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박찬욱 감독, 김영진 프로그래머

올해 20회를 맞이한 전주국제 영화제는 한국영화 100주년을 기념하여 20, 21세기 만들어진 국내 명작들을 엄선해 상영하는 섹션을 기획했다. 선정된 영화 대다수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진 못했으나 동시대와 후대 한국영화계에 영감을 준 작품들로 구성됐다. 박찬욱 감독 영화 중엔 흥행은 실패했지만 명작으로 회자되는 <복수는 나의 것>이 선정됐다. 5월 5일 열린 <복수는 나의 것> 시네마 클래스는 영화 상영 후 박찬욱 감독과의 GV가 예정돼있어 치열한 티켓 전쟁을 벌였었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모두가 기다렸던 순간, 박찬욱 감독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됐다. 그는 관객들에게 "보시느라 수고하셨고, 5월에 어울리는 영화가 아니라 뭐라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될지 모르겠다"고 농담을 던지며 말문을 열었다. 평소 위트 있는 말솜씨로 유명한 박찬욱 감독과 김영진 프로그래머, 관객들이 나눈 대화를 옮긴다.

* 결말부를 포함한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왼쪽부터) 박찬욱 감독, 김영진 프로그래머

김영진 <복수는 나의 것>으로 몇 번째 하는 GV인지 모르겠다. <복수는 나의 것>은 흥행 스코어 상관없이 한국영화에 큰 영향을 미친 작품이자 변화의 축이 된 영화다. 연기 스타일도 달라졌고, 사운드나 기술적 조건에서도 여러 시도를 했던 작품이다. 표현법도 그 당시 한국영화에 없던 것이었다. 회자되는 화제의 영화를 극장에서 다시 보니 어떤가.

박찬욱 작정하고 저런 영화를 만들겠다 기획해서 한 영화다. <복수는 나의 것> 바로 전 영화가 <공동경비구역 JSA>(이하 <JSA>)였는데 그 영화는 감정적으로 고양되는 순간이 많고 카메라가 관객들이 감정을 함께 느낄 수 있게끔 하는 종류의 영화였다. 이런 작품을 하고 나니 다른 접근을 하고 싶었고 대중문화에서 잘 다루지 않던 남한 사회의 계급 문제를 비정하고 건조하게 다뤄보고 싶었다. 이 소재에 어울리는 접근법이 필요했다. 광각렌즈를 많이 쓰고 반드시 필요한 때 빼고는 카메라를 움직이지 않았다. 클로즈업도 꼭 필요할 때만 아주 과감하게 가까이 가는 방식을 선택했다. 프레임이 요지부동 상태로 인물들을 자세히 따라가지 않기 때문에 관객의 궁금증을 자아낸다.

박찬욱 폭력묘사 부분이 독하게 표현된 부분도 있으나 어떤 장면은 폭력 행위가 이뤄지고 있지만 보여주지 않았다. 반면 어떤 장면은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준 부분도 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잔인하고 인정사정없다. 대중 영화라고 해서 사정 봐주지 않고 가차없는 영화를 만들었다. 지금까지 영화를 해오면서 후배 감독들이 어떤 영화 때문에 감독 일을 하려고 마음먹었다고 할 때가 있는 데 제일 많이 언급된 작품이 이것이었다. 그때 (이 영화를 보고) 놀란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김영진 숏을 보면 화면이 어떻게 연결, 구성되고 긴장과 확장성을 가지는지 얼마나 정교한 장치들을 넣었는지 발견된다. 장면에서 대구와 반복이 자주 사용된다. 예를 들어 유선(한보배)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는 장면에서 류(신하균)와 아이가 함께 야구 중계를 보며 다정하게 놀고 있고 샤워 소리가 들리는데 들어가 보면 류 누나(임지은)가 자살하고 있다. 다시 컷이 바뀌면 아이가 울고 있고 류는 멍한 표정이다. 이런 화면 구성은 당시에는 별로 없었다.

박찬욱 미니멀한 구성이었고, 카메라 움직임을 최소화했다. 숏이 인물과 거리가 멀고 테이크도 길어 가만히 지켜보게 되고 집중하게 된다. 여러 가지 볼 것들 중 선택해서 봐야 하고 여기서 긴장이 만들어진다. 보통의 영화였으면 앞뒤를 잘라냈을 여백의 시간을 담았다. 장면에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때 고전적인 영화에서는 언제 컷이 넘어갔는지 잘 모르게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런 것을 안 하려고 했다. 단절감이 딱 느껴지게. 굉장히 과감하고 큰 덩어리가 생략되고 그 진행은 지나칠 정도로 빠르게 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큰 게 없어진 것 같은데? 그런 느낌을 준다. 하나의 숏 안에서는 모든 게 천천히 벌어지지만 숏과 숏 하이는 아주 빠르게 비약된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충돌해 빚어내는 이상한 리듬감이 제일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박찬욱 그렇기 때문에 중요하게 대두되는 게 소리의 활용이다. 이미지로는 단절인데 소리는 연결되어 생기는 이질적인 효과가 있다. 숏이 화려하지 않고 길고 느리기 때문에 소리에 집중할 수 있다. 처음 기획 단계부터 소리에 제일 공을 들였다. 김석원 사운드 디자이너도 이 영화를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는다. 오늘 영화가 상영된 이 극장의 볼륨이 약간 큰데 소리가 커서 좋았다. 초반부 공장의 굉음 같은 것들이 관객에게 압박을 제대로 줬다.

김영진 공장 장면에서 무장해제됐다. 예전에 이 장면을 보면서 박찬욱 감독이 벼락을 맞으셨나 생각했다. 진짜 훌륭한 영화를 만들었다고 문자를 보냈다. 평론 인생에서 유일한 찬사를 보냈던 순간이다.

박찬욱 그런 문자 하지 말아 달라. 다음 작품에서도 기대하게 된다. 이번에 왜 안 오나 하면서. 사운드 관련 이야기 하나만 더하자면 신하균 캐릭터가 청각 장애인이기 때문에 사운드에 더 신경 쓰고 싶었다. 류의 시점 숏에서는 우웅하는 소리만 들리는데 나머지 숏에는 과감하고 과장된 소리가 끼어든다. 그래야 류의 시점 숏에서의 침묵이 두드러질 것이라 생각했다. 공장 로케이션 선정할 때도 기준이 어느 공장 소리가 제일 큰가가 가장 중요했다.


이후부터는 관객의 질문 시간이 이어졌다. 마지막 질문 순간까지 열정적으로 손을 들고 질문하려는 관객들이 많았다.

시네마 클래스 현장 사진

Q 복수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이다. 원래 3부작을 의도했나. 아니면 <복수는 나의 것>만들고 흥미를 느껴서 3부작을 만들게 되었나.

박찬욱 복수 3부작이라는 것을 이때는 전혀 생각 안 했다. <올드보이> 원작 만화를 읽기도 전이었으니까. <올드보이> 제작발표회 때인가. 그때 3부작을 만들 생각이 났다. 기자들이 자꾸 복수 이야기를 또 만드냐 하길래. 연달아 두 개 만드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싶어서. 워낙 영화의 흔한 주제지 않나. 그래서 '난 3부작 만들 계획이에요' 얘기해버려서 그렇게 됐다.

Q 개인적으로 영미(배두나) 조직들이 동진(송강호)에게 와서 복수할 때 관객들은 이미 눈치챘을 거 같은데 보이스 오버로 한 번 더 썼던 부분이 아쉬웠다. 오랜만에 영화를 다시 보니 아쉬운 점은 없었는지.

박찬욱 무정부주의 조직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영미 보이스오버가 사용됐던 것은 아차 싶었다. 사실 몇 년 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개봉할 때 주변 사람들이 그랬다. 영화 다 끝나는데 처음 나오는 인물들이 말 한마디 없이 있으면 관객들이 영문을 몰라 할 거라고. 그래서 정말 고민 많이 한 장면이다. 넣다 뺐다도 해보고 영미의 그 대사를 거꾸로 돌려보기도 하고, 단어 하나하나 분절해서 뒤섞기도 했다. 분명 배두나의 입으로 발설된 단어인데 문장 연결이 안 되게 하는 등 별 짓을 다 해봤다. 그런데 우스꽝스럽기만 하고 더 혼란스러워 넣거나 빼기 둘 중 하나만 하기로 했다. 그때만 해도 영화가 이렇게 흥행 안 될 줄 몰랐다. 상업영화로서 이 정도 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으로 과잉친절한 장면이었다. 어차피 안 될 줄 알았으면 뺐을 텐데.

박찬욱 감독

Q 촬영 전과 촬영하면서 달라지는 부분이 있나.

박찬욱 각본을 쓸 때와 영화를 만들 때 제일 큰 차이는 배우에서 시작한다. 누가 연기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희망 배우가 있을 수 있는데 가급적 그러지 않으려고 한다. 송강호가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썼다가 안 하면 어떡하나. 차라리 정말 머릿속에 그리고 싶다 하면 아무나 생각한다. 예를 들면 우리 큰아버지나 죽은 어떤 배우. 이미지와 성격이 어울리는데 캐스팅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을 떠올리며 쓴다. 캐스팅된 뒤에는 그 배우에게 맞춰 변경되는 부분이 있다. 배우들 빼놓고는 거의 각본대로 찍고 스토리보드 만든 대로 그대로 완성되는 편이다.

Q 배우들과 많은 대화를 하며 시나리오를 수정한다고 했는데 구체적인 방법이 궁금하다.

박찬욱 프로페셔널 영화인으로서 술 마신다. 저 때는 또 젊었기 때문에 거의 매일. 몇 시간을 마셔도 계속 작품 얘기만 하는 게 송강호 씨의 특징이다. 오로지 지금 찍고 있는 이 작품에 관한 이야기만 한다. 각본 단계서부터 정말 시시콜콜 모든 걸 얘기한다. 단어 하나, 대사 하나, 남의 캐릭터에 관한 얘기도. 물론 우리의 신하균 씨는 과묵해서 주로 듣는 편이지만. 신하균 씨는 좀 특이하다. 뭘 하자고 하면 일단 하고 본다. '왜요? 잘 이해 안 돼요' 절대 안 한다. 저렇게 뛰어난 배우도 뭔가 이상하네 생각이 들면 그건 내 생각이 잘못된 거다. 그때부터 '이건 어색해 보인다. 왜 그럴까' 대화한다. 영화의 분위기와 달리 촬영 분위기는 아주 행복하고 소풍 다니는 거 같았다. 흥행의 압박을 느끼지 않고 최선의 결과물에 대한 논쟁만 하고 의기투합했던 작품이다.

Q 초록색, 옥색 이미지가 인상적이다.

박찬욱 영화는 도시에서 시작되지만 남매의 고향은 시골이고 류가 그곳에 누나를 묻는다. 도시와 시골 구도가 계속 이어진다. 자연, 생명 이런 긍정적인 연상작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반대 이미지도 넣고 싶었다. 도시의 녹색은 부패한 것 같고 곰팡이 핀 것 같다. 공장의 형광등 색, 류의 녹색 머리가 그것이다. 누나를 묻고 유선이 익사하는 장면에서 류가 강에 서 있다. 류의 배경에는 녹색 숲이 있고 그것과 겹쳐져 류의 녹색 머리가 있다. 강물에 반영된 일렁일렁한 빛은 류가 입고 있던 불규칙한 줄무늬 옷과 매치된다. 류의 뒷모습 롱숏이 영화 전체를 요약하는 중요한 이미지였다.

Q 유선이 죽었을 때 물에 뛰어들지 못하고 류가 멈칫하는 장면이 있다. 동진이 류의 아킬레스건을 잘라서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장면과 연관이 있나.

박찬욱 성인의 키로 서 있으면 죽지 않을 얕은 물인데 자기 딸과 똑같이 죽게 하려는 동진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그 수밖에 없다. 은유적인 표현이다. 이 장면의 영어 자막을 보면 오역이 있다. 영화의 결정적인 대사 "난 니가 착한 놈인 걸 안다. 그러니까 내가 너 죽인 거 이해하지?"에서 '그러니까'를 '그러나'로 번역했다. 그걸 미처 캐치하지 못한 채 굳어졌다. 나중에 너무 원통해서 다음 영화부터는 정말 철저하게 자막 번역에 참여해 번역하는 사람들을 몹시 괴롭히고 있다.

Q 팽 기사(기주봉)의 아들이 병원에 갔을 때 동진이 보호자로 자처를 했고 아이가 죽었을 때 모르는 척했다.

박찬욱 동진이 "전화 잘못 거셨습니다" 말하는 것은 나에게 중요한 대사였다. 본의 아니게 팽 기사를 해고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당시 실제로 우리나라에 그런 사람이 많았다. 복지 시스템이 미비하고 가부장적인 분위기로 가족들과 동반 자살하는 그런 일이 참 많았다. 어쨌든 자신이 해고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동진은 죄의식을 갖고 팽 기사의 아들을 살리려 노력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동진은 인간이었다. 많은 일을 겪은 뒤로 개의치 않아진다. "전화 잘못 거셨습니다." 그 한마디가 이 영화의 장면들 중 가장 잔인한 순간이다.

박찬욱 감독

Q 관객들을 믿은 용기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당시 감독님께 이 영화를 만들게끔 용기를 준 동기가 있다면. 감독님 안에서 나왔는지 주변 사람들이 응원이 있었는지.

박찬욱 그건 대답이 너무 쉽다. <JSA>의 성공이 가져다준 선물이다. 그 당시 천만 영화는 없었고 그때까지 <JSA>가 한국영화 기록을 갖고 있었다. 말하자면 흥행 넘버 원 같은 지금의 김용화 감독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용감한 영화를 할 수 있었다. 이때아니면 못 하는다는 생각이었다. 이 각본은 시놉시스 형태로 여러 해 전부터 많은 제작자에게 투자, 제작해달라고 수십 명에게 보여주고 모조리 퇴짜 맞은 기획이다. 지금 아니면 못한다 그런 마음이었다. 더군다나 <JSA>의 흥행에 가장 큰 기여를 했던 송강호, 신하균 두 배우까지 얻었으니 투자도 될 수 있고 (<JSA>와 똑같이) CJ에서 만들었다. CJ에 큰돈 벌어줬지 않나.

박찬욱 감독

박찬욱 복수 3부작 기획 계기 중 하나는 말씀드렸고 또 하나가 있다. 3부작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올드보이>는 알겠고 <친절한 금자씨>도 잘 알겠는데 3부작인데 하나는 뭐지? 아. 흥행은 안됐는데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영화가 있었대' 그러면서 찾아보지 않을까 해서 굳이 만들어 붙였던 것도 있다. 그만큼 내게 중요한 작품이고 기대만큼 많은 관객이 오지 않아서 섭섭했던 작품이다. 그때 당시에는 그랬지만 긴 생명력을 갖고 오늘 이 자리에서 볼 수 있게 돼 좋다.


씨네플레이 조부용 기자

사진=전주국제영화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