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

감독 토드 헤인즈

출연 케이트 블란쳇, 루니 마라, 카일 챈들러

개봉 2015 영국, 미국,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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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굳이 의인화해서 묘사한다면, 그 얼굴은 다른 어떤 의인화된 추상적인 관념보다 다양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어떨 때는 천사의 얼굴로, 어떤 때는 악마의 얼굴로, 어떨 때는 남자의 모습으로, 어떨 때는 여자의 모습으로, 아가의 모습으로, 또 부모의 모습으로, 뭐 어떨 때는 반려동물의 모습일 수도 있을 것 같고.
 
다양한 모습이라는 건 결국 정형화된 형태가 없다는 것이고 그렇기에 누구든 사랑이란 단어를 짧고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을 텐데 그래서 사랑의 가치가 더욱 소중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사랑에 굳이 우열이란 것이 존재할 리 없으니 연인과의 사랑도, 부모 자식 간의 사랑도, 다른 모든 사랑도 다 소중할 것이다. 일반적이지 않지만 소중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 영화 <캐롤> 대한 이야기다.

백화점에서 일하는 테레즈(루니 마라)는 어느 날 손님으로 찾아온 캐롤(케이트 블란쳇)을 만나게 된다. 캐롤은 테레즈에게 추천받은 선물을 구입하기로 하고 돌아가지만 백화점에 장갑을 놓고 가게 된다. 테레즈가 그 장갑을 캐롤에게 보내주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테레즈는 그녀에게 헌신적인 남자친구가 있지만 남자친구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만큼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고 캐롤은 남편이 있지만 그녀의 성향과 다른 이유들 때문에 서로 맞지 않아 괴로워한다. 캐롤은 장갑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테레즈를 집으로 초대하지만 남편과의 갈등을 보이며 테레즈 역시 캐롤의 상황을 알게 된다.

하나뿐인 딸을 사이에 두고 양육권을 다투며 이혼 소송 중인 캐롤, 그리고 헌신적인 남자친구가 있었지만 확신이 없었던 테레즈. 이 둘은 만남을 지속해 가며 처음부터 서로에게 끌렸던 감정을 확인해간다.
 
1950년대의 이야기지만 영화를 보면서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던 건 그 둘의 모습이 시대와 상관없이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어리고 미숙하지만 활기찬 테레즈,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 경험도 있고, 그 나이만큼 무거워진 책임을 어깨에 짊어진 캐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이 첫 만남부터 서로에게 매력을 느끼는 장면들은 영화의 배경인 1950년대나 지금 21세기에서나 바뀐 게 없는 것이다. 영화 초반에 테레즈와 캐롤이 눈으로 나누는 대화들은 영화를 보는 사람들을 개인적인 추억의 시대로 데리고 간다. 먼 옛날 내가 그렇게 풋풋하게 사랑을 느끼던 그 때로.

캐롤이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으레 주문하는 드라이 마티니는 칵테일의 한 종류다. 세상에 정말 다종다양한 칵테일이 있지만 그중 유명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칵테일이고 또 재료와 만드는 방법, 만드는 사람에 따라 그 맛 역시 극과 극으로 바뀌는 칵테일이다.
 
대개 진과 드라이 버무스(화이트 와인에 브랜디나 당분을 섞고 각종 허브 등으로 향을 입힌 술)를 사용해 저어서 만들지만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처럼 진이 아닌 보드카를 사용해 쉐이커로 흔들어서 만들기도 한다.

(왼쪽부터) 텡커레이 진, 엑스트라 드라이 버무스, 마티니.

다른 칵테일들도 제법에 따라 어느 정도 맛이 바뀌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 격차가 가장 큰 칵테일이 바로 마티니라고 생각한다. 저어서 만들더라도 진을 어떤 진을 쓰는지, 버무스를 어떤 버무스를 쓰는지, 가니쉬는 올리브를 쓰는지 아니면 레몬 껍질을 쓰는지, 스터(칵테일을 만들 때 젓는 동작)는 짧게 하는지 길게 하는지, 심지어 칵테일을 만드는 믹싱 글래스와 잔을 얼렸는지 상온에 놔두었는지에 따라서도 맛의 격차가 극심한 칵테일이다.
 
따라서 그 어떤 칵테일보다도 마시는 사람의 취향이 분명하고, 또 그래서 내 취향을 잘 아는 바텐더에게 주문해야 하는 칵테일이다. 영화 <킹스맨>에서 영화 초반 어리바리했던 에그시(테런 에저트) 영화 막판엔 만드는 방법을 지정해서 마티니를 주문하던 장면을 기억하시는지? 그렇게 내 마티니라고 아예 이야기할 정도로 다양한 변주가 존재하는 칵테일이고, 그래서 우아하고 원숙한 캐롤에게 정말 잘 어울리는 칵테일이다.
 
마티니란 이름을 갖고 있는 칵테일이지만 그 이름 아래 만들어낼 수 있는 변주는 실로 무궁무진하다. 일개 칵테일이 그럴진대 사랑이란 위대한 이름 아래 연주될 수 있는 곡들은 얼마나 더 많을까. 인간의 사랑을 남녀 간의 사랑으로 한정할 수 없는 이유다.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 그렇고 다른 모든 사랑이 그렇듯, 동성 간의 사랑 역시 존중받고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당연하고도 당연한 명제를 백 마디 말보다 두 사람의 오고 가는 눈빛으로 증명한 이 영화 <캐롤>. 민감할 수도 있는 주제를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방법으로 풀어간 감독과 그런 이야기를 천상의 연기력으로 관객에게 전달한 두 배우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내고 싶다. 오래간만에 좋은, 아니 위대한 영화를 만났다.
 
P.S. 캐롤의 집에 초대된 테레즈는 피아노 앞에 앉아 유명한 재즈곡 ‘이지 리빙’(Easy Living)의 한 구절을 연주한다. 테레즈가 캐롤에게 선물한 LP에도 이 곡이 들어 있는데 여기서는 그 빌리 홀리데이가 부른 ‘이지 리빙’, 그리고 쳇 베이커가 부른 같은 곡을 첨부한다. 같은 곡의 다양한 해석, 하지만 모두 좋은 두 곡을 감상하시길.

빌리 홀리데이의 ‘이지 리빙’
쳇 베이커의 ‘이지 리빙’

데렉 / 술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