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여성 주인공’의 전성시대다. 최근 공개된 한국 컨텐츠들 – <길복순>(변성현, 2023), <닥터 차정숙>(JTBC), <종이달>(티빙), <나쁜 엄마>(JTBC) 등 – 은 킬러, 의사, 은행원 등 각기 다른 커리어를 가진 개성 강한 여성 리드들을 전면에 앞세워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중이다. 사실 여성 캐릭터가 지금과 같이 주요 캐릭터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현상이다. 특히 여성 캐릭터의 수가 현저히 적었던 컨텐츠 속에서 현재와 같은 전문직, 혹은 유의미한 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멋진 여성 캐릭터를 기대하기란 더더욱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2000년대 초반 벡델 테스트(Bechdel test: 영화나 여타 픽션물에서 여성의 재현을 측정하는 테스트로 전반적으로는 여성의 존재를 질적, 양적으로 평가하는 테스트라고 할 수 있다)가 성행하게 되었던 이유도 할리우드의 주류 영화들과 드라마들의 지나친 젠더 불평등을 기반으로 한 비판에 대한 대응이었다.

<닥터 차정숙>

지난 한국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는 드물기도 했을뿐더러, 여성의 직업은 지극히 주변적이거나 성적 대상화에 근거한 설정들로 이루어졌다. 한국 영화산업이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고 규모를 확장하던 1950년대 후반부터 군사정권의 종말을 알린 1980년대 후반까지 30년여 년 동안 전후 한국 영화를 군림했던 영화 속 여성 주인공들의 직업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관습적이었으며 예측 가능한 것들이었다. 그들은 주부(예. <자유부인> 한형모, 1956), 식모(예.<초우> 정진우, 1966), 혹은 성 노동자(예.<나는 77번 아가씨> 박호태, 1978, <티켓>(임권택, 1986) 범주의 직업군으로, 이들의 노동은 가부장제 안에서의 여성의 영역, 즉 ‘가정일’을 직업화 한 것이거나 영화 속에서 성적 스펙터클을 빈번히 제공하기 위한 직업 설정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이 지점에 있어 1970년대 급격히 일어났던 한국의 산업화 역시 영화의 캐릭터 형성에 기여를 했던 것이 사실이다. 시골에서 서울로 일을 구하기 위해 상경하는 젊은 여성의 수난기를 그린 ‘호스티스’ 장르는 이 시기에 증가했던 성 노동자들을 주제화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기간에 유행했던 이 영화들의 대부분이 여성의 노동환경과 노동에서 오는 애환이 아닌, 젊은 여성의 성적 추락을 강조한다는 면에서 이 영화들은 여성의 직업군을 영화적 에로티시즘의 수단으로 사용했다고 판단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서울에서 호스티스가 된 고나의 이야기를 그린 <나는 77번 아가씨>

이는 여성 스타를 원톱 주인공으로 한 호스티스 영화들이 가장 많이 쏟아져 나온 1970년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영화의 여성재현사史)에 있어 진보를 이루어냈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1970년대의 극장가를 지배했던 호스티스 영화는 조금 더 강도 높은 에로티시즘으로 중무장한 “벗는 영화”, 혹은 성애 영화로 발전(?)하여 1980년대 중반까지 박스오피스의 선두를 달렸다.


주류 상업영화 안에서의 이러한 천편일률적 여성 노동의 범주화 그리고 재현은 1990년대에 이르러 이른바, ‘기획영화’ 시대가 열리면서 눈에 띄는 변화를 보인다. 영화의 고안, 제작의 전반이 감독과 작가의 손에서 배태(胚胎)되던 선대(先代)와는 달리 영화 속 인물과 내용에 관객의 구미와 선호도를 직접 반영하여 영화를 기획하는 ‘전문 기획자’ 혹은 ‘프로듀서’의 등장은 “한국 영화의 내용적 측면과 산업적 판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는”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시장조사를 통해 정보 수집과 분석, 트렌드 반영,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등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기획 영화의 대표작들 속에서 여성 주인공은 성우(<결혼이야기>, 김의석, 1992), 가요 작사가(<닥터 봉>, 이광훈, 1995) 등 이른바 ‘커리어우먼’에 부합하는 직업군들로 설정되었다.

이후 2000년대의 한국 영화는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기술적인 면에서 그리고 산업적인 면에서 엄청난 성장을 기록했다. 제작 편수가 증가하고, 극장이 여러 상영관을 보유해 다양한 관객을 유도한 이른바 멀티플렉스 시대가 열리면서 산업은 황금기를 맞았다. 역설인 것은 주류 한국 영화 속 여성 캐릭터는 오히려 더 부차적이거나 소품적인 인물로 하락한다는 점이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영화는 주류 영화들 속에서 급격히 감소했고 주인공급이 아닐지라도 내러티브에 주요한 역할을 하는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사례 역시 큰 폭으로 줄어들었다. 결과적으로 이 시기에 제작된 상업영화들에서는 ‘일하는 여성’의 재현을 추적하기 힘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2000년을 대표하는 최고 흥행작, <공동경비구역 JSA>에서도 ‘소피’(이영애)는 소령이라는 그럴듯한 고위직 여성으로 등장하지만 맡은 역할은 사건을 전달하는 내레이터에 그친다. 그러나 영화학자 박유희가 지적하듯, 2000년대에 일하는 여성을 조명한 영화가 많지 않음에도 이런 영화들이 여성의 직업을 설정하고 재현하는 데 있어서 이전의 영화와 완전히 “다른 양상과 지형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특히 19990년대 말 금융위기 이후 제작된 여성을 메인 캐릭터로 한 상업 영화에서 일하는 여성·여성의 노동은 비교적 현실적이고 비중 있게 다루어지거나, 사회적 변화를 반영하는 직업군으로 등장하는 경향을 보인다. 예를 들어 <해피엔드>(정지우,1999)의 여주인공, 보라(전도연)는 금융위기로 휴학생이 폭증하면서 호황을 누렸던 영어학원의 원장으로 등장하여 영화 속에서 같은 시기에 실직한 은행원 남편, 민기(최민식)와 대조를 이룬다. <오로라 공주>(방은진, 2005)에서 정순(엄정화)은 2000년대에 전문직 여성한국연맹(BPW)으로부터 “여성에게 유망한 20가지 직종” 중 하나로 꼽혔던 ‘자동차 딜러’로 등장해 당시 여성들의 선호 직업을 직접적으로 반영하기도 한다.

<오로라 공주>. 현재 방영 중인 <닥터 차정숙>의 엄정화가 정순정 역으로 출연한다.


2010년대를 거쳐 현재까지 심도 있게 논할 수 있을 만큼의 여성(노동자) 캐릭터가 등장하는 한국 영화의 편수가 많지 않으나 여성이 주인공이거나 주요 캐릭터로 등장하는 영화의 경우, 직업군이 이전보다 현실적인 선택이 이루어진다. 특히 여성 창작자에 의해 만들어진 서사에서 여성의 직업은 단순히 내러티브를 위한 선택을 넘어, 여성을 사회적으로 유의미화하고 여성의 노동을 재정의하거나 불평등한 노동 현장을 비판하는 수단으로 전략적으로 선택되는 경향을 보인다. 최근 공개된 드라마, <닥터 차정숙>(정여랑 극본) 역시 단순히 여성 의사로서의 일상뿐만 아니라 경력이 단절되었던 중년 여성의 노동 현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진보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국 드라마에서 보이는 다양한 변화가 한국 영화에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K-컨텐츠의 인기와 위상이 해가 다르게 높아지는 현재, 성공의 이면 역시 중요해지는 시기다.


김효정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