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스텔라>에서 우주와 시공간을 뛰어넘는 부녀의 이야기를 펼쳐 보인 크리스토퍼 놀란의 관심사는 과거로 옮겨갔다. 2차 세계대전 초기의 프랑스 북부 국경지대인 됭케르크(가 사실 맞는 표기법이다)’의 전장 속으로 카메라를 정조준한 것이다. <덩케르크>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첫 실사 소재 영화다. 전쟁을 다룬 영화라고는 하지만 실상 스펙터클한 전투나 끔찍한 상흔의 고통 따위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전쟁 속의 군인들의 긴장과 공포, 강한 생존욕구와 본능에 대해 차분하면서도 치열하게 그려내고 있다. 서사적인 줄거리나 인상적인 대사 한줄 없이도 놀란은 영화적인 구조의 미학을 통해 전쟁의 일면을 강렬하게 담아내었다.
 

국내에서 사랑받는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CG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감독답게 이번에도 최대한 실제의 전투기와 함정들을 동원해 사실적이고 실감나는 비주얼을 구사했다.(심지어 CG로 사람을 복제하는 게 싫어 실제 군인 크기의 사진들을 출력해 해변에 세워뒀다고 한다.) 여기에 아이맥스 카메라로 본편의 75% 가까이 담아낸 압도적인 사이즈의 화면은 진짜 전장에 서있는 것 같은 리얼한 체험의 효과를 남긴다. 귀를 뚫을 것처럼 울려 퍼지는 총탄 소리나 당장 멀미를 일으킬 것 같은 파도 소리, 스핏파이어의 웅웅거리는 엔진 소음까지 더해지면 그 공포와 고통은 더욱 배가 된다. <덩케르크><플래툰>이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 <헥소 고지> 등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전쟁의 실상을 경험케 만드는 작품이다.

<다크 나이트>4백만, <인셉션>으로 580, <다크 나이트 라이즈>640, <인터스텔라>로 천만을 넘기며 국내에서 꾸준히 사랑을 받았던 놀란이었기에, 이번 <덩케르크>의 흥행에도 많은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지사. 더욱이 류승완 감독의 <군함도>와 장훈 감독의 <택시운전사> 등 국내 텐트폴 영화들이 바로 뒤에 대기 중인 상황이라 제일 먼저 포문을 여는 이 작품에 각별히 초점이 맞춰졌다. 출발은 좋아 보인다. 시사회에서 압도적인 호평을 받았고, 새로 재개장한 용산 CGV에 전 세계 멀티플렉스 중에서 가장 큰 화면에, 국내 최초 레이저 영사기를 설치해 예매 전쟁이 벌어지는 등 충분히 화제도 곁들어지며 첫 주 134만 가량의 관객을 동원했다.
 

놀란의 음악적 페르소나,
한스 짐머

그러나 무엇보다 <덩케르크>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지상에서 일주일, 바다에서 하루, 하늘에서 한 시간이란 세 개의 시간대를 동시에 엮어낸 놀라운 편집의 마술이다. 놀란은 <미행><메멘토>, <인셉션>에 이어 다시금 비선형적이지만 입체적인 편집으로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을 극대화시킨 작품을 완성해냈다. 같은 전장 속 각기 다른 지형과 시간, 상황에 놓인 인물들의 사연을 유기적으로 교차시키고, 관계를 맺어가며 미시적인 시각에서 다이나모 작전을 새롭게 재구성해내는 솜씨는 정교하고 또 고전적이다. 자칫 지루하고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는 복잡한 영화의 시간 선을 매끄럽게 붙여준 건 한스 짐머의 오공본드 같은 강력한 스코어 덕분이다.

2005<배트맨 비긴즈>를 시작으로 이번이 벌써 여섯 번째 협업인 놀란과 짐머의 관계는 더욱 굳건해지고 노련해졌다. 놀란의 전작들과 달리 <덩케르크>는 대사가 극도로 적고, 러닝 타임도 가장 짧으며, 세 가지 시선이 교차되는 구조여서 음악의 응집력이 고도로 요구됐는데, 종종 심장을 서서히 옥죄여오듯 상승했다가 위협적으로 낮게 반복되는 짐머의 스릴 넘치는 잿빛 스코어는 영화를 지배하고 관객을 장악한다. 놀란과 함께하며 더욱 더 미니멀해지고 실험적인 사운드를 구사했던 짐머지만, <덩케르크>에선 그 단조롭고 심플했던 테마나 멜로디마저 아예 실종되어 버리고, 음향에 가까운 소리들과 반복적인 오스티나토, 리듬만이 남아 드론 혹은 앰비언트 음악의 형태로 수렴해간다.
 

덩케르크의 음악 컨셉,
시계초침

놀란은 짐머에게 처음 작업을 제의하며 <프레스티지>에서 영화음악가 데이빗 줄리앙과 처음 사용했던 셰퍼드 음(Shepherd Tone)이란 음악적 현상에 맞춰 각본을 썼음을 밝혔다. ‘셰퍼드 음이란 인지 과학자 로저 셰퍼드가 발견한 일종의 착청(청각적 착각) 현상으로, 음이 끝없이 올라가거나 혹은 끝없이 내려가는 것처럼 느끼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결코 일정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며, 무한 반복되면 피치가 계속 상승한다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덩케르크>에서도 놀란은 이 같은 효과가 나타나길 원했는데, 육지와 바다, 하늘이란 세 공간의 이야기가 맞물리며 끝없이 긴장감이 고조되듯, 스코어도 그런 서스펜스와 음악적 비유가 발휘되길 바랐다.

꿈에 들어가면 시간도 길어진다는 컨셉에서 착안해 에디트 피아프의 ‘Non, Je ne Regrette Rien’을 길게 늘어트린 소리들에서 테마를 만들어냈던 <인셉션>이나 우주의 광활함과 시간의 상대성을 소리로 극명하게 표출하기 위해 어떠한 악기보다 종교적이고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파이프 오르간을 택했던 <인터스텔라>처럼, 한스 짐머가 <덩케르크>에서 취한 건 바로 놀란이 본보기로 사용하라며 건네줬던 회중시계였다. 초침에 빙의된 듯 째각거리는 리듬에 끝없이 상승해가는 사운드의 고조는 가히 반칙이라 할 만큼 의도적이고 적나라하게 영화에 개입하는 느낌마저 들지만 인상적인 각인과 잔향을 오래 오래 남긴다.

이런 무조성의 극단적인 소리들의 총체는 언제 공격받을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 긴장과 육체적인 피로감을 전달하는 데 있어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독일군 한 명 나오지 않는 고요하고 적막한 일촉즉발의 포위 상황에서 으스스하게 앰비언스로 분위기를 자아내고, 다이나믹하게 상하로 오르내리며 도망자가 된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심정을 마구 죄여오는 초조함과 긴장감의 스트링 오스티나토는 서스펜스를 강화시킨다. 과도하리만치 영화 내내 음악이 깔린다는 불평 아닌 불평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짐머가 만들어낸 확실한 스릴과 스펙터클의 효과까진 감히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덩케르크의 음악적 힌트,
엘가의 '님로드'

시종일관 테마 하나 나올 것 같지 않은 사운드트랙에서 그나마 숨통을 틔워주는 건, 모든 사건이 하나로 모아지고, ‘조국(Home)’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 순간에 흐르는 에드워드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9번 변주인 님로드. 놀란은 Classic FM과 한 인터뷰에서 그 곡에 대한 아이디어는 자신이 냈지만 위험한 생각이었다고 술회한다. '덩케르크' 자체가 거대한 감정으로 가득 찬 사건이었기에 영화 내에서, 특히나 음악에서 감정적인 부분을 최대한 피한 채 서스펜스가 강조되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짐머가 이를 받아들여 '님로드'를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변형 재가공해 스코어 곳곳에 배치하고, 후반에 가서야 온전하게 드러내 관객들이 수용할 수 있게끔 활용했다고 한다.

재밌는 건 이 수수께끼 변주곡자체가 어떤 곡(아직까지 무슨 곡을 변주한 건지 밝혀지지 않았다)의 모티브를 엘가가 이리저리 변형/재가공해 만든 곡이고, ‘님로드또한 추모곡으로 자주 연주되는 레퍼토리였던 만큼 짐머와 놀란이 의미한 그 의도나 상징성이 짙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짐머는 클래식에 조예가 깊은 자신의 리모트 콘트롤 소속의 작곡가 벤자민 월피쉬와 론 벨프의 도움을 받아 후반에 비로소 (역시나 변형된) ‘님로드를 들려주지만, 영화 내내 무채색으로 감정 없이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달려왔던 터라 이마저도 영국뽕으로 느껴질 만큼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놀란의 우려가 조금은 남아버린 셈이다.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빨리 차기작을!!

그럼에도 여전히 크리스토퍼 놀란과 한스 짐머가 던져주는 묵직한 메시지와 단단한 만듦새는 또 다른 감동을 안긴다. 이만큼 작품적으로나 음악적으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계산된 솜씨를 발휘하는 감독과 음악가 조합을 만나기란 여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여섯 작품을 함께 해오며 만들어낸 그들의 경이적이고 감동적인 궤적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고, 셰퍼드 음처럼 끝없이 고조될지 모른다. 그들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건 비단 나 개인적인 바람만은 아닐 거라 생각한다.


사운드트랙스 / 영화음악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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