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다 보면 항상 드는 생각인데 글을 쓰는 행위 그 자체보다 오히려 글의 소재를 찾는 일이 훨씬 더 어렵다. 아마 칼럼류 글을 쓰시는 분들은 다들 공감하실 듯. 

정말 감명 깊게 본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싶어도 영화 속에 술이 나오지 않거나 혹은 간접적으로 연결되지 않곤 하고 또 반대로 영화 내내 술이 나오지만 영화 자체가 맘에 들지 않는 경우도 많다. 어쩌다 앗 이 영화로 글 쓰면 되겠네.’ 싶은 생각이 들면 그 후 글을 쓰는데 걸리는 시간은 기껏해야 1시간여? 하지만 영화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못해도 3~4일의 시간이 걸린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영화를 쉽게 고르거나 혹은 평소 좋아하던 영화 속에서 여태껏 발견하지 못했던 술 마시는 장면을 발견하면 그야말로 쾌재를 부르게 된다

이번 주도 그랬다. 어떤 영화에 대해 글을 써야 하나 고민하다 우연찮게 인터넷 어느 한구석에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그리고 그 영화 속 구스타프의 칵테일 한 잔을 발견한 것. 평소 정말 좋아하던 영화에 숨겨져 있던 보물을 발견한 것 같았다. 즉시 VOD를 재생시키면서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글부터 안 쓰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2014년 웨스 앤더슨 감독이 만든 영화였고 영화의 특이한 분위기에 힘입어 개봉 후 오히려 상영관을 늘려 가며 상영되었고 최근 예전 영화의 재개봉 추세에 힘입어 지금도 아트하우스 모모 등의 극장에서 재상영 중이다.

1920년대 후반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헤드 컨시어지였던 구스타프(랄프 파인즈)와 호텔에서 밀회를 나누던 마담 D(무려 틸다 스윈튼이다!) 호텔을 떠난 후 갑작스럽게 살해당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감독 특유의 블랙 유머와 카메라 워킹, 거기에 동화적 색감과 살짝 야하고 잔인한 장면들까지 잘 버무려 내어 그야말로 한편의 걸작 성인 동화를 만들어냈다

영화 스토리뿐만 아니라 영화의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파격적 시도를 했는데 영화 속에서 배경인 시대가 바뀔 때마다 영화의 화면비가 바뀌고 그 화면비를 이용해 그 당시의 분위기를 이끌어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요새 TV 스타일인 16:9 화면과 예전 TV 스타일인 4:3 화면을 영화 배경 시대에 따라 다르게 쓴다고 보시면 될 듯

영화 시작 전의 화면조정 장면. 그 장면조차 레트로 스타일

영화의 실질적 주인공인 호텔의 헤드 컨시어지 구스타프는 영화 속에서 매력적인 중년의 바람둥이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는데 마시는 음료 역시 그 이미지에 맞는 음료를 마신다. 바로 칵테일 ‘샴페인 컵'(Champagne Cup)

이름만 들어도 사치스러운 느낌이 드는 코냑과 오렌지 리큐르 그랑 마니에르를 2:1~3:1비율로, 거기에 마라스키노 체리를 약간의 시럽과 함께 넣어준 후 섞어준다. 이를 칵테일글라스에 따른 뒤 샴페인을 약간 넣어주면 완성. 묵직한 향을 갖고 있는 코냑에 오렌지 향을 지닌 달콤한 리큐르 그랑마니에르를 섞어주고 거기에 샴페인의 탄산감을 약간 더해줘 묵직하고 달콤한, 심지어 도망치는 상황에서도 향수를 찾는 중년의 바람둥이 이미지를 충실하게 재현해 냈다

영화 속 구스타프의 이미지와 너무 잘 어울려 영화에서 만들어낸 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1862년 전설적인 바텐더 제리 토마스의 <How to mix drinks>에 이 칵테일의 원형이 이미 제안된 바 있다고 하니 나름 꽤나 클래식한 칵테일의 부류라고 봐도 될 듯하다. 

일상이라는 건 나빠지지 않는다.’라는 점에서 사실 매우 소중한 일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일상은 자칫 지루해지기 십상이고 지루해지면 심심해지는 게 사람이니 결국 어떻게든 그 지루함을 탈피하고 싶어지게 되는 것이다. 가끔 생기는 비일상적인 일은 그래서 소중하다.

영화 속에서 구스타프의 직업 역시 마찬가지. 그는 호텔의 헤드 컨시어지고 컨시어지는 비일상적인 공간인 호텔에서의 소위 사용자 경험을 극대화하기 위해 꼭 필요한 직업 중 하나다. 무스타파는 영화 속에서 “하지만 말하건대, 그는 훌륭한 품위와 함께 그 환상을 분명히 지켜내고 있었어."(But, I’ll say, he certainly sustained illusion with a marvelous grace.)라는 말을 했고 그 "Illusion with a marvelous grace"라는 대사는 그 자체로 호텔에 딱 어울리는 대사가 아닐까. 

요새 사람들이 많이들 쓰는 인스타그램 속 일상들은 모두 반짝반짝 빛나지만 삶을 이루는 대부분의 시간은 그런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런 반짝거림이 나쁜 것은 아니지 않나? 동화 속 어딘가 같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아니더라도 어디든 좋으니 일상적이지 않은 곳으로 짧은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왕이면 멋진 바가 있는 호텔이면 더 좋겠지. 나름 차려 입고 바텐더에게 칵테일 샴페인 컵을 한잔 부탁해야겠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감독 웨스 앤더슨

출연 시얼샤 로넌, 랄프 파인즈, 틸다 스윈튼, 애드리언 브로디, 윌렘 대포, 토니 레볼로리

개봉 2014.03.20. / 2018.10.11.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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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렉 / 술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