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비발디와 나〉의 원제는 《Primavera》, 이탈리아어로 봄이다. 비발디의 《사계》 중 첫 번째 협주곡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의 봄은 해방의 다른 말이다. 1968년 프라하의 봄, 1980년 서울의 봄, 2011년 아랍의 봄처럼, 억압의 시기 이후에 다가왔던 시간들. 오래 억눌린 것들이 다시 본래의 색을 되찾고 피어나는 순간들이다. 우리 모두는 어떤 식으로든 '봄'이 해방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영화 엔딩 크레딧과 함께 듣는 〈봄〉과 이 단어가 갖는 의미는 오랜 여운을 남긴다.
18세기 초 베네치아,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는 버려진 소녀들을 거두고 교육시켜 탁월한 음악가로 길러냈다. 그녀들은 촘촘한 나무 격자 뒤에서, 존재를 감춘 상태로만 연주할 수 있다. 그녀들의 음악은 공간을 가득 메우고 청중들은 감격에 겨워 뜨거운 박수를 보내며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녀들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연주를 통해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으나, 존재는 드러낼 수 없으니, 마치 육체를 지니지 못한 존재들 같다.

한국어 제목 덕에 처음에는 이 영화가 비발디에 관한 전기 영화인가도 싶지만, 이 서사의 중심은 처음부터 그가 아니다. 티치아노 스카르파의 소설 『스타바트 마테르』를 원작으로, 오페라 연출가 다미아노 미켈레토가 데뷔작으로 선택한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체칠리아다. 새로 부임한 비발디는 체칠리아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본다. 엄청난 속도로 몰아치며 기교적 한계를 시험하는 와중에 스스로 연주를 먼저 끝내 버리는 체칠리아에게서 단순한 테크닉적 우위가 아닌, 남을 기쁘게 하기 위해, 칭찬을 듣기 위해 연주하지 않는 그녀의 특별함을 꿰뚫어본다. 음악적 자아와 특별한 카리스마를 가진 체칠리아가 작곡가인 그에게 큰 영감이 될 것이라는 것을 운명처럼 느낀 걸까. 누군가가 나의 재능을 알아본다는 것은 존재의 의미를 확인받는 것이며, 궤적이 정해진 삶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는 행위이다. 운하를 따라 상품과 사람과 돈이 끊임없이 이동하는 이 상업 공화국에서, 탁월한 재능은 언뜻 해방의 수단으로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통제의 심화로 이어진다. 제도를 위협하는 수준의 탁월한 재능은 관리의 대상일 뿐이며, 또 다른 감옥이 되어 재능 가진 자를 옭아맨다.

체칠리아의 이야기는 편지에서 시작된다. 밤마다 어둠 속에서 촛불을 켜고 간절한 열망을 담아 그녀는 쓴다. 상상 속의 어머니에게 그녀는 당신이 어떤 존재든, 창녀든 무엇이든 상관없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 간다. 언젠가 저 문을 열고 엄마가 나를 만나러 올 것이다, 라는 상상은 얼마나 간절한 기다림일까. 혹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기에 지독하게 가혹한 고문일까. 엄마가 찾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큰 탓에 체칠리아는 딸을 찾아온 여자를 오해하고 먼저 다가가 한껏 끌어안기까지 한다. 희미한 흔적이라도 찾기 위해 어머니가 남긴 표식과 기록을 뒤진다. 부원장 역시 이곳에 버려졌던 고아이기에 체칠리아를 이해하고 기록을 찾아 보여준다. 두꺼운 기록 속 반으로 잘려진 나침반이 그려진 카드가 유일한 단서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곳의 소녀들은 모두 버려진 아이들이다. 고아원은 이 아이들을 거둬 일과를 부여하고, 노래와 악기 연주 등으로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 제도 안에서 소녀들의 몸은 상품이기에 철저한 관리의 대상이다. 체칠리아의 앞에 놓인 선택지는 단순하다. 다른 소녀들처럼 귀족에게 팔려 가거나, 어머니가 돌아와 자신을 데려가 주기를 바라거나. 체칠리아는 뛰어난 외모 덕에 일찌감치 큰 금액의 지참금과 함께 팔려가기로 결정되었다. 전쟁만 끝난다면 정해진 운명은 곧장 닥쳐올 것이다. 체칠리아 역시 반쯤은 체념한 상태로 미래를 상상한다. 그래서 변주곡을 연주하는 체칠리아에게서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발견한 비발디에게, 비웃듯 자신의 운명을 털어놓는다. 전쟁이 끝나면 정혼자와 결혼할 것이라고.

18세기 초의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를 관통하는 것은 돈과 권력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보다 더 노골적인 우화 같다. 체칠리아 스스로 말한다. "그건 언제나 돈의 문제야." 재능도 열정도 없는 귀족 부인은 주말 저녁 연회에서 자신의 솜씨를 뽐내기 위해 무의미한 쳄발로 레슨을 지속한다. 체칠리아가 업으로 삼은 음악은 귀족에게 그저 장식이자 교양으로 소비될 뿐이다. 죽어가는 자의 마지막 소원이기에 죽음 직전의 침상 앞에서도 바이올린을 연주한다. 이 사치를 누린 대가로 그는 자신의 재산 일부를 지불했다. 현대의 소비자들이 상세 페이지에서 제품을 살피듯, 늙고 부유한 남성들은 딸뻘의 연주자들을 따로 만나 가까이에서 살피며 재혼 상대로 탐색한다. 아내가 없는 늙고 부유한 남성들에게 고아원이 제시하는 젊은 여자들은 세련된 형태의 상점 속 상품과 다를 바 없다. 현대의 베이비 박스처럼 지속적으로 고아들은 고아원에 유입된다. 그들을 먹이고 교육시키고 키워내 비싸게 팔아야만 이 시스템은 유지된다. 고아들은 베네치아에 수도 없이 많다는 원장의 말에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서늘한 진실은 폭력적인 현실을 숨긴다. 늙고 돈 많은 남자들이 청혼하는 과정은 정중하고, 소녀들이 연주하는 음악은 아름다우며, 소녀들이 떠낸 레이스를 단 화려한 드레스와 베일을 쓰고 선택받은 소녀만이 결혼을 통해 고아원을 떠난다. 거래는 예술 후원이라는 우아한 형태로 지속된다. 가장 낭만적인 도시로 인식되는 베네치아는 더 이상 우리가 감탄하며 꿈꾸는 엽서 속 도시가 아니다. 사회적 위계와 냉정한 거래, 각자 다른 가치를 가진 몸들이 서로를 가감없이 측정하며 값을 매기는 와중에 돈에 대한 집착이 가장 날것으로 드러난다. 고아원에서 소녀들은 본능으로 안다. 어떤 몸을 가진 누가 가장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으며, 처녀성은 물론 젊음과 미모와 재능과 같은 무기가 없으면 결코 비싸게 팔릴 수 없다는 것을.

비발디가 베네치아로 돌아온 것도 결국 다 돈 때문이었다. 일찌감치 음악적 재능을 보이던 그가 유럽을 돌며 궁정악장이나 카펠마이스터 자리를 얻으려 했으나 거듭 실패했다. 재능은 있으나 천식으로 몸이 약하고, 출세에 대한 욕망은 있으나 그에 걸맞는 사회적 제스처는 부족한 사람이었다. 피에타는 현재 지휘자의 1/3 비용으로 뛰어난 재능을 지닌 비발디를 고용할 수 있었다. 천재는 시장에서 협상력을 잃었을 때 비로소 제도 안으로 흡수된다. 비발디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중간 계급 출신인 그는 선천적으로 약한 몸으로 태어났다. 평생을 지독한 천식을 앓았고, 약간의 격렬함도 허용하지 않는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음악으로 '격렬하게'라는 표현을 반복한다. 현실에서 구현 불가능한 것이 음악에서는 모두 다 가능하기 때문이다. 음악은 그에게 필연 같은 선택이었으나, 18세기 초 남성으로 태어난 비발디, 붉은 머리의 사제로 불리던 그에게는 자유가 있었다. 그는 사회적 시스템 안에서 미래를 꿈꾸고 설계하며 직접 선택할 수 있었다. 곡을 쓰고 연주를 하고 지휘를 하며 음악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었다. 얼굴과 이름을 드러내고 지휘자로서 오케스트라를 이끌면서 명성을 쌓을 수 있었다. 여성인 체칠리아는 꿈꿀 수 없는 일이다. 비발디와 체칠리아가 보여주는 소통은 로맨틱한 남녀의 것이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할 때 서로가 서로를 음악으로 가장 깊이 이해하는 미묘한 순간의 무엇이다.
▶ 〈비발디와 나〉에 관한 글은 두 번째 기사로 이어집니다.
김나희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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