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갈수록 무뎌지는 중이지만, 어쩐지 3월만 되면 복작거리던 캠퍼스 풍경이 떠오른다. 인생에 영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던 수업들은 뒤로하고 친구들과, 혹은 혼자서 지지부진한 시간 보내기를 즐겼던 것 같다. 막연한 앞날에 대한 고민으로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땐 노트북으로 영화를 봤다. 동시에 ‘이 시간에 영어 공부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자괴감에 휩싸이곤 했는데... 흠, 씨네플레이 에디터로 일할 줄 알았으면 더 맘 놓고 많이 볼걸. 영화로 위로받던 들쑥날쑥한 날들을 떠올리다, 그중에서도 어떤 영화에 매료되어 지금까지도 영화의 매력에 허우적대고 있는지 생각해봤다. 영알못 에디터에게 영화 보는 재미를 일깨우고, 계속해서 새로운 영화를 기대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마력의 영화들.


영화를 ‘즐겨 보기’ 시작한 건 열여덟 즈음부터다. 손에 잡히지 않는 일을 하며 시간을 낭비할 바엔,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아도 하고 싶은 걸 하자는 굳건한 신조를 앞세워 자율학습을 하다 극장으로 향하곤 했다. 문제집을 격파하는 마음으로 영화 포스터를 모으고 영화표를 모았다. <엘리펀트>를 접하게 된 건 같은 반 친구의 추천 덕이었다. 이 영화는 에디터가 짧게 경험해왔던 영화에 대한 개념을 몽땅 무너뜨렸다. 1999년 컬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엘리펀트>엔 돈을 쏟은 흔적도, 눈물을 짜내는 감동도, 피해자와 가해자를 명확히 가르는 일차원적인 잣대도, 사건의 인과관계를 잇는 계산적인 서사도 없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그날. 카메라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시간을 보내는 학생들의 일상을 다각도로 비추며 비극을 극대화한다. 혼을 쏙 빼놓는 사건의 연타보다, 고요한 롱테이크 한 컷이 전하는 긴장이 훨씬 섬찟하다는 걸 알게 해준 작품. 한없이 유약해 보이던 알렉스가 코너에 몰린 학생들에게 총을 겨눈 채 게임처럼 읊던 대사를 잊을 수 없다. “Eeny, meeny, miny, moe”(누구를 먼저 쏠까?)

엘리펀트

감독 구스 반 산트

출연 알렉스 프로스트, 에릭 두런

개봉 2003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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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알못이었던 에디터에게 신세계를 펼쳐준 영화는 많았지만, <빅 피쉬>에 대한 의미는 남다르다. <빅 피쉬>는 에디터의 취향과 100% 일치했던 첫 영화다. 지난날의 환상적인 무용담을 늘어놓는 아버지 에드워드와 그의 허풍에 질려버린 아들 윌의 이야기를 담았다. 우리의 일상도 판타지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팀 버튼 감독의 시선에 완전히 반해버렸던 기억. 가장 ‘팀 버튼스럽지 않은 영화’에서도 빛나는 그의 기발함, 고립되어 있던 캐릭터들을 결국 특별한 존재로 탈바꿈시키는 그의 따스함에 반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의 결말은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다. 한없이 동화 같은 꿈과 죽음을 기다리는 현실, 그 감정의 높낮이를 이렇게 자연스럽게 넘나들 수 있는 감독이라니. 팀 버튼의 차기작 <덤보>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빅 피쉬

감독 팀 버튼

출연 이완 맥그리거, 알버트 피니, 빌리 크루덥, 제시카 랭, 헬레나 본햄 카터, 알리슨 로먼, 마리옹 꼬띠아르

개봉 2003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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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로맨스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당시 이와이 슌지 감독을 <러브 레터>, <하나와 앨리스>로만 기억하고 있었기에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 전한 충격이 더 어마무시했는지도 모르겠다. 14살 유이치는 도둑질을 해야 하고, 원조교제를 하는 동급생 츠다를 감시해야 하며, 짝사랑하는 쿠노가 성폭행 당하는 순간을 방관해야 한다. 그 가운데엔 한때 유이치의 친구였던 호시노가 있다. 이들은 마음껏 슬퍼하지도, 분노하지도 못한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 전하는 감정의 요동은 어떤 형용사로 표현해도 부족하다. 앵글을 가득 채운 빛, 앳된 소년 소녀, 스크린을 유영하는 드뷔시의 선율과 함께 처참한 광경이 어우러질 때 파장되는 비극의 시너지란. 영화의 중반, 전혀 다른 톤으로 자리한 오키나와 신은 이 영화만의 독보적인 매력이다. 이들의 모든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한 여름 여행은 그간 봐왔던 어느 영화에서도 본 적 없는 기묘한 에너지를 자랑한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

감독 이와이 슌지

출연 이치하라 하야토, 오시나리 슈고

개봉 2001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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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는 로맨스 영화를 사랑한다. <펀치 드렁크 러브>는 수많은 로맨스 영화들 중에서도 에디터의 취향을 100% 저격한 작품이다. 강박증을 지닌 이건은 우연히 만난 레나와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얼얼한 사랑에 빠진다. 눈에 띄는 결함을 지닌 이들이 만나 사랑으로 온전함을 찾는다는, 널리고 널린 시시한 결말이 아니라는 점이 가장 좋다. “당신 얼굴을 꼭꼭 씹은 후 눈알을 파내서 먹고 싶어요”란 고백 멘트만으로도 이 영화가 사랑스러운 이유는 충분하다. 모든 가식을 버린 채 사랑을 푹푹 퍼나르는 이들의 연애는 볼 때마다 한없이 부럽다. 영화 사운드트랙의 매력을 알게 된 것도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부터다.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을 땐 ‘He Needs Me’를 들어보시길. 금세 사뿐해진 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펀치 드렁크 러브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

출연 아담 샌들러, 에밀리 왓슨

개봉 2002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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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 크레딧이 좋으면 영화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한다. 엔딩 크레딧에 애정을 품게 된 건 김태용 감독의 <만추>를 보고 나서부터다. <만추>의 엔딩 크레딧엔 훈과의 재회를 연습하는 애나의 모습이 담겼다. 애나는 인기척이 들릴 때마다 흠칫 놀라며 카페의 입구를 바라보고, 조심스레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오랜만이네요”란 인사를 연습한다. 애나는 맘 놓고 제 감정을 분출하지 못하는 캐릭터다. 다른 커플의 입을 빌려 제 감정을 토하고, 텅 빈 시장을 내달리는 행위로 해방감을 표하며, 훈이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로 속사정을 늘어놓고, 죄 없는 포크에 제 분노를 담아낸다. 빙 돌려 말하는 법밖에 몰랐던 애나가 처음으로 제 진심을 털어놓으려 준비하는 이 장면은 관객들을 스크린 밖으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붙드는 힘을 지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극장의 불이 켜지면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타 영화들과는 분명 다른 매력.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도 비슷한 위력을 지닌 엔딩 크레딧을 만나볼 수 있다. 엔딩 크레딧이 훌륭한 영화는 많지만, <만추>로 처음 접했던 그 여운은 쉽게 잊기 어렵다.

만추

감독 김태용

출연 현빈, 탕웨이

개봉 2010 미국,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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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랍스터>는 ‘작위적인 설정’을 무조건 싫어하는 에디터의 기준을 무너뜨린 영화다. 아무런 감흥 없이 보러 갔다가 만난 취향 100% 영화. <더 랍스터>는 커플이 되지 않으면 용납되지 않는 사회와 커플이라면 용납되지 않는 사회, 그 확연한 이분법 아래 억압된 데이비드를 조명한다. 짝을 찾지 못하면 동물이 되어야 한다는 설정보다 더 기묘했던 건 그들이 사랑을 찾는 기준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간극을 좁히는 방법 따위는 아예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들은 무조건 ‘공통점이 있는 사람’과의 사랑을 원하고 그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자해도 서슴지 않는다. 획일화된 그 모습에서 고개를 갸웃하다가도, 어쩐지 억지로라도 공통점을 찾고야 마는 현실 연애관이 겹쳐져 섬뜩해졌던 기억. 아무래도 이 영화에 대한 사랑을 굳힌 부분은 결말이다. 데이비드는 끝까지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한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설계 능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는 장면.

더 랍스터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

출연 레이첼 와이즈, 콜린 파렐, 레아 세이두

개봉 2015 그리스, 영국, 아일랜드, 네덜란드,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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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뒤흔드는 영화를 만나고 나면, 앞으로 영화를 더 열심히 보고 싶다는 확신이 생긴다. 일주일 전 본 <팬텀 스레드>가 그 확신에 힘을 보탰다. 그야말로 ‘미친 사랑’을 다룬 이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요동쳤던 마음을 오래 잊지 못할 것 같다. 쿠폰에 도장 찍듯 영화를 보다 보면, 언젠가 또 서프라이즈 선물 같은 영화가 찾아오겠지. 오래도록 기억될 영화들을 기다리며 오늘도 내일도 열심히 영화를 봐야겠다 마음먹는다. 흠. 역시 지지부진한 삶을 위로하는 덴 영화 보는 게 최고다.

팬텀 스레드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

출연 다니엘 데이 루이스, 빅키 크리엡스

개봉 2017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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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에디터 유은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