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15, 16, 소수, 18, 소수, 20, 21..." 캐서린은 걸어다니면서도 숫자를 외는 아이다. 그녀는 불과 10살에 버지니아 주 최고의 흑인 고등학교에 입학해 능숙한 수학 실력으로 학생은 물론 선생들까지도 경악케 한다. 1960년대, 세상은 어른이 된 캐서린을 어떻게 대할까? 출근길에 차가 퍼져 동료들과 진땀을 빼는 사이, 돕겠답시고 으스대는 백인 경찰은 그들이 나사(NASA)의 직원이라고 당당하게 소개하자 "파격적인 채용"이라며 깎아내린다. <히든 피겨스>의 오프닝은, 한때 천재라고 일컬어져 세계 최고로 추앙받는 조직에 몸담고 있는 이가 흑인과 여성이라는 이유로 노골적으로 하대받는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캐서린(타라지 P. 핸슨), 도로시(옥타비아 스펜서), 메리(자넬 모네)는 한시도 주눅드는 법 없이 이 상황을 유쾌하게 웃어넘긴다. 영화는 세 여성이 역사에 변화를 새기는 과정을, 그들의 태도를 따라 가볍고 쾌활하게 풀어낸다.
<히든 피겨스>는 나사에 근무했던 흑인 여성 캐서린 존슨, 도로시 본, 메리 잭슨의 삶을 기록한 논픽션을 바탕으로 한다. 지향하는 바는 명징하다. 과학기술이 발전해 우주 비행을 시도하는 1960년대에도 버젓이 인종차별이 횡행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흑인-백인 커플이 합법적으로 부부관계를 인정받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그린 <러빙>의 배경 역시 이 즈음임을 떠올려보자. 여성이라는 정체성 또한 차별의 대상이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주인공들이 몸담은 곳은 성차별이 극심하다고 알려진 과학 분야의 정점이라 불리는 나사가 아닌가. 지금도 "여성의 사고 구조는 지나치게 감성에 치우쳐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 어렵다"는 따위의 고정관념이 팽배한다는 걸 떠올려도 당시 차별의 골이 깊고깊었다는 걸 가늠할 수 있다. <히든 피겨스>는 자신이 원하던 '역할'에 닿기 위해 그 이중의 벽을 기어코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가려진 사람들'에게 기꺼이 스포트라이트를 던진다.
'인간 계산기'라 불리는 캐서린은 유색인종 여성 최초로 '우주 임무 그룹'에 배치되지만, 살인적인 업무 중에도 흑인 전용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아주 먼 거리를 매번 오가야 한다. 도로시는 공석에 따른 관리 업무까지 맡고 있지만, 흑인 인력은 관리직에 배정하지 않는다는 규정에 따라 번번이 관리직 승진에 실패한다. 메리는 엔지니어를 꿈꾸지만, 특별 강좌를 이수하는 조건이 따르고 그걸 들을 수 있는 백인 학교 햄프턴고에 입학하기 위해 법정에 서야 한다.
<히든 피겨스>는 그 수많은 '하지만'의 조건을 뛰어넘는 과정을 유려한 스토리텔링을 통해 보여준다. 자기를 둘러싼 미개한 한계를 허물고 제 뜻을 펼치는 이를 그리는 이야기의 힘을 아주 잘 알고, 그걸 적재적소에 배치해 관객의 마음을 움켜쥔다. 캐서린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백인 남성으로만 이루어진 사무실에서 경험하는 냉대와 고된 업무를 보여줌과 동시에, 싱글맘의 생활까지 비추면서 '여성'으로서 캐서린의 삶까지 끌어안는다. 일터에서 진행되는 서사가 인종을 극복하는 성취를 풀어낸다면, 그 바깥의 이야기는 방안에 옹기종기 앉아 있는 아이들에게서 힘을 얻고 새로운 연인을 찾는 순간들을 그린다. 후자와 관련한 일련의 시퀀스들이 정말 사랑스럽다.
차별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테마로 삼되, 톤은 내내 가볍다. (프로듀서로도 이름을 올린) 퍼렐 윌리엄스의 훵키한 리듬이 걸맞는 분위기가 내내 이어진다. <델마와 루이스> 같은 저명한 페미니즘 영화들이 가부장적인 질서에 순응하던 주인공이 독립적인 여성으로의 자신을 깨닫는 변곡점을 포함한다면, <히든 피겨스>의 주인공들은 애초부터 자신의 처지를 가볍게 웃어넘기고 당당한 태도를 일관하며 목표를 향해 성큼성큼 나아갈 뿐이다.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각성하는 시간을 경유하지 않고, 흑인과 여성의 도약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타라지 P. 헨슨과 자넬 모네, 옥타비아 스펜서가 분한 세 인물 자체가 정말 매력적인 한편, 영화를 돌이킬 때 그들이 '흑인 여성'이라는 상징으로만 떠오른다. 그들이 경험하는 갈등이 기대보다 밍밍하게 무마된다는 점 역시 아쉽다. 다만 유쾌한 상업영화라는 <히든 피겨스>의 지향점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방향이다. 영화는 개봉 13주째 북미 박스오피스 순위권을 유지하며 2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조연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케빈 코스트너는 캐서린이 속한 우주 임무 그룹의 수장 알 해리슨을 연기했다. 러시아를 앞질러 우주 탐사에 성공한다는 국가의 목표를 위해 애쓰는 관료와 인종차별에 대한 부조리를 제거해주는 리더의 역할을 두루 충족시키는 든든함이 코스트너의 무뚝뚝한 이미지에 묻어난다. 도로시의 의지에 찬물을 끼얹는 수퍼바이저 미첼, 캐서린의 뛰어난 능력을 경계하는 우주 임무 그룹의 수석 엔지니어 폴은 각각 커스틴 던스트와 짐 파슨스가 분했다. <빅뱅 이론>의 천재 너드 셸든으로 익숙한 파슨스는 캐서린의 과감한 행보에 열등감을 느끼는 상사와 백인 남성의 찌질함을 제대로 구사하며 미미하게나마 서사에 갈등을 곁들인다. 던스트의 나른한 얼굴에 서려 있는 신경질적인 기운은 직접적인 말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도, 구김살 없이 제 권리를 주장하는 도로시의 곧은 태도에 때마다 다른 기색으로 반응하는 놀라운 순간들을 선사한다. 시대상을 대변하는 세 주인공이 아닌, 주변인에 불과한 미첼과 폴에게서 개인의 감정이 작동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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