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쯤, 출근길에 급격히 심해진 미세 먼지 때문인지 숨이 턱턱 막혔다. 너무 답답한 나머지 핸드폰으로 ‘미세먼지 없는 도시’를 검색해봤다. 발리, 캐나다? 너무 멀다. 그러던 중 오키나와가 눈에 띄었다. 습관처럼 최저가 항공권 검색 앱을 열었지만, 그 자리에서 선뜻 지를 용기는 없었다.

<안경>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미세 먼지 지옥 탈출은 미뤄졌고 일상으로 복귀했다. 에디터는 1년째 일주일에 두 번 퇴근 후 집 근처 청소년 수련관에서 요가를 배우고 있다. 요가가 끝난 후 집에서 누워 영화 한 편 보는 새로운 취미도 생겼다. 나른한 몸 상태 때문인지 평소 취향과 달리 무자극적이고 심심한 영화를 보는 횟수가 늘었다. 그날 이후 오키나와의 잔상이 남아있던 탓일까. 여러 영화 목록 중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안경>이 눈에 들어왔다. 일단 제목처럼 주요 출연진들 대다수가 안경을 끼고 나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안경족(?)인 에디터여서 그런가 더 친근하고 편안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안경을 낀 채 ‘메르시 체조’를 하고 있는 주인공들을 보고 있자니 좀 전에 요가하던 내 모습도 생각났다. 영화를 보는 내내 스토리, 캐릭터, 대사는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고, 이런 시답잖은 생각들만 떠올랐다. 다 보고 난 결론은? 아무래도 오키나와를 가야겠다는 것.

<안경>

오키나와에 가고 싶다고 생각한 건 꽤 오래됐다. 해외여행을 꿈꾸던 스무살 무렵, 드라마 <여인의 향기>를 봤을 때부터였다. 생각난 김에 드라마도 1~3회 정주행했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주인공 연재(김선아)가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생각하고 무작정 떠나던 곳이 바로 오키나와였다. 마침 시한부 판정은 아니지만 인터넷에 떠돌던 인생 노잼 테스트를 통해 셀프 인생 노잼 판정을 받은 에디터. 노잼 시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새로운 자극, 도전 과제가 필요했다. 오키나와 여행은 차 없으면 못 한다는 소리를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지만 무면허(자전거도 못 탐), 길치인 에디터는 오히려 이러한 이유로 이상한 도전정신에 사로잡혔다.


현실과 영화 사이의 괴리감(?!), 가보면 달라질까

결국 오키나와행 비행기 표 한 장을 끊었다. <안경>스럽게 세속적이지 않은(?) 여행을 해야 겠다는 생각에 호기롭게 위탁 수화물도 신청하지 않았다. 정작 기내용 캐리어가 없어서 이번에 새로 구매한 건 조금 모순된 행동이긴 했다. 본격적으로 여행 계획을 짜려고 한 순간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오키나와 섬 근방인 줄 알았던 <안경>의 촬영지는 오키나와에서 무려 5시간 배를 타고 가야 하는 ‘요론지마’라는 섬이었다.

요론지마의 유리가하마

포기할까 싶었지만, 이미 요론지마의 바다 색깔을 보고 난 뒤 오키나와의 바다는 눈에 차지 않았다. 무엇보다 포기할 수 없던 이유는 봄, 여름에만 볼 수 있다는 유리가하마(바닷물이 빠지는 순간에만 드러나는 모래 해변)와 실제로 운영 중인 <안경>의 ‘하마다’ 민박에 가보고 싶었기 때문.

유리가하마 일정

그러나 이곳에 머무는 일정만 피해서 유리가하마가 출현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역시 현실은 영화처럼 착착 흘러가지 않는다. 혹시나 자연의 섭리(?)가 자비를 베풀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일말의 기대감은 버리지 못했지만, 못 보면 할 수 없지.

<안경>

여행 계획을 짜면 짤수록 영화와 현실은 정말 다르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영화 <안경> 속 타에코(코바야시 사토미)는 (일본인이니까) 아마 국내선을 타고 비행기로 요론지마에 당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사회 초년생인 한국에 사는 에디터는 일본 내 국내선 왕복 20만 원 항공권을 쓸 수 없었다. 결국 왕복 10시간 5만 원짜리 배편을 끊었다. 한 번도 이렇게 오래 배를 타본 적이 없지만 나름 새로운 경험이 될 거라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기대 중이다.

<안경>
<안경>의 배경이 된 민박집의 실제 모습

영화 속 ‘하마다 민박’의 주인장은 “이곳을 찾아오는 손님들 중 심한 사람은 두 시간 이상 헤맨다”고 말한다. 헤매지도 않고 도착한 주인공을 보고 놀라며 “이곳에 있을 자격이 된다”고 칭찬을 하기도 한다. 길치인 에디터는 벌써 자격박탈이다. 주인장이 그린 약도에는 이렇게 설명돼 있다. “왠지 불안해지는 지점에서 80m 더 가서 오른쪽.” 영화가 아닌 실제 민박집 약도도 이렇게 만들어졌다면 거리감 없는 에디터는 한참을 헤맸을 것이다. 영화의 배경이 된 실제 민박집 ‘요론토 빌리지’에는 픽업 서비스가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안경>에서 나오는 음식(왼쪽), 요론토 빌리지의 조식(오른쪽).

<안경>에는 먹음직스러운 소박한 일본식 가정식이 나온다. 혼자 있고 싶어서 함께 조식을 먹지 않던 타에코는 서서히 이곳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며 함께 밥을 먹는다. 마침 레스토랑과 카페를 함께 운영 중인 요론토 빌리지는 식당이 얼마 없는 이곳 요론지마의 맛집이라고 한다.

<안경>

사색을 하러 이곳에 왔지만 막상 사색이 쉽지 않은 타에코. 결국 타에코는 민박집 주인에게 사색의 요령을 묻는다. 나 역시 그동안의 여행 중 몇 번 사색에 도전했지만, 지루함을 견디지 못했다. 어느새 스마트폰으로 맛집을 찾고, 카톡을 하는 등 결국은 분주한 여행이 되어버렸던 적이 많았다. 그래서 타에코의 물음에 공감이 갔다. 민박집 주인은 “옛 추억을 그리워한다던지. 누군가를 곰곰이 떠올려 본다든지. 그리고 사쿠라(모타이 마사코)가 만든 빙수를 먹어보라”고 답한다.

<안경>

과연 이번 여행에서는 사색에 성공할 수 있을까. 여태껏 많은 여행기를 읽어봤지만 떠나기 전에 쓴 여행기는 (내가 쓰면서도) 처음 보는 것 같다. 에디터 칼럼 순서를 바꿔 (여행 후) 여행기를 쓸까도 했지만 왠지 가기 전에 쓰고 싶었다. 오히려 여행을 앞두고 근무 시간에 이런 글을 쓰고 있자니 묘하게 들뜬 기분도 든다. (에디터는 이 칼럼이 모바일 영화판에 노출되는 날, 에메랄드빛 바닷가에 있을 예정이다.)

<안경>의 평화롭고 고즈넉함과 달리 에디터의 여행은 스펙터클한 장르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5월의 오키나와는 장마 기간이다. 다행히 항상 비가 오는 건 아니고 시시때때로 날이 좋았다 나빴다 한다고. 날이 안 좋으면 배가 뜨지 않을 수도 있다. 더군다나 길개나 길고양이, 크고 작은 곤충들을 무서워하는 터라 사색은 커녕 두려움에 떨지도 모른다. 길치에다 일본어는 번역기만 믿고 갈 것이기 때문에 출발부터 도착까지 여러 난관이 예상된다. 그렇지만 노잼 인생 극복을 위해서라면 일단 도전이다.

안경

감독 오기가미 나오코

출연 고바야시 사토미, 이치카와 미카코, 카세 료

개봉 2007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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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조부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