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백조의 호수’ 주인공은 여자였지, 별 5개 액션 '발레리나' 미리 본 후기

〈발레리나〉
〈발레리나〉

솔직히 불안했다. 2024년 개봉 예정이던 영화가 무려 1년 지나 개봉하게 됐으니, 너무나도 당연한 일. 최초 편집본의 내부 시사 평가가 재앙이었고, 기존의 시나리오를 갈아엎은 채 재촬영에 들어갔으며, 〈존 윅〉을 4편까지 이끌었던 채드 스타헬스키와 새로 〈발레리나〉 연출을 맡은 렌 와이즈먼 감독의 콘셉트 충돌과 역할 분담 논란까지, 예정된 ‘망작’의 길을 걷는 듯 보였다. 그러니까 3편에서 존 윅을 죽이면서 끝냈어야지, 왜 계속 시리즈를 이어가는 걸까, 본편이 답이 없는데 번외편이 무슨 희망의 동아줄이 되겠냐, 하는 원망의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그런데 웬걸, 〈발레리나〉는 예상 밖의 수작이다.

드디어 존 윅이 돌아왔다. 하지만 키아누 리브스가 주인공인 〈존 윅 5〉가 아니라 새 얼굴 아나 드 아르마스가 주인공을 맡은 〈발레리나〉다. 바로 ‘존 윅 유니버스’의 번외편으로, 시리즈의 팬들에게 익숙한 암살자 조직 ‘루스카 로마’에는 존 윅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시리즈의 핵심 공간인 콘티넨탈 호텔도 나름 꽤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고, 무엇보다 전화국처럼 보이는 곳에서 계속 현상금이 주가처럼 오르락 내리락하고 있으니, 그 유니버스와 조직원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일 것이다. 바로 그 유니버스에서 이제 여성 주인공이 등장할 차례가 된 것. 이전 〈존 윅〉 시리즈의 메인 테마곡이 비발디의 ‘사계’였다면, 〈발레리나〉에서는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가 흐른다.

〈발레리나〉
〈발레리나〉

루스카 로마에서 킬러로 성장한 이브(아나 드 아르마스)가 어렸을 적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진실을 좇는다. 이브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를 죽인 조직원들의 손목에 X자 형태의 표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 이브는 루스카 로마에서 훈련을 마치고 임무를 수행하던 중 바로 그 X자 표식의 조직을 마주치게 된다. 사이비 종교로만 전해진 이 조직의 의장 챈슬러(가브리엘 번)가 바로 이브의 아버지를 살해한 장본인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이제 이브는 다른 조직을 건드리면 큰 전쟁이 벌어진다는 루스카 로마 디렉터(안젤리카 휴스턴)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 조직의 본거지인 할슈타트로 향한다.

〈발레리나〉
〈발레리나〉

먼저 ‘키아누 리브스 없는 존 윅 유니버스’가 가능할까, 의심스러울 수 있을 텐데 일단 아나 드 아르마스의 유니버스 데뷔는 성공적이다. 아직 후속편이 나오지 않고 있는, 현재로서는 가장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제임스 본드 시리즈인 〈007 노 타임 투 다이〉(2021)에 ‘팔로마’라는 캐릭터로 출연한 아나 드 아르마스는, 당시 분량이 적었음에도 아주 강렬한 액션 감각을 보여준 바 있다. 액션영화의 원톱 주인공을 맡은 것이나 다름없는 〈발레리나〉에서도 마치 제목 그대로 발레를 하는 것처럼 우아한 동작을 펼쳐 보이고, 여러 총기류도 능수능란하게 다루어 별다른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존 윅〉 시리즈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Gun’(총)과 ‘쿵푸’(Kung-fu)의 합성어인 ‘건푸’(Gunfu) 스타일을 적절히 안배했다.

〈발레리나〉
〈발레리나〉

‘존 윅 스타일’의 창조자라 할 수 있는 무술감독 출신 채드 스타헬스키 감독의 혁신적인 성취라면, 세계 액션영화 장르에 롱테이크-롱샷 액션신을 다시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건 테크닉과 체력이 받쳐주는 과거 이소룡과 성룡 시절, 홍콩 액션영화의 방식이었다. 우리가 열광하는 액션 스타들의 동작이 잘 보이게끔 카메라는 멀리, 그리고 동선을 끊지 않고 길게 보여줬던 것. 하지만 〈본 아이덴티티〉 시리즈를 통해 빠른 호흡의 편집으로 파괴력을 강화하는 칼리, 실랏, 크라브마가, 시스테마 등의 초근접 무술 방식이 대세를 이루면서 이후 〈007〉 시리즈는 물론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그리고 한국영화 〈아저씨〉(2010), 〈용의자〉(2013) 등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런데 2014년 찾아온 〈존 윅〉은 달랐다. 키아누 리브스가 큰 키로 어딘가 살짝 휘청이며 꾸역꾸역 싸우는 느낌인데, 그걸 롱테이크로 담아내고 그의 가쁜 호흡까지 담아내면서 기어이 그 스타일을 납득시켰다. 초근접 액션이라는 것은 다르지 않았고, 몇몇 프레임의 칼과 피가 이 분명 특수효과라는 걸 알면서도, 그 롱테이크 안에 존 윅이라는 한 사내의 희로애락이 담기는 느낌이었다.

〈발레리나〉
〈발레리나〉

무엇보다 지난 4편까지 〈존 윅〉의 전 시리즈를 연출했을 뿐만 아니라, 〈발레리나〉에서도 주요 액션신 촬영을 진두지휘한 무술감독 출신 채드 스타헬스키 감독의 존재감이 여전하고, 〈언더월드〉 시리즈로 유명한 렌 와이즈먼 감독이 메인 연출자로 합류한 것이, 앞서 얘기한 것처럼 어떤 갈등과 조정 과정을 거쳤는지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상당히 준수한 결과물을 뽑아냈다고 보여진다. 〈발레리나〉는 ‘존 윅 스타일’을 유지하는 가운데, 주인공이 여성으로 바뀌면서 좀 더 변화를 준다. 기존의 롱테이크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으면서 다채로운 로케이션과 무기의 변화를 통해, 이브가 동경하는 뮤지컬 ‘백조의 호수’처럼 〈발레리나〉를 만들었다. 한편으로 그것은, 매튜 본에 의해 가녀린 여성 백조 대신 깃털 바지에 근육질의 상체를 드러낸 ‘남성 백조’가 오히려 더 익숙한 현대 관객에게, 원래 주인공의 자리를 되찾아준 것이기도 하다. 그처럼 아나 드 아르마스라는 여성 주인공을 내세우면서 4편까지 이어지며 피로도가 쌓인 건푸 스타일에 변화의 기점을 만들고, 루스카 로마라는 폐쇄된 조직에 신선한 균열을 일으킨다.

〈발레리나〉
〈발레리나〉

이브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눈 덮인 오스트리아의 할슈타트로 가서 펼치는 액션 시퀀스는 놀랍다. 유럽 여행을 계획하는 많은 사람들의 꿈의 관광지가 바로 할슈타트인데. 영화에서는 이브가 추적하는 비밀 조직의 근거지가 되는 마을이다. 카페에서 음식을 서빙하는 직원과 기념품을 파는 가게의 주인장 모두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이브의 정체를 눈치채자마자 바로 액션 기계로 탈바꿈하여 무자비한 공격을 개시한다.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오래된 마을의 아늑한 정경이 푸른 호수와 어울리며 ‘지상 낙원’이라 불리는 곳이지만, 〈발레리나〉에서는 처절한 클라이맥스 액션신이 펼쳐지는 장소가 된다. 할슈타트의 겨울 풍경이 저렇게 멋지구나! 라는 감탄은 아주 짧게, 액션의 쾌감은 아주 길게 이어진다.

〈발레리나〉
〈발레리나〉

할슈타트 액션 시퀀스만큼은 별 5개를 줘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황홀한 체험의 시간이다. 레스토랑에서 식칼로 싸우기 시작해, 스케이트 날을 짧은 칼처럼 사용하기도 하고, 급기야 화염방사기까지 등장한다. 눈 덮인 마을에서 뜨거운 화염이 난무하는 액션은 이전 〈존 윅〉 시리즈에서도 보지 못한 쾌감을 선사한다. 아나 드 아르마스는 여러 무기를 바꿔가면서도 액션의 중심을 잃지 않고, 급기야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루스카 로마가 보낸 존 윅과도 마주친다. 서로 같은 처지임을 알아본 그들 사이에는 묘한 동질감이 흐르고, 지루할 틈 없이 전개되는 액션 시퀀스에 한 번 더 활기를 불어넣는다. 할슈타트는 피, 땀, 눈물의 결정체다. 4편까지 성공적으로 이어진 〈존 윅〉 시리즈가 〈발레리나〉라는 새로운 얼굴로, 그야말로 멋지게 생명 연장의 꿈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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