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2일은 히스 레저의 기일입니다. 벌써 9주기가 되었군요. 아무도 예상치 못한 죽음이었습니다. 갑자기 세상을 등진 그의 소식에 팬들의 안타까움은 배가 될 수밖에 없었죠.

사망 당시 그의 죽음을 둘러싼 루머들이 많았습니다. '아내 미셸 윌리엄스, 딸 마틸다와 헤어진 후 우울증이 심해져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다크 나이트>의 캐릭터 '조커'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는 등, 그의 죽음을 자살로 몰고가는 이야기들이었죠. 

그는 연기를 비롯한 앞으로의 나날에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촬영중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린 건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우발적인 죽음을 택할 사람은 아니었죠. '과거'나 '미래'가 아닌, 오롯이 '현재'를 살고자 했던 배우, 히스 레저. 오늘은 그가 남긴 캐릭터들과 함께 그의 발자취를 돌아보려 합니다.

나는 계획을 세우는 데 낯설다. 사실 나는 계획 같은 건 전혀 세워본 적이 없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나에겐 플래너 노트도 없으며, 일기를 써본 적도 없다. 나는 완전히 현재에 산다. 과거나 미래에 살지 않는다.

- 히스 레저

호주 드라마 <스위트>, 히스 레저 어린 시절

특별한 아우라를 풍기던 소년
히스 레저는 이름부터 특별합니다.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을 인상 깊게 본 그의 부모님은 그에게 주인공 '히스클리프'의 이름을 따 '히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죠. 그는 어린 시절부터 여러 예술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던 소년이었어요. 미술, 음악, 춤, 시… 그중엔 연기도 있었죠. 10살 때부터 지역 극단 무대에 올라서기 시작한 그. 대중의 시선을 받기 시작한 건 호주 드라마 <스위트>에서 게이 청소년 스티브 역을 맡으면서부터였습니다. 그의 나의 16살 때 일이었죠.

호주에서 커리어를 쌓던 그는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로 할리우드에 입성하게 됩니다.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하이틴 버전으로 바꾼 로맨틱 코미디였죠.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였지만 따스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던 패트릭! 여심 저격은 물론, 할리우드 저격까지 성공한 캐릭터였습니다.

캣(줄리아 스타일스)에게 'Can't Take My Eyes Off You'를 부르며 고백하던 장면은 로맨틱 코미디의 바이블로 남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못 보신 분들은 한 번, 아니 두 번, 꼭꼭꼭 보시길 권합니다!) 이후 그는 멜 깁슨과 호흡을 맞춘 <패트리어트>, <기사 윌리엄> 등에 얼굴을 비추며 연기력과 스타성을 동시에 잡아내기 시작합니다.


몬스터 볼, 그림 형제 - 마르바덴 숲의 전설

'스타'가 되기를 거부하다
이후 그는 '할리우드 청춘 아이콘 스타'로 떠오르며 여러 시나리오를 받기 시작합니다. 공식에 틀어박힌 로맨스물이 대부분이었죠. <스파이더맨>의 피터 파커 역을 제안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런 시나리오엔 흥미를 느끼지 못했어요. 주연이든 조연이든, 자신을 마음껏 분출할 수 있는 캐릭터를 선택했죠. <몬스터 볼> 속 '소니'나, <그림 형제 - 마르바덴 숲의 전설> 속 '제이콥'이 대표적이겠네요. 덕분에 그의 필모에는 각각 제 스타일이 뚜렷한 인물들이 차곡차곡 쌓여갔습니다. 관객들은 그의 폭넓은 연기력에 감탄하기 시작했죠.

브로크백 마운틴

2004년, 그는 그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작품 <브로크백 마운틴>을 만나게 됩니다. 20년 동안 묵묵히 제 사랑을 지켜내는 에니스는 관객들의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한 캐릭터였죠. <브로크백 마운틴>의 원작자 애니 프룰스는 "히스 레저(Heath Ledger)는 성을 전설(legend)로 바꿔야 될 것 같다"며 그를 대단한 배우라고 칭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 작품으로 오스카 남우주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되었죠.

영화 본 사람만 온전히 공감할 수 있다는 희대의 명장면ㅠㅠㅠㅠ

다크 나이트

역사에 남을 캐릭터, '조커'
<몬스터 볼>에서 그의 연기를 인상 깊게 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그에게 조커 역을 제안합니다. 그는 조커를 연기한 최연소 배우였죠. 원작과 전작 팬들의 우려가 있긴 했으나, 그는 웃음소리 하나로도 소름 끼치게 만드는 역대급 연기를 선보이며 슈퍼히어로물의 역사에 길이 남을 캐릭터를 탄생시켰습니다. 심지어 베테랑 배우 마이클 케인이 조커를 연기하는 그의 포스에 눌려 자신의 대사를 까먹을 정도였죠.

'조커'라는 캐릭터를 탄생시키기 위해 그가 했던 노력들은 이미 유명합니다. 6주 동안 호텔에 틀어박혀 배트맨 영화와 만화를 보며 그를 연구했고, 그의 입장에서 일기를 쓰기도 했죠. 일기장엔 끔찍한 뉴스와 그림 등이 담겨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촬영 내내 다크 포스를 내뿜었다 생각하면 오산! 촬영장의 스탭들은 모두 그를 친절한 배우로 기억합니다. 촬영 기간 내내 온갖 에너지를 쏟아넣었던 그. 히스 레저는 '조커를 연기한 게 아니라 조커가 되었다'는 평을 받으며 레전드로 남았죠. 사후엔 오스카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제81회 오스카 시상식

파르나서스의 상상극장

동료들이 완성시킨 그의 유작
2008년 1월, 사망 당시 그는 신작 <파르나서스의 상상극장>을 촬영하던 중이었습니다.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으로 촬영이 중단되었으나, 그를 사랑하던 동료들로 인해 영화가 재탄생될 수 있었죠. 조니 뎁, 주드 로, 콜린 파렐이 새로 합류했습니다.

조니 뎁, 콜린 파렐, 주드 로

그들은 히스 레저의 역할이었던 '토니'를 연기했어요. 영화엔 '토니'의 모습이 계속 바뀐다는 설정을 추가했죠. 주연 배우의 죽음, 새로운 배우들의 합류 등 예상치 못한 상황이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영화가 탄생했습니다. 이들의 우정은 관객들의 마음을 데우기에 충분했죠. 세 명의 배우는 출연료 전액을 히스 레저의 딸인 마틸다에게 기부했습니다.


다크 나이트, 조커 인질극 장면

연기를 넘어 연출까지
<다크 나이트> 속 조커가 고담 케이블 뉴스에 보낸 두 개의 인질극 비디오는 히스 레저가 직접 연출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 비디오는 놀란 감독이 지켜보는 가운데 촬영을 이었고, 두 번째 비디오의 연출은 히스에게 온전히 맡겼다고 하네요.

그는 생전 연출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4편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했고, 친구 사이였던 가수 벤 하퍼와 레이블 'Masses'을 만들기도 했죠. 2007년 베니스 영화제 기자회견에서는 뮤지션 닉 드레이크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연출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체스를 다루는 장편 영화 <퀸스 갬빗>을 연출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고요. 그러나 모두 그의 죽음으로 무산되고 말았죠.


내 영화가 영원히 남는 것이며,
사람들은 영화로 나를 평가할 것이다.
나는 그 영화들을 통해
항상 궁금증을 주는 존재로 남고 싶다.

- 히스 레저

한없이 깊은 눈을 지니고 있었던 히스 레저. 그의 색다른 얼굴들을 더는 볼 수 없다는 건 분명 슬픈 일이죠. 하지만 생전 그가 남긴 말처럼, 그는 영원히 영화 속에, 관객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겁니다. 한없이 빛나는 영화계의 아이콘으로 말이죠.


씨네플레이 에디터 코헤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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