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야흐로 ‘과몰입’의 시대다. 2026년, 콘텐츠계의 테마는 ‘과몰입’이 아닐까. 〈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 단종의 슬픔을 느끼러 영월의 청령포로 향하는 관객들이 있는 한편, 〈살목지〉를 보고 물귀신의 공포를 체험하고 싶어 충북 예산의 살목지로 달려가는 관객들이 줄을 잇는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간 후, 관객은 작품의 세계관 안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길 즐긴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간 후에 관객들이 자발적으로 생성해내는 이야기가 작품의 수명을 결정하는 시대다. ‘기리고’ 앱의 인기가 바로 그 예다. 최근, 넷플릭스 시리즈 〈기리고〉가 공개 2주 차, 글로벌 TOP 10 비영어 쇼 1위에 오르며 전 세계적인 호러 신드롬을 얻고 있다. 지난 4월 24일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기리고〉는 소원을 이뤄주는 앱 ‘기리고’에 얽힌 저주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성적 고민에 시달리던 고등학생 형욱(이효제)은 우연히 발견한 앱 ‘기리고’에 ‘수학 만점 받게 해달라’라는 소원을 빈다. 소원은 거짓말처럼 이뤄지지만, 그 대가는 참혹했다. 24시간 뒤, 형욱은 학교에서 참혹한 죽음을 맞게 됐기 때문이다. 이후 세아(전소영), 나리(강미나), 건우(백선호), 하준(현우석) 등 친구들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패닉에 휩싸인 친구들은 ‘기리고’에 숨겨진 비밀을 하나둘 알게 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기리고〉 속 소원을 들어주는 앱 ‘기리고’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현재 이 앱은 앱스토어 무료 앱 다운로드 순위에서 구글 제미나이나 토스 같은 쟁쟁한 앱들을 제치고 엔터테인먼트 부문 차트 1위, 전체 2위까지 치솟으며 시청자들의 일상을 파고들고 있다. ‘기리고’의 인터페이스는 드라마 속과 동일하고, 개발자 이름란에는 극 중 캐릭터와 동명인 ‘권시원’이 적혀 있다.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설명 문구까지 그대로다. 사용자는 앱을 켜고, 셀카 모드로 동영상을 찍어 ‘소원 전송’을 누르면 된다. 소원을 빈 영상은 핸드폰 갤러리에 저장된다. 다만, 드라마처럼 작동하는 타이머는 없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기리고’ 앱이 넷플릭스 측의 공식 자료가 아닌, 시청자들의 자발적인 발견으로 인해 화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시청자들은 마치 우연히 ‘기리고’ 앱을 발견하고 친구들에게 알려주던 형욱처럼, 혹은 자신이 앱의 저주에 휘말린 5인방이 된 듯 스스로 세계관 안으로 걸어 들어가 그것을 하나의 ‘놀이’로서 즐기고 있다. 앱스토어 후기 중에는 “진짜 소원을 빌었는데 24시간 뒤가 너무 떨린다”, “권시원이 개발한 앱이라니 소름 돋는다”와 같이 작품과 현실을 혼동하는 듯한 과몰입 섞인 반응들이 줄을 잇고 있다.


지난 4월 29일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의 ‘런웨이’ 잡지 발행 프로모션 역시 시청자들의 ‘과몰입’을 도왔다. 인쇄 저널리즘의 몰락을 정면으로 다루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는 ‘런웨이’ 실물 잡지를 발행하고 ‘런웨이’ 매거진의 온라인 웹사이트를 실제로 운영했다. 잡지를 펼치면, 미란다 프리슬리(메릴 스트립), 나이젤 키플링(스탠리 투치), 앤디 삭스(앤 해서웨이) 등 영화 속 인물들이 실제 매거진의 제작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심지어 나이젤의 입사 연도는 1988년이라는, 깨알 같은 정보도 넘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잡지 속이 실제 패션지마냥 볼거리, 읽을거리로 마냥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는 사실이다. 잡지는 미란다 프리슬리의 ‘에디터의 레터’부터 영화에 등장하는 밀라노 패션위크 현장, 그리고 영화 속 미란다의 비서로 등장하는 아마리(시몬 애슐리)와의 인터뷰까지 알차게 실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에서 ‘런웨이’의 신임 기획 에디터를 맡은 앤디 삭스가 고군분투하며 따낸 기획, 사샤 반즈(루시 리우)와의 단독 인터뷰 역시 실려 있어 영화를 본 후 ‘과몰입’하기에 딱 좋다. 왜 커버가 에밀리(에밀리 블런트)냐고 하면, 영화를 관람한 사람들만이 그 답을 찾을 테니, 이 잡지는 훌륭한 팬서비스이기도 하다.

잡지에는 팬들을 미소 짓게 할 이스터 에그도 넘친다. 1편의 명대사 “Florals? For spring? Groundbreaking(꽃? 봄에? 정말 참신하네)”을 기억하는 팬이라면, ‘Spring ETERNAL’ 섹션에서 묘한 쾌감을 느낄 것이다. 또한 “Black is the new CERULEAN(검은색은 새로운 세룰리안이다)”이라는 섹션은 전편의 상징적인 ‘세룰리안 블루’ 논쟁을 위트 있게 비틀어낸 대목이다.

이 잡지는 뉴욕과 LA 등지에서 배포됐으며, 국내에서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 언론배급시사회를 비롯, 성수 쇼룸 등을 통해 배포됐다. 실물 잡지를 구하지 못한 관객이라도, 런웨이의 웹사이트는 언제나 열려 있으니 누구나 방문해볼 수 있다. 웹사이트에는 ‘LOOKBOOK’ 카테고리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영화 프레스 투어의 의상 정보까지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지난 4월 8일 내한한 메릴 스트립과 앤 해서웨이의 서울 투어 의상 정보도 이곳에 실려 있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멀게는 영화 〈블레어 위치 프로젝트〉(1999)가 시도했던, ‘작품과 현실의 경계를 고의로 무너뜨리는’ 이 방식은 더욱 정교해지고 있다. 〈블레어 위치 프로젝트〉는 웹사이트에 주인공들의 실종 전단지는 물론, 가짜 경찰 보고서, 인터뷰, 뉴스 화면 등을 업로드해, 대중이 실제와 허구를 혼동하도록 만들어 파격적인 수익을 벌어들였다.
요즘의 영화와 드라마는 시청자의 ‘과몰입’을 단순한 홍보 수단이 아닌 서사의 완성으로 보고 적극적으로 설계하는 추세다. 당신은 죽도록 빌고 싶은 소원이 있는가. 그렇다면 ‘기리고’ 앱을 다운받아 보자. 뉴욕의 한가운데에서 스타벅스를 들고 뛰던 앤디처럼 멋지게 차려입고 도심을 누비고 싶은가. runwayonline.com에 접속해 미란다 프리슬리의 에디터 레터를 읽어보자. 어느새 이야기 속에 놓인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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