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운 나쁜 날이 또 있을까? <크로스 더 라인>에 담긴 다니(마리오 카사스)의 하룻밤은 그야말로 악몽과 같다. 낯선 사람과의 돌연한 만남은 그저 시작에 불과할 뿐, 그는 단 하루 만에 폭행, 살인, 도주로 점철된 잔인한 여정의 주인공이 된다. 뜻밖에도 이는 세계일주여행을 앞두고 벌어진 일이다. 사정은 이렇다. 오래 간병하던 아버지가 죽고, 다니는 고장 난 듯 지냈다. 누군가 애도를 표해도 “괜찮아, 정말이야.”로 일관하며 좀처럼 내면을 돌보려 들지 않던 그에게, 누나(엘리자베스 라레나)가 세계 일주 항공권을 선물한다. ‘조건은 한 방향으로 여행해야 한다는 것. 오직 앞으로만 갈 수 있다. 뒤로 가는 건 불가능하다.’ 항공권에 붙은 단서가 어쩐지 의아하지만, 다니도 내심 이 여행이 삶의 전환점이 되길 바라는 듯 보인다. 문제의 밤, 식당에 앉아 행선지를 고민하던 다니에게 밀라(밀레나 스밋)가 다가온다. 아름답지만 병적인 데가 있어 보이는 그녀는 다짜고짜 대신 돈을 내달라고 하더니 동행을 제안한다. 타투샵을 거쳐 낡은 아파트에 당도한 둘 앞에 잔뜩 화가 난 밀라의 남자친구가 등장하면서 화면은 피로 물든다. 도망쳐야만 한다. 그렇게 정말 앞으로밖에 갈 수 없는 모험이 시작된다.

연출자 다비드 빅토리는 2012년 배우 마이클 패스벤더와 리들리 스콧이 주최한 국제 유튜브 영화제에서 우승하며 이름을 알린 스페인의 영화감독이다. 해당 프로젝트의 결과로 완성된 단편 <제로>(2015)는 사고로 엄마를 잃은 뒤 아직 상실의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소년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크로스 더 라인>과 닮았다. 비록 <크로스 더 라인>의 방향은 <제로>의 환상적이고 따뜻한 길과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말이다. 어두컴컴하고 불안한 영화의 분위기는 감독의 첫 장편 <엘 팍토>(2018)의 기운을 이어받은 것이다. <엘 팍토>는 갑자기 코마 상태에 빠진 딸을 위해 점점 더 위험한 일에 가담하는 엄마의 이야기를 다룬 스릴러물. 감독은 자신의 관심이 “극단적 상황에 빠진 인간”에게 있다면서 사회의 가장 깊은 곳을 배회하는 “우리 안의 짐승”에 관해 말한 바 있는데, 이는 <크로스 더 라인>에서 밀라의 대사로 반복된다. “우리가 짐승이라는 걸 잊어선 안 돼.” 빅토리의 영화는 인간의 본성과 관련된 어려운 질문을 기어이 눈앞에 들이민다.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은 과연 무슨 짓까지 저지를 수 있는가? 시종일관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떠밀려만 가던 다니에게도 선택의 순간은 찾아오고야 만다.

다행스럽게도 <크로스 더 라인>은 어떻게 대답해도 문제가 생기는 딜레마적 상황을 냅다 제시해놓고 멀찍이서 관망하며 이죽대는 영화는 아니다. 정교하게 계산된 촬영은 영화 전체를 일인칭으로 따라가면서 다니의 상황을 함께 겪고 그에게 이입하도록 만든다. 영화의 첫 장면은 5분가량 지속되는 롱테이크로, 아버지의 병상과 집 근처 슈퍼를 오가는 다니의 뒷모습을 카메라가 가까이서 따라가며 찍는다. 드물게 서정적인 대목이면서 주인공이 처한 상황과 그의 감정을 동시에 담아내는 순간이다. 이처럼 영화는 처음부터 형식적 비전을 드러낸 뒤, 매혹의 요소를 하나하나 쌓아간다. 타투샵과 아파트의 강렬한 조명, 듣고만 있어도 만취의 기운을 느끼게 하는 음악은 지옥 같은 밤을 환상적 분위기로 물들인다. 다니의 곁을 절대 떠나지 않는 카메라엔 좁고 답답한 공간과 넓고 탁 트인 공간이 번갈아 가며 담겨, 자칫 단조로워질 법한 화면 구성엔 다양한 가능성이 생긴다. 굳이 따지자면 영화의 매력은, 거창한 질문이 아니라 꼼꼼하게 설계되고 실행된 촬영 쪽에 있다.

갑작스러운 죽음과 관련해 추궁받을 위기에 처했다. 도망쳐야 하는가, 자수해야 하는가? 불리한 증거가 남아있다. 없애러 가야 하는가,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계속해서 위기의 발생과 선택의 갈림길에 서는 다니는 언뜻 게임의 주인공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듯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가능성을 밀어붙이는 대신, 다니에게 크고 작은 서사를 부여해 관객의 정서적 이입을 꾀한다. 아버지와의 갈등, 누나와의 관계, 직장에서의 위치 등은 영화 속에서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캐릭터에 부착된 얄팍한 설정을 훌쩍 넘어서는 부피로 느껴진다. 여기엔 다니를 연기한 배우 마리오 카사스의 역할이 컸다. 그는 <크로스 더 라인>에서 깊은 감정과 처절한 액션을 선보여 스페인의 아카데미라 불리는 고야상 남우주연상을 비롯해 일곱 개의 연기상을 받았다. 한편, <크로스 더 라인>은 마리오 카사스가 주연한 독특한 설정의 자국 스릴러라는 점에서 <인비저블 게스트>(오리올 파울로, 2016), <더 바>(알렉스 드 라 이글레시아, 2016) 같은 영화들과 함께 묶일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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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시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