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시저는 잘 지내고 있었을까? 8월 국내 개봉을 앞둔 <혹성탈출: 종의 전쟁>을 조금 일찍 만나기 위해, 조금 이른 아침 이층버스를 타고 런던 시내를 통과하는 동안, 가장 궁금했던 것은 시저의 안부였다. 아니, 그 사이 유인원들에게 정복당했을지 모르는 동족 인간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 한 침팬지의 안전을 먼저 살피는 이 반인류적인 궁금증은 도대체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명석한 두뇌와 따뜻한 심장, 사려 깊은 결단력과 거침없는 전투력을 갖춘 의연하고 우아한 유인원의 리더, 인간보다 인간적인 혹은 인간 이상으로 이상적인 시저는 아마도 나를 비롯해 많은 관객들로 하여금 종을 뛰어넘는, 심지어 온몸에 고르게 분포한 풍성한 모발마저 극복할 호감을 품게 했을 것이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2011),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2014)으로 이어진 <혹성탈출> 시리즈는 시저의 성장과 변화를 따라가는 영화들이었고, 시저의 그간 변화와 안부를 확인하는 것은 다음 시리즈를 예상하는 가장 정확한 열쇠일 것이다. 어미의 높은 지능을 물려받아 고도의 지적, 언어적 능력을 가진 채 태어난 침팬지 시저(앤디 서키스)가 어느 날 자신이 인간의 애완동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결국 인간의 집과 자신의 집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운명을 자각하는 순간, 오랜 시간 모래 속에 덮여 있던 20세기 클래식 <혹성탈출>은 마침내 프리퀄(전사)의 새 장을 열 수 있었다. 이후 시저의 진화는 시리즈의 진화였고 시저의 갈등은 시리즈의 화력이었다.
그리고 3년 전, 관객들은 인간 종족과의 막을 수 없는 전쟁을 예감하는 시저의 슬프고도 결연한 눈동자를 마지막으로 목격했다.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Ape Not Kill Ape)”, “유인원은 뭉치면 강하다(Apes Together Strong)” 같은 단순하고도 분명한 원칙이 깨어지고 위협받는 시대를 맞이한 시저는 이제 어떤 원칙과 전략으로 인류와의 전쟁에 맞설 것인가. 그리고 시저의 내부에서는 무엇이 깨어졌고 또 무엇을 위협받게 되는가.
지난 5월 6일, 영국 런던에서는 배우 앤디 서키스와의 인터뷰를 앞두고 <혹성탈출: 종의 전쟁>의 1시간 정도의 하이라이트 시사가 이루어졌다. 여전히 몇몇 신의 컴퓨터 그래픽은 완성되지 않은 채였지만 <혹성탈출> 시리즈 세 번째 장의 거친 박동과 더욱 광활해진 스케일을 짐작하는 데는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영화 초반부 숨막히는 전투신의 스펙터클을 책임지는 시저는 더이상 자신의 정체성을 갈등하는 어리고 여린 유인원이 아니다. “당신이 그로군요. 당신이 바로 시저군요.” 어느덧 카리스마 넘치는 종족의 리더로 성장한 시저의 명성은 인간세계까지 신화처럼 퍼져나간다. 하지만 진화한 유인원 집단의 존재가 인간에게 알려진 이후, 악명 높은 대령(우디 해럴슨)을 중심으로 이들을 찾아내 몰살하려는 인간 군대의 바쁜 발걸음은 유인원들의 평화를 점점 더 위협해오고 있다.
그 사이 짧은 단어의 조합들로 이루어졌던 유인원들의 대화는 보다 유려하고 완성된 문장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빠르게 진화하는 유인원들과 반대로 인간 종족의 어떤 부분들은 빠르게 퇴화되고 있다. 클래식 <혹성탈출>이 50년 전에 미리 그려냈던 풍경대로 인간의 언어능력이 사려져가는 가운데, 여전히 말을 할 수 있는 인간들은 인간성을 잃은 광기의 병기들로 바뀌어간다. 결국 인류는 인류의 존속을 위해, 유인원은 유인원의 생존을 위해 불가피할 수밖에 없는 ‘종의 전쟁'을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인간 군대의 습격으로 상처 입은 동족을 마주하게 된 시저의 내부는 크게 흔들린다. 지금까지 전쟁과 반목보다는 평화와 공존의 편에 섰던 시저는 결국 복수의 칼을 품은 채 무리를 떠난다. 인간을 징벌하기 위해 떠난 여정에서 그는 점점 죽은 코바를 닮아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결국 유인원은 과거의 인류를 닮은 또 다른 세상의 지배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인간에게 패배하여 사라질 것인가. 혹은 새로운 세상의 새로운 종족으로 진화할 것인가.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무서운 게 뭔지 알아? 유인원들은 전력도 불빛도 난방도 필요 없다는 거야.” 진화한 두뇌를 가진 인류는 그것을 이용해 물리적으로 크고 강한 존재들에게 멸종당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심지어 생태계의 꼭대기에서 인간 외의 종족을 먹고 사육하고 지배했다. 하지만 만약 체력과 생존력이 인간보다 훨씬 강한 존재들이 지능적으로 우월해지고 진화한다면, 그리고 인간만의 가치라고 믿었던 '인간성'(휴머니티)까지 장착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인류는 과연 그럼에도 남겨질 가치가 있는 존재들인가. 인류와 가장 닮은 종족인 유인원의 반격을 내세워 아이러니하게도 관객들로 하여금 인간이 아니라 정작 그들의 안위를 걱정하게 만드는 시리즈, <혹성탈출>의 질문은 어쩌면 이토록 명쾌하다. 우리는, 인류는, 지금 이대로 괜찮습니까.
인터뷰 | 앤디 서키스 (시저 역)
3년 만의 만남이다. 2014년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의 개봉을 앞두고 이 시리즈의 주요 배경이 되었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앤디 서키스를 <혹성탈출: 종의 전쟁>의 개봉을 앞두고 이 배우의 고향인 영국 런던에서 다시 만났다. 앤디 서키스가 아닌 시저를 상상할 수 있을까. 상상의 영역을 가시적인 연기로 치환시킨 퍼포먼스 캡처 배우로서의 그의 능력은 이 시리즈의 엔진이었고, 결코 디지털 좌표 속에 잠식당하지 않는 그의 감정은 이 시리즈의 심장이었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였던 골룸과 스미골을 연기했고 <킹콩>, <틴틴의 모험>, <스타워즈> 등 퍼포먼스 캡처 분야의 대표적인 배우로 자리잡은 앤디 서키스는 특히 <혹성탈출> 시리즈의 시저 캐릭터를 통해 기술과 손잡고 배우의 영역을 넓혀가는 동시에, 기술이 절대로 대체할 수 없는 배우만의 가치를 알려준 배우였다.
결코 만만하지 않았을 지난 여정의 흔적이 나이테처럼 내려앉은, 시저가 아닌, 앤디 서키스의 맨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당연하면서 생경한 풍경이었다. 리차드 링클레이터가 한 소년의 12년간의 삶을 고스란히 영화 속에 담았던 것처럼, 2011년부터 시작된 <혹성탈출> 3부작을 “유인원 버전(Apehood)의 <보이후드>(Boyhood)를 찍은 셈”이라고 설명하는 앤디 서키스. 인간의 절반 정도 되는 유인원들의 수명을 생각해본다면, 시저로 살아온 지난 7년은, 어쩌면 그 이상인 셈이다.
백은하: 영화 전체가 아니라 겨우 반 정도를 보았을 뿐이지만 이미 엄청난 느낌이 듭니다. 남은 부분들이 너무나도 궁금하구요. 이번 편에선 새롭고 흥미롭고 또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앤디 서키스: 전 시리즈를 함께해온 로켓(테리 노터리)을 비롯해서, 카린 코너발이 연기하는 모리스를 또 다시 만날 수 있구요. 이번 시리즈에서는 새로운 3명의 캐릭터가 등장하는데요. 스티브 잔이 연기하는 ‘배드 에이프’와 어린 소녀(아미아 밀러)가 시저의 여행에 동참하게 되죠. 그리고 마침내, 엄청난 배우 우디 해럴슨이 시저를 복수의 기계로 변모시키는 대령을 연기합니다.
백은하: 시저의 성장담으로 시작해서 점점 거대한 서사로 이어지는, 참으로 긴 여정이었습니다.
앤디 서키스: 그래요. 참으로 긴 여정이었어요. 이 3부작을 돌이켜보면 저로서는 이건 거의 <보이후드>랑 거의 필적할 수준이에요. '유인원후드'(Apehood)랄까. 갓 태어난 아기부터 성장한 어른까지 다 연기한 셈이니까요. 시저와 긴 여행을 함께한 기분이에요.
백은하: 시저는 이 시리즈를 통해서 계속적인 진화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번 시리즈에서 시저를 연기한다는 것은 배우로서 어떤 도전 혹은 어떤 장애물을 넘는 것이었나요?
앤디 서키스: 물론 육체적인 도전도 있었구요. 동시에 시저의 보다 또렷해진 의사전달에 대한 도전도 있었죠. 이번 편에서는 시저가 인간의 말을 보다 유연하게 구사하게 되는데, 어떻게 하면 유인원의 본질을 유지하면서도 인간의 말을 더욱 자연스럽게 쓸 수 있을까, 그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부분이 흥미롭고 실험적인 줄타기였죠. 그리고 감정적으로 시저의 큰 도전이라면, 이해심 깊은 리더에서 어두운 부분을 드러낸 복수의 화신이 된 그의 감정적인 궤적을 따라가는 부분이었어요. 이번 편은 '종의 전쟁'인 동시에 시저 내부의 '영혼의 전쟁'이고, 시저 스스로 자신을 다시 찾아나가는 전쟁이죠.
백은하: 개인적으로 이 3부작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시저가 처음으로 인간의 언어로 “노(NO)”라고 말하는 장면이었어요. 지난 시리즈를 돌이켜봤을 때 가장 기억할 만한 순간은 언제였나요?
앤디 서키스: 너무나 많은 순간들이 있죠. 특히 ‘반격의 서막’에서 시저가 자신의 아들에게 “우리가 사실 얼마나 인간들과 닮아있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장면을 정말 좋아하죠.
백은하: 저는 당신이 배우의 영역을 확장시킨, 그리고 배우라는 직업의 정의를 새롭게 쓴 배우라고 믿는데요. 어쩌면 발전된 기술이 배우의 영역을 대신할 수 있는 지금의 시대라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영화를 위해 오로지 배우만이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가 더욱 분명해지는 시대라는 생각이 듭니다.
앤디 서키스: 맞아요.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예요. 퍼포먼스 캡처라는 도구는 배우의 연기라는 예술을 보다 자유롭게 만들어주었어요. 이 도구를 통해 배우들은 무엇이든 될 수 있게 되었고, 어떤 존재이건 감정이 연결된 상태로 연기할 수 있게 되었어요. 동시에 저도 동의해요. 배우들은 절대로 기술력에 의해 대체될 수 없는 존재라고 믿어요. 하지만 이 기술을 적절하게 이용한다면 어떤 피조물이든 될 수 있고, 아예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할 수 있고 거기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죠. 이런 가능성의 도구로서 저는 이 기술이 여전히 너무 흥미롭습니다.
백은하: 한국 팬들에게 마지막 메시지 부탁드릴게요. 시저의 목소리로 해주실 수 있을까요?
런던 = 백은하/영화에 대해 쓰고, 영화배우를 연구합니다. unabeck@m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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