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경삼림> 영화 포스터

언제던가, 생활에 꽤 지쳐 있을 즈음에 우렁각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생활의 지겨움은 사실 돈으로 꽤 많이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알지만, 나에게 도움을 몰래 주는 사람이 돈이 아니라 나를 좋아해서 그런 행동을 해준다는 건 로맨틱하기도 하고 뭔가 SF적이기도 하다. 어느쪽이든 가슴을 설레게 한다.

내가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던 때 영화 <중경삼림>을 처음 접한 뒤 첫 에피소드보다는 두 번째 에피소드에 훨씬 더 많이 끌렸던 건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본 <중경삼림>의 첫 에피소드는 답답했다. 이런저런 사랑에 대한 금성무의 고민들은 이해는 가지만 오버스러워서 징그러웠고 임청하의 이야기도 그저 딴 세상 이야기였다.
 
그에 비해 두 번째 에피소드는, 심플하고, 깔끔하고, 내가 일정 부분 겪었던 그런 이야기였다. 누군가를 사랑해서 그 사람 주위를 맴돌고, 그 사람에게 선물을 주고 싶고, 이야기를 하고 싶고, 만나고 싶으면서도 자칫 그런 마음을 들킬까 주저하고, 그런 시간이 쌓이며 우연이 두 사람을 가깝게도 멀게도 하는 그런 흐름들 말이다.

따지고 보면 사랑에 대한 모든 이야기들은 지극히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이다. 사랑의 경험은 누구에게나 소중하고, 대부분은 그런 소중한 이야기들을 남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채 추억으로 간직하고 삶을 살아간다. 그러다 영화나 문학작품 속에서 비슷한 경험을 발견하면 그때 감정이 떠올라 감상에 젖는데, 역설적으로 그런 감상에 젖을 사람이 많기 때문에 그 영화나 소설은 인기를 얻는다.

우리가 종종 잊어버리곤 하지만 사랑에 관련된 에피소드들이 대부분 매우 보편적이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수많은 난관을 극복해가기도 하지만 또 이런저런 많은 우연들이 연인들을 서로 사랑하게, 혹은 이별하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술 한 잔에 마음을 의지하곤 한다.

<중경삼림>에는 곳곳에서 꽤 많은 술이 나온다. 금성무 에피소드 속 상점 진열대엔 진인 '고든'과 코냑인 '카뮈', 위스키인 '조니 워커'가 보이고 양조위는 레몬이 들어간 'Sol'이란 맥주를 마신다. 왕정문이 우렁각시 노릇(?)을 하며 양조위의 집 냉장고를 청소할 때 그 안엔 '하이네켄'이 예쁘게 들어가 있다.

우렁각시 왕정문(페이 웡). 가수로 더 유명하다고 하네요.

수년 전 하이네켄을 마시다가 놀란 건 아주 전형적인 독일식 맥주인 이 맥주가 독일산이 아니라는 거였다. 출장 중 우연히 만난 네덜란드인과 하이네켄을 마시다가 처음 들었다. 그분은 자기들은 하이네켄을 '해이너컨?' '해이너큰?' 뭐 그렇게 발음한다고 했던 걸로 기억한다.

하이네켄 병맥주. 출처 http://www.heineken.com/kr

하이네켄도 역사가 꽤 오래된 맥주인데, 1873년 제랄드 하이네켄이라는 사람이 처음 암스테르담에 맥주 공장을 세우고 라거 맥주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시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보리, 호프에 효모만을 써서 맥주를 만드는데, 재료만 보면 아주 전형적인 옛 독일식 맥주라고 봐도 될 것이다. 재료가 정해져 있다 보니 재료인 보리나 효모, 호프 등을 다른 걸로 쓴다든지, 혹은 발효탱크를 다른 방식으로 설계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맛의 차이를 만들어내는데 하이네켄 역시 자기 나름의 특이한 탱크와 효모를 사용한다. 사견이지만 캔보다는 병이 더 맛있다.

참고로 독일식 맥주와 정 반대 스타일인 맥주가 벨기에식 맥주인데, 위에 언급한 3가지 재료 이외에 다양한 첨가물과 향료를 써서 맥주를 만든다. 우리나라에서 구하기 쉬운 맥주 중에는 좀 우습지만 프랑스산인 '크로넨버그 1664 블랑'을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밤에 하이네켄을 마시며 글을 쓰다 든 생각이, 사랑뿐만 아니라 사람의 모든 삶에서 노력과 의지는 그 삶의 방향을 대략적으로 정할 뿐 각각의 사건들은 결국 운의 지배를 더 크게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각각의 사건들은 세월이 지난 후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 느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론을 내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언필칭 새옹지마라는 말을 하곤 한다.

임청하는 행복해졌을까? 금성무도 오히려 나중에 더 좋은 여자를 만났을지도 모른다. 경찰 633(양조위)도 집이 물바다가 되었을 그 당시엔 자기가 그 가게를 이어받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겠지. 그렇게 사람의 인생은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흘러가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게 꼭 불행한 것도 아니다. 내가 모르는 방향이 꼭 나쁜 방향이 아닌 것처럼.
 
그러고 보니 10여 년 만에 다시 본 <중경삼림>은 첫 번째 에피소드도 예전과는 다르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영화는 그대로인데, 나는 변한 거다.

뜬금없이 예전 어딘가에서 읽은 이야기가 떠오른다. 어느 대학 강의에서 컵에 돌과 모래, 그리고 맥주를 넣는 방법을 설명했다고 한다. 교수는 컵에 돌을 먼저 넣은 후 모래를 넣어 사이를 채우고 마지막으로 맥주를 약간 부어 넣었다.
 
그게 도대체 어떤 의미냐고 학생이 묻자 교수는 컵은 인생이고 돌은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건강이나 가족을 의미하고 모래는 그보다는 덜 중요한 직업이나 돈 같은 항목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인생에선 항상 더 중요한 것을 먼저 준비해야 덜 중요한 것도 가질 수 있는 것이지 덜 중요한 걸 우선해버리면 더 중요한 건강이나 가족을 넣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설명을 들은 학생 중 하나가 "교수님. 그럼 맥주는 뭘 뜻하나요?"라고 묻자 교수는 이리 대답했다고 한다.
 
"아 그건, 인생이 어떻든, 얼마나 힘들든 간에 맥주 한잔 먹을 여유는 만들 수 있단 뜻이지."
 
날씨가 점점 따뜻해지고 있다. 아마 곧 더워질 것이다. 하이네켄 한 병 들고 <중경삼림> 속 홍콩의 거리를 걷고 싶다. 내 마음속 빈곳을 채우며.


데렉 / 술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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