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절하고 뜨거웠던 1987년 겨울과 봄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영화 <1987>. 병용(유해진)은 대학생 조카 연희(김태리)에게 은신 중인 재야인사 김정남(설경구)에게 중요한 메모가 적힌 잡지를 전달해달라고 부탁한다. 삼촌이 험한 일에 휘말리지나 않을까 매번 틱틱대긴 해도, 병용의 갖은 회유 끝에 늘 그 부탁을 들어준다. 1987년 당시 젊은이들의 최고 아이템 중 하나였던 휴대용 카세트플레이어 '마이마이'는 회유의 도구였다. 마이마이를 받아들고 뛸 듯이 기뻐하던 연희는 제일 먼저 유재하의 노래 '가리워진 길'을 듣는다.

빨간 더플코트 차림의 연희가 불안을 애써 감추고 아무렇지 않은 척 검문 중인 경찰들 사이로 지나가는 풍경은, 음울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벅찬 감정을 쌓아가는 '가리워진 길'과 어울린다. 단조의 멜로디 아래 새겨진 아름다운 노랫말은 야만적인 사회를 비집고 "보일 듯 말 듯 가물거리는" 길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와도 닮았다. '가리워진 길'은 엔딩크레딧과 함께 김태리와 강동원의 목소리로 또 한번 흘러 큰 울림을 남긴다.

유재하 '가리워진 길'
보일 듯 말 듯 가물거리는
안개 속에 쌓인 길
잡힐 듯 말 듯 멀어져가는
무지개와 같은 길
그 어디에서 날 기다리는지
둘러보아도 찾을 수 없네

그대여 힘이 돼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이리로 가나 저리로 갈까
아득하기만 한데
이끌려가 듯 떠나는 이는
제 갈길을 찾았나
손을 흔들며 떠나보낸 뒤
외로움만이 나를 감쌀 때

그대여 힘이 돼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흥미로운 건 이와 같은 어울림에도 불구하고, <1987>과 '가리워진 길'의 만남에는 실은 시기가 안 맞는 고증 오류가 존재한다. 박종철 열사가 고문 끝에 숨을 거둔 1987년 1월 14일에 시작한 영화는, 6.10 항쟁의 열기가 막 세상을 집어삼키는 시점에서 끝난다. '가리워진 길'이 수록된 유재하의 앨범은 1987년 8월에 발매됐다. 다만 이 오류는 '실수'가 아니었다. 장준환 감독은 "워낙 유재하를 좋아해서 그 노래를 관객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다"며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은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나란 가사가 남겨진 사람들이 2017년에 다시 부를 수 있는 노래라 생각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데뷔 이전 단편을 만들던 시기부터 장준환 감독과 연을 맺었던 봉준호 감독 역시 1987년 즈음을 배경으로 한 <살인의 추억>에서 유재하의 노래 '우울한 편지'를 사용했다.

유재하는 1984년 한양대학교 음대 재학 당시 조용필의 밴드 '위대한 탄생'의 키보드 연주자로 무대에 올랐고, 학부 졸업 후엔 김현식의 밴드 '김현식의 봄여름가을겨울'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작곡가로도 이름을 올렸다. 1985년 조용필 7집에 '사랑하기 때문에'와 이문세 3집에 '그대와 영원히'를, 이듬해 김현식 3집에 '가리워진 길'을 선사했다. (<1987>에 김현식이 부른 '가리워진 길'이 흘렀다면 고증 오류를 비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알다시피 유재하와 김현식의 목소리는 전혀 딴판이기에...) 그리고 1987년 늦여름, 자기 이름을 내건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를 발표했다.

여덟 개의 노래와 하나의 연주곡이 모인 <사랑하기 때문에>는 유재하가 발표한 유일한 앨범이다. 그는 음반을 내고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11월 1일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기존의 '유행가'와 전혀 다른, 클래식의 작법을 가미한 음악 스타일과 '가창력'과는 거리가 먼 그의 보컬이 세심히 새겨진 앨범은 발표 당시엔 이렇다 할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서서히 독보적인 가치를 인정 받아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팝'으로 회자되고 있다. <1987>을 보고 난 후의 뜨거운 가슴이 잦아들 때 즈음, 유재하가 남긴 꿈같은 선율을 들으며 1987년 여름의 미열을 느껴보기를 권한다.

유재하 - 내마음에 비친 내모습
1987

감독 장준환

출연 김윤석, 하정우, 유해진, 김태리, 박희순, 이희준

개봉 2017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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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동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