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키타(졸리 음분두)와 토리(파블로 실스)는 최근 벨기에로 이주한 아프리카계 이민자 남매다. 이들은 쉼터에서 지내며 정식 체류증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로키타가 체류증을 얻으려면 인터뷰에서 토리가 친동생임을 입증해야 한다. 그런데 토리가 동생임을 어떻게 알아봤는지를 설명하는 과정이 까다롭다. 설상가상으로 인터뷰에서 몇 가지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서 난처한 상황이 된다. 그전까지도 마약 거래와 같은 위험한 일을 감수했던 로키타는 가짜 체류증이라도 발급받기 위해 석 달 동안 외부와 단절된 채 지내야 하는 열악한 대마 농장 일을 받아들인다. 로키타를 힘들게 하는 건 오랫동안 토리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어딜 가도 함께인 두 사람은 뗄 수 없는 한 쌍 같다. 작지만 단단한 토리는 로키타가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말을 거들거나 바른 소리를 하면서 든든하게 곁을 지킨다. 로키타가 휴대전화 사용마저 제한당하면서 남매는 연락조차 할 수 없는 위기에 처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든 서로 연결될 방법을 찾고야 만다.
다르덴 형제는 <약속> 등 초기작부터 벨기에를 배경으로 이민자의 노동 문제를 다뤄왔다. <토리와 로키타>를 기점으로 그들의 영화 세계를 돌아볼 때, 주제의 영속성 속에 또렷한 변화를 감지하게 된다. 영화의 관점이 이민자를 받아들이는 주인공에서 이민자 주인공으로 이동하면서 인물 묘사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토리와 로키타>에서 주인공이 겪는 피해의 묘사를 마주하면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서 죽음이 이토록 비정하게 묘사된 적이 있었는지를 따져 묻게 된다. 죽음의 화살로부터 비켜난 자리에 있던 다르덴 형제의 인물이 죽음과의 거리를 좁힌 시점은 이민자 주인공의 등장과 포개진다. 근작 <소년 아메드>에서 죽음과 인물의 거리가 좁아진 이후 <토리와 로키타>에서는 마침내 죽음이 인물에게로 덮쳐온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도 희망을 말할 수 있다면 영화가 토리와 로키타에게 서로의 존재를 허락했기 때문이다. 다르덴 형제는 전작에서도 서로에게 구원인 관계를 묘사한 적은 있지만, 그 관계가 이처럼 단단했던 적은 드물다. <약속>의 이고르와 아시타, <자전거 탄 소년>의 시릴과 사만다 등 혈연을 넘어 강력하게 맺어진 몇몇 쌍이 연상되지만, 토리와 로키타는 유사 모자 관계를 벗어나 보다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로키타와 토리가 실제 어떤 관계이고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두 사람의 관계를 말하는 데는 운명이나 주술 같은 수식이 더 적절해 보인다. 서사에서 가장 큰 위기는 두 사람의 분리이며, 가장 큰 기쁨은 두 사람의 재회에 있다. 둘의 관계는 다르덴 형제의 영화 속 다른 주인공이 아니라 차라리 오랜 협업으로 뗄 수 없는 한 몸을 이룬 두 명의 감독, 장 피에르 다르덴과 뤽 다르덴의 관계에 비견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이 분리된다는 것은 그들은 물론 관객인 우리로서도 상상하기 힘들다.
영화는 로키타가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상황에서조차 토리가 가까이에 함께 하도록 만든다. 토리가 로키타의 일터에 몰래 잠입해 들어와 두 사람이 오랜만에 함께 노래하고 피자를 나눠 먹으며 작은 기쁨을 누릴 때, 베팀이 들이닥치며 평화는 깨진다. 체류증에 들어갈 증명사진을 찍겠다던 베팀은 로키타가 옷을 벗는 장면까지 추가로 촬영할 것을 강요한다. 그사이 토리는 침대 아래에 숨어 이 상황을 들어야만 한다. 이는 로키타의 수치심을 증폭하고 토리에게 충격을 주는 비윤리적 묘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토리가 이후 자학하는 로키타를 가만히 위로할 때, 그 순간 로키타 곁에 토리가 함께 있음에 안도하게 된다. 공황 장애를 앓는 로키타는 토리를 만날 수 없다는 생각만으로도 호흡이 가빠지고 발작에까지 이른다. 토리는 마치 늘 몸에 지니고 다니는 부적처럼 로키타에게 존재만으로 안정과 힘을 준다.
다르덴 형제가 로키타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외면하지 않기로 하면서 다르덴의 영화에는 전에 없던 생략과 점프가 두드러지게 된다. 이를테면 로키타가 성적으로 유린당하는 상황이 암시된 이후 구체적인 묘사 없이 상황을 생략하고 다른 숏으로 점프한다. 이는 묘사의 곤경을 드러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감독의 적극적인 의지를 반영한다. 영화는 로키타의 인터뷰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질문자의 모습은 화면 밖 음성으로만 개입하고 카메라는 내내 로키타의 얼굴만을 클로즈업으로 당겨 주시한다. 로키타가 시선을 이동함에 따라 로키타의 왼쪽에 존재했던 동행한 교사의 존재가 뒤늦게 드러나지만, 질문자의 모습은 시퀀스가 끝날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다르덴의 영화에서 같은 공간에 있는 인물의 몸을 철저히 배제한 경우는 드물다. 인물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롱테이크는 단지 주인공이 겪는 심리적 압박을 전달하는 것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인물의 반응에 집중하겠다는 의지 역시 담긴다. 로키타와 토리가 한 식당에서 노래하는 아르바이트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관중의 반응을 배제하고 노래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만 오롯이 집중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 장면에서 고된 노동만이 아니라 작은 즐거움도 발견하게 된다.
노래방 기계로 두 사람이 함께 부른 노래는 로키타의 휴대전화 벨소리로 변주되어 반복 등장한다. 다르덴의 영화에서 노래하는 장면은 이전에도 등장한 바 있지만, 같은 노래가 테마처럼 반복되어 불리는 일은 이례적이다. 이탈리아어로 불린 노래는 실제 유대인과 이민자들의 노래이기도 했다고 감독은 소개했다. 상징적인 가사와 담담하면서도 울림을 주는 멜로디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전달한다. 마치 노래의 멜로디와 가사가 그 노래를 만들고 부른 사람의 시간과 영혼을 기억하는 것만 같다. 그 노래는 로키타와 토리의 우정을 기억하게 하는 동시에 관객에게도 강렬한 주술이자 마력으로 작동할 것이다.
다르덴 형제의 이전 영화에서 기적의 실행과 마술 같은 장면은 영화 속 주인공을 구원하는 데 사용됐다. 현실과 영화의 관계를 더욱 좁히기로 마음먹은 다르덴은 주인공을 구원할 수 없는 현실을 영화로나마 실현하는 식의 기만적 타협을 포기한다. 이제 기적과 마술은 영화가 끝난 뒤 영화와 관객 사이에서만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그 기적은 관객의 변화와 행동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누군가에게 난처한 압박처럼 느껴질 수 있다. 누군가는 영화 속 냉정한 현실 묘사를 감독의 비정함으로 등치 하거나 영화의 내적 작동 방식을 분석하는 것으로 외면할 수 있겠지만, 현실 인식이 영화의 마력과 분리되지 않다고 인식할 새로운 관객을 영화는 어느 때보다 절실히 기다린다.
리버스 reversemedia.co.kr
김소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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