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의 이름은.>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너의 이름은.>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보게 되었다. 화려한 색감을 뒤에 깔고 서정적인 음악과 애절한 내용을 잘 담아내기로 유명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2016년 작품이다. 정식 개봉 전 1월 1일 새해 첫날에 유료시사회를 통해 관람했는데 전작인 <초속 5센티미터>나 <언어의 정원>과 비슷한 분위기지만 더 유쾌해진 느낌이다.
남녀 주인공인 타키와 미츠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교감을 나눈다. 판타지적인 방식으로 교류를 하게 되다 보니 극중에선 여러 가지 매개물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중 특히 중요한 것이 '무스비'와 '쿠치카미자케'다.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를 많이 보신 분들은 ‘인연을 이어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빨간 실이 새끼손가락에 매듭(무스비)지어져 있어 이 실을 따라가다 보면 영원한 연인과 만나게 된다’는 스토리를 아실 텐데 극중에서 등장하는 무스비 역시 신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사람과 사람을 잇는 매듭으로서의 이미지를 극 내내 보여주고 있다.
쿠치카미자케(口噛み酒, 미인주) 역시 마찬가지다. 여주인공인 미츠하가 극 중에서 입으로 쌀을 씹어서 이를 모아 발효시켜 만드는 술로, 남자 주인공인 타키가 이를 마심으로써 두 남녀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연결되게 된다.
'인간이 쌀을 씹은 것만으로 술이 만들어지나?' 하고 의구심을 갖는 분들도 있을 것 같다. 보통 곡식으로 만드는 술은 곡식의 주성분인 전분 등을 누룩으로 당화시킨 후 만들어진 당을 다시 효모를 사용해 발효시켜서 알코올을 만드는데 이 과정에서 누룩 대신 사람의 침을 사용해 곡식 속 전분을 당화시키고 공기 중에 존재하는 자연 효모를 통해 발효시켜서 알코올을 만드는 술이 쿠치카미자케다.
영화 속 장면들을 차용해서 설명하자면 미츠하의 타액과 섞여 부서진 찐 쌀 속의 전분들이 타액 속 아밀라아제와 반응해 분해되어 당류로 변한다. 이런 당류들을 다시 호리병 속 공기 속에 존재하는 자연 효모들이 발효시켜서 알코올을 만들어 내게 되고 그래서 최종적으로 호리병 속에서 술이 만들어진다.
제조법을 들으신 분들은 눈치채셨겠지만 아주 원시적인 제조법이고(솔직히 애니메이션에 나온 방식 그대로 만들면 술이 될 가능성보다는 그냥 썩어버릴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아주 예전에 만들었었던 술이며 대개 여자들이 만들었다고 해서 '미인주'라고도 불린다.
애니메이션의 배경인 일본에서는 만엽집(万葉集, 만요슈. 일본 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시집.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전작인 ‘언어의 정원’에서도 여러 번 언급된다)에서 쿠치카미자케의 제조법이 처음 언급되지만 일본 고유의 술은 아니고 한국, 중국은 물론 옛날 아메리카 대륙 쪽에서도 비슷한 제조법으로 술을 만들었었다.
여주인공인 미츠하의 집안은 신관(신토라는 일본 토속종교의 성직자. 엄밀히 말하면 성직자보다는 봉사자에 가깝고 신토라는 종교도 종교라기보다는 생활 관습에 더 가깝다)을 대대로 해온 집안인데 신토는 토속종교라는 특성상 타 종교 대비 술에 매우 관대한 편이다. 새해가 밝았을 때 신사에 참배하러 오는 참배객들에게 신주라는 이름으로 술을 나눠주는 풍습도 있고 신사에서 모시는 신들에게 술을 봉헌함으로써 풍작을 기원하는 풍습도 있다.
일본 관광 가서 신사에 들러본 분들은 많이들 보셨을 것 같은데 신사 주변에 72리터짜리 큰 술통들이 쌓여 있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그 술통들이 신사에 봉헌된 술이다. 극중에서는 쿠치카미자케라는 큰 상징물을 자연스럽게 도입시키기 위해 미츠하를 신관 집안의 딸로 설정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인 타키와 미츠하는 이런 쿠치카미자케를 매개로 삼아 다시 만난다. 당연하겠지만 현대 신사에서 쿠치카미자케를 애니메이션처럼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들었는데 극중에서는 쿠치카미자케 특유의 주술적인 이미지를 사용하기 위해 이런 장면을 넣은 것 같다. 주술적인 의미도 의미겠지만 사람의 입으로 만든 술을 다른 사람이 마심으로써 연결된다는 건, 그리고 그 상대방을 결과적으로 구원해낸다는 건 정말 로맨틱하다. 참고로 애니메이션이 대 히트한 후 영화의 무대 중 하나였던 기후현의 히다시 양조장에서 쿠치카미자케 스타일의 술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걸 한잔 마시면 나도 누군가와 몸이 바뀔 수 있으려나?
당연하지만 제조공정에 타액이 사용되지는 않았고(^^) 관심 있는 분은 이 링크를 확인하시면 될 것 같다.
애니메이션 내내 벌어지는 이런저런 일들, 두 남녀 주인공의 만남과 헤어짐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대해 관객들은 다양한 느낌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감독인 신카이 마코토는 애니메이션의 엔딩에 대해 “‘이 사람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몰라’와 같은 감정은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도 간혹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타키와 미츠하도 그 계단에서 조그마한 확신을 가지고 지극히 평범한 남자와 여자처럼 만났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그 뒤의 이야기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고 싶네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너무 여운만 남기지 말고 이왕 쓰는 거(응?) 팍팍 좀 쓰지 하는 생각도 안 드는 건 아니었는데, 역시 그런 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스타일은 아닌 것 같다.
전작과 비교를 해 봐도 그런 것이 세상사에 닳을 만큼 닳은 아재의 눈으로 보기엔 <언어의 정원>이나 <초속 5센티미터>가 훨씬 더 현실에 가깝고 그래서 더 애절했지만 반대로 <너의 이름은.>처럼 판타지를 기반으로 딱 신카이스럽지만 기분 좋은 마무리를 해 주는 것도 참 좋았다. '어차피 현실에 두 발 딛고 사는 처지에 좀 현실적이지 않은 걸 보며 같이 기뻐하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싶었다.
그나저나 오래간만에 풋풋한 사랑 이야기를 보았더니 마음속이 마치 애니메이션 속을 수놓았던 하늘빛처럼 상큼해졌다가 저런 풋풋한 연애하고는 한 10만 8천 광년 정도 거리가 있었던 내 고등학교 시절이 갑자기 떠올라 매우 암울해졌다. 그리고 이 두 주인공이 정말 부러워졌다.
하긴, 누구든 이런저런 과정을 거치며 어른이 되는 것 같다. 저렇게 예쁜 연애를 해가며 어른이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감독의 전작인 <초속 5센티미터> 같은 애절한 연애를 했던 사람도 있겠지. 누구든 자기 역사를 하루하루 쌓아가며 살아가고 그 결과가 지금의 나일 텐데 뒤돌아보고 아쉽다고 생각해봤자 소용없는 일일 것이다. 그죠? 그러고 보니 아들 첫 핸드폰 카톡 프로필 사진이 트와이스의 정연 씨 사진이던데, 첫사랑은 언제쯤 하려나 궁금해지네. 하하.
새해가 밝았다. 역대 최고로 새해 같은 느낌 안 드는 새해 첫날 이런 상큼하고 여운이 오래 남는 애니메이션을 본 것만으로 왠지 올 한 해는 작년보다 조금 더 좋은 해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글을 본 모든 독자분들도 2017년은 2016년보다 조금 더 좋은 해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해본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데렉 / 술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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