ‘레이디 버드’가 아니라 ‘크리스틴’이라고만 소개한다. 새크라멘토가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를 상대를 위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왔다’고 설명하던 크리스틴은, 문득 창 밖의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첫사랑 소년과 함께 이름을 붙였던 별을 찾아 크게 소리친다. “브루스! 브루스!” 크리스틴은 두렵다. 좁고 낡은 새크라멘토에 있었을 때는 일일이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던 것들이, 모든 게 거대하고 빠르게 돌아가는 뉴욕에서 그 의미를 잃을까 두렵다. 그래서 괜히 바보 같은 이름의 별이라도 불러보는 것이다. 부른다고 별이 내게로 올 것도 아니고, 내가 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그제야, 크리스틴은 자신이 격렬하게 지긋지긋해 했던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사랑의 대상이었음을 깨닫는다.

나라고 달랐을까. “네 고집을 누가 꺾냐.” 엄마는 서운해 하면서도 끝내 내가 내 삶을 살도록 놓아주었고, 나는 여행자도 영화 감독도 되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내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대로 살고 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고,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엄마 집에서 나와 혼자 살면서 밤 늦게까지 잠들지 못한 채 타자를 치면서 뭔가 창작하는 삶을 산다. 그 선택들을 후회하진 않지만, 내가 선택해서 도착한 삶이라고 해서 내가 꿈꿨던 것처럼 자유로운 것도 아니었다. 크리스틴의 뉴욕이 결국 대단할 것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불과했던 것처럼, 나의 삶도 그저 좀 다른 종류의 의무와 고단함으로 가득한 삶에 불과했다. 그리고 나는 그제서야 내 사랑을 깨달았다. 나를 키워낸 그 뻔하고 따분한 동네를, 내겐 턱도 없이 안 어울리던 ‘정상 가정 궤도’를 권하며 거기에 내 행복이 있을 것이라 굳게 믿던 엄마를, 사실은 내가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었음을.

이렇게 말하면 꼭 그 뒤로 내가 개심하여 효자가 된 것 같겠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다. 원래 반성은 잠깐이고 삶은 관성이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던 대로 살기 마련이다. 난 여전히 마감이 바쁠 때 엄마가 전화를 하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고, 대중교통으로 고작 한 시간 거리에 살면서도 바쁘다는 핑계로 좀처럼 엄마 집에 들르지 않으며, 어쩌다가 들러도 엄마가 반찬을 바리바리 싸주는 걸 몹시 번거로워 한다. 하지만 불효하기로는 남부럽지 않은 불효자인 나도 이제는 안다. 내가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건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곳이 간절히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것, 서로 오랫동안 상처 입히며 지긋지긋해 했던 그 순간들조차 본질을 찾아보면 온통 사랑이었다는 것, 우리는 그 사랑을 객관적인 거리에서 다시 발견하기 위해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이토록 멀리 달아났다는 것을 말이다.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