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자의 영혼이 구천을 떠돌며 가해자들에게 복수를 감행한다는 이야기는 거의 모든 나라의 구전 설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인기 많은 내용이다. DC 코믹스의 메인 캐릭터인 스펙터도 그러한 복수의 악령을 히어로화한 인물이다.
정의의 경찰,
복수의 화신이 되다
스펙터는 슈퍼맨을 만든 작가 제리 시겔과 당시 약관의 나이였던 버나드 베일리가 1940년에 만든 캐릭터이다. 초록색 망토를 두른 유령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이름도 '스펙터'라 지었는데, 가히 현존하는 모든 히어로 캐릭터 중 가장 음울하고 어두운 탄생 배경의 소유자이다.
짐 코리간은 정의감이 투철한 강력계 형사인데, 그로 인해 많은 범죄자들의 표적이 된다. 어느 날 약혼녀와 함께 약혼식장으로 향하던 중, 그를 평소에 표적으로 삼던 범죄자들에게 납치를 당한다. 납치범들은 그를 드럼통에 넣고 시멘트를 부어 생매장시킨 후에 드럼통을 바다에 던져 버린다. 영화 <신세계>의 장면과 유사한데 산 채로 시멘트를 부어 버린다는 것이 좀 더 잔혹하다.
그는 죽은 후에 사후 세계에서의 영원한 안식을 거부당한다. ‘목소리’라는 미지의 존재는 정의감이 투철한 그에게 신과 같은 능력을 주어 악에 맞서 싸우라 명한다. 그렇게 짐 코리간은 부활하는데, 인간의 몸과 초자연적 존재인 스펙터 사이를 자유자재로 변환하며 범죄와 맞서 싸우게 된다. 그 과정에서 물론 정상적인 인간의 삶은 영유하지 못하게 되고 약혼녀도 버려진다.
미국 만화에서 이보다 더 암울하고 처절한 탄생 기원 스토리를 지닌 슈퍼히어로가 과연 있을까. 만화 역사가들조차 놀랄 정도로 스펙터의 탄생 기원은 어둡다. 더 놀라운 점은 스펙터가 탄생한 해가 1940년이라는 것인데, 당시 유행하던 자극적인 내용의 싸구려 펄프 잡지나 하드보일드 소설 기준으로도 잔인함의 수위가 너무 높았던 것이다.
게다가 제리 시겔은 범죄물을 주로 다루던 작가가 아니라, 공상과학이나 슈퍼맨, 휴먼 토치 등 밝은 캐릭터들을 만들던 작가이다. 1940년대, 만화책은 어린이들의 전유물이던 시절인데 작가 제리 시겔은 아동용 만화에 대체 왜 이렇게 부적절할 정도의 강도 높은 내용을 넣었을까? 혹시 작가가 개인적으로 받고 있던 심적 고통이나 정신적 스트레스를 강도 높고 비장미 넘치는 폭력으로 승화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억측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수 십 년 후에 본인의 경험을 작품에 그대로 담은 작가가 등장한다.
잔혹한 탄생 신화,
70년대에 부활하다
조 올란도는 1950년대 EC(Entertaining Comics)코믹스의 주 필진으로 활약하면서, 호러와 강력 범죄 이야기에 잔뼈가 굵은 중견 작가이다. 그는 1970년대 DC 코믹스에서 편집장 직위에 올라 활발한 창작 활동을 이어 가는데, 어느 날 집에 가는 길에 강도의 습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돈도 빼앗기게 된다.
강력 범죄가 판치고 국내외로 연일 우울한 뉴스만 이어지던 70년대 중반, 그는 강력한 사법 기관의 부재와 개인의 무력함에 매우 분개했다. 하여,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복수를 감행하는 히어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가 떠올린 것은 바로 잊혀져 가던 캐릭터 스펙터였다. 작가 짐 아파로의 손에 의해 스펙터는 부활했고 1940년대의 활약을 이어나가게 된다.
과거의 활약과 차이가 있다면 보복의 강도가 급상승하였다는 것. 절대 살상을 하지 않는 슈퍼맨이나 배트맨 등의 캐릭터에 익숙해져 있던 70년대의 독자들에게 스펙터의 가혹한 방식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당시 인기를 얻고 있던 마블 코믹스의 퍼니셔, 울버린 등이 인자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스펙터는 악당들을 가루로 만들거나 유리로 만들어서 깨뜨리기, 뼈와 근육을 완전히 분리하기, 양초로 만들어서 녹이기 등 매 회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처리한다. 악당들에게 용서나 구금형 등의 자비는 절대 주어지지 않았고 매 회마다 참혹한 죽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독자 편지란에 ‘너무 심한 것 같다’, 혹은 ‘슈퍼히어로가 아닌 것 같다’는 내용의 편지들이 계속 실리게 됐고 스펙터가 등장하는 연재 분량은 10회차로 종료되고 만다.
하지만 역시 이런 이야기가 주는 카타르시스와 대리만족 쾌감은 매우 강렬했는지, 1950년대 EC 코믹스의 범죄/호러 만화들이 아직도 탄탄한 팬층을 유지하며 그 유산을 이어오듯이, 이 짧다면 짧을 수 있는 10회 연재 분량을 기억하는 팬들은 상당히 많다. 전형적인 1930~40년대 히어로의 복장을 하고 있는 오래된 히어로 스펙터는 그 이후에도 죽지 않고 DC의 메이저급 이벤트에 빠짐 없이 등장하는데, 그를 좋아하는 작가 마크 웨이드와 알렉스 로스는 1995년 미니시리즈 ‘킹덤 컴’에 그를 상당히 비중있게 등장시키기도 했다.
스펙터는 DC 코믹스가 보유한 와일드카드 중 하나이다. 아직은 팬들에게 익숙한 스펙터의 모습으로 등장한 적이 없고 인지도 자체도 애매한 정도이지만, 영화나 TV 시리즈에서 다양한 방면으로 활용 가능하다. 저스티스 리그의 일원으로 마블의 닥터 스트레인지처럼 초자연적 화력 지원을 하는 조연급으로 등장할 수도 있고, 또 다른 DC 캐릭터인 콘스탄틴 등과 함께 초자연적 색채의 탐정물에 등장시킬 수도 있다.
슈퍼히어로 만화 장르의 본질적 매력 중 큰 요소인 현실도피와 대리만족에 가장 충실한 캐릭터인 악령, 스펙터가 스크린에서 거대한 망토를 펼치는 날을 기대해 본다.
그래픽노블 번역가 최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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