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영화음악의 거장 에릭 세라와의 긴 대화 ② : '제5원소' ‘디바 댄스’의 비밀, 그리고 내 최고의 작품은 '레옹'!

“뤽 베송과 나, 서로 언어로 다 설명하지 않아도 통했던, 기적 같은 소통”

※ 에릭 세라와의 대화는 첫 번째 글로부터 이어집니다.


김나희 음악평론가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에릭 세라 마스터클래스 현장 (사진제공=제천국제음악영화제)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에릭 세라 마스터클래스 현장 (사진제공=제천국제음악영화제)

〈그랑 블루〉와 〈레옹〉의 엄청난 성공 이후 〈제5원소〉를 준비하게 되었어요. 역대 최고의 제작비가 투입된 프로젝트였고, 본능적으로 이전 스타일을 반복할 수 없다는 걸 알았어요. 재즈 풍의 퓨전 스타일의 락을 뤽과 저 둘다 정말 좋아하지만, 장르를 바꾸지 않는 한 어떻게 하든 〈그랑 블루〉의 반복이 될 테니까요. 그때부터 클래식 음악의 작곡법과 교향곡 작곡에 도전했어요. 길고 지난한 과정이었죠. 매일 서너 시간 넘게 집중해 음반을 들으며, 교향곡 악보를 들여다봤어요. 처음에는 뭐가 뭔지 몰랐지만 곧 멜로디를 따라갈 수 있었죠. 기타와 사랑에 빠져 딥 퍼플의 음반을 들을 때와 같은 방식이었어요. 저는 다른 방법은 모르니까요. 드뷔시, 스트라빈스키, 바르토크, 라벨을 제 스승으로 삼았고, 그들의 음악 중 제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페트루슈카〉,〈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같은 레퍼토리들을 반복해서 수없이 들으며 악보를 들여다봤어요. 사람들의 권유로 존 윌리엄스도 들었는데, 곧 그가 구스타프 홀스트와 비슷하다는 걸 알고는 홀스트를 듣기 시작했어요. 이미 세상에 내놓아 검증된 클래식이 있는데, 그걸 다시 한번 흉내 낸 결과물, 이런 표현이 좀 그렇지만 중간 매개체 역할을 하는 존 윌리엄스를 듣느니 오리지널을 듣자, 싶었죠. 홀스트의 〈행성〉은 정말 엄청나더군요. 듣는데 그 웅장함에 가슴이 떨렸고, 이런 느낌, 음악으로 우주와 외계 생명체를 표현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3년 남짓 준비 기간이 걸렸고,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나니 교향곡을 저만의 스타일로 쓸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드뷔시나 스트라빈스키, 바르토크나 라벨을 흉내 내기에 급급하지 않은 저만의 스타일로요. 3년은 이미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존재했던 위대한 교향곡의 선율을 충분히 학습하고, 되새김질하고, 소화시키는데 걸린 시간이었죠.

〈제5원소〉
〈제5원소〉

〈제5원소〉에 들어갈 교향곡을 작곡하고, ‘디바 댄스’(The Diva Dancd)로 소프라노와 작업할 수 있게 되어 정말 떨렸어요. 음악원은커녕 한 번도 정식 음악 교육을 받은 적 없는 이방인이자, 야생 동물 같은 제가, 가장 까다롭고도 정교하게 훈련되고, 고도로 정제된 테크닉을 쓰는 소리와 오롯이 마주하는 거였으니까요. 당시 신인 소프라노 인바 뮬라(Inva Mula)를 소개받았어요. 그녀가 먼저 제 스튜디오에 왔고, 제가 스튜디오에 펼쳐 놓은 악보를 보고는 들어오자마자 목을 풀면서 연습 삼아 소리를 내기 시작했어요. 사람의 목소리만큼 순도가 높은 소리가 또 있을까요? 듣자마자 바로 그녀의 목소리가 얼마나 엄청나다는 걸 알았어요. 영화 속 브루스 윌리스처럼 옴짝달싹 못한 채, 어마어마한 악기와 마주한 채로 한참 떨었네요. 작곡해 놓은 곡의 약 60% 정도만 소리 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뮬라의 뛰어난 실력 덕에 제 예상과 달리 85% 정도 소리를 내더군요. 나머지는 오토튠으로 해결을 했어요. 뮬라를 데려온 에이전트는 마리아 칼라스의 에이전트였던 전설적 존재였고, 음악을 완성하고 나서 다시 그들이 스튜디오에 왔을 때, 저는 속으로 엄청나게 떨고 있었어요. 마리아 칼라스와 함께 엄청난 규모의 오페라 프로덕션을 모두 경험했을 에이전트가, 도니제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의 ‘광란의 아리아’에 이어지는 제 음악을 듣고 이 족보도 없는 엉터리는 뭐냐고 실망할까 봐요. 그런데, 완성본을 영화 장면과 같이 감상한 그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거예요. 영화의 성공에 앞서, 업계의 프로페셔널로부터 인정받은 그 순간이 정말 기뻤어요. 수년간 스승도 없이 혼자 애쓴 모든 노력이 비로소 인정받는 기분이었어요.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소프라노들이 이 곡 ‘디바 댄스’에 도전하고 있고, 주변 지인들은 끝없이 저에게 메시지를 보내 들어봤어? 라고 물어와요. 그래서 매년 저만의 리스트로 최고의 아리아 순위를 매겨봐요. 그 리스트는 거의 매년 갱신되고 있어요.(웃음)

〈제5원소〉 디바 댄스
〈제5원소〉 디바 댄스

모든 영화감독과 함께 세트로 이름을 남긴 영화 음악 작곡가들은, 어떤 면에서는 엄청나게 희소한 확률로 서로 소통하는 법을 깨우친, 큰 행운을 누린 예술가들이에요. 영화감독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정확한 음악의 언어로 설명할 줄은 몰라요. 그들의 설명은 그저 추상적이고, 이제 막 광산에서 캐낸 원석과도 같아요. 그 추상적이고 모호한 부분을 구체적인 음악으로, 원석을 가공해 빛나는 보석이 되듯, 딱 맞는 사이즈로 정확히 만들어 완성품을 가져다주는 게 영화 음악 작곡가의 과제예요. 어려운 일이죠. 영화감독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그 막연한 무언가가 음악 감독의 작업으로 건너오는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서로 모호한 부분이 생겨나고, 필연적인 오해가 발생할 수가 있어요. 그런 면에서 뤽 베송과 저는 둘 다 운이 좋았죠. 서로 언어로 다 설명하지 않아도, 통했으니까요. 기적과도 같은 소통이라고 생각해요.

〈제5원소〉 촬영 현장의 뤽 베송(오른쪽)
〈제5원소〉 촬영 현장의 뤽 베송(오른쪽)

영화 음악은 절대적으로, 영화를 위해 충실히 복무하듯 존재해야 해요. 어떤 경우에도 영화의 분위기에 일조하고, 이미지가 힘을 잃을 때나 서사가 약점을 보일 때 음악이 나서서 그 취약점을 보완하고, 축적되는 감정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어 주면서 전반적 완결성에 기여하는, 품이 넉넉한 조력자 역할을 해야 해요. 영화 음악이 독자적으로 서사와 이미지를 뛰어넘어 뇌리에 남는 게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에요. 오히려 한 편의 영화를 다 보았는데, 딱히 음악이 기억나지 않는 게 더 좋을 수가 있어요. 특히 요즘에는 더 그런 것 같아요. 영화 음악은, 영화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죠. 그래서 제가 저만의 솔로 음반과 그룹 RXRA(프랑스어 방식으로 소리 내어 읽으면 에릭 세라 발음이 되는 알파벳 자음-편집자주)과 함께 하는 공연, 음악 작업을 따로 이어가는 것이기도 해요. 영화 음악과는 별개로 무대에서 선보이는 음악이고, 이건 저의 음악 커리어의 최초 시작점인 연주자로서의 정체성을 계속 지켜가면서, 제가 저 자신을 충전시키는 방식이기도 해요. 특히 이 멤버들은 에스닉한 아프리카의 타악기 스페셜리스트부터, 파리국립음악원에서 인정받은 색소폰과 기타연주자들이 모여 있는, 저보다 더 뛰어난 음악적 자질을 갖췄고, 제도권 음악 교육을 거치며 단련된 뮤지션들이거든요. 제 부족한 지점을 채워줄 수 있는 친구들이고, 이런 뮤지션들과 함께 하면서 음악적으로 계속 더 나아질 수 있어요.

지금까지 작업한 모든 영화들 중에 단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가장 마음에 드는 자식은 누구냐? 혹은 엄마 아빠 중에 누가 더 좋으냐? 같은 질문처럼 답하기가 어려운데, 모든 작업은 그 나름의 역사와 감정을 남기기 때문이에요. 그래도 정말 단 하나의 작품을 고르라면, 저는 〈레옹〉을 선택할 거예요. 음악적으로나 서사적으로, 또는 영화의 성공도 그렇고 그 강렬한 분위기도 역시 〈레옹〉이 제 마음속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에요. 스팅의 곡을 쓴 건 뤽의 선택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정말 큰 인기를 끈 OST가 되었어요.

〈레옹〉
〈레옹〉

사실 제천까지 와서도 곡 작업을 끝없이 이어가며, 매일같이 마감에 쫓기고 있는데, 매번 새로운 작업을 시작할 때마다 한없이 두려워요. 마음속 악마가 속삭이듯, 이번에는 실패할 거야, 너는 더 나은 걸 해낼 수 없을 거야, 라면서 저 자신을 더 나약하게 만들고 내면의 용기가 사라지면서 좌절감이 들기도 해요. 내가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 피드백을 곧바로 받을 수가 없어서 영화 음악은 더 힘들어요. 설령 작업을 만족스럽게 마치고 영화가 개봉한 이후 흥행에 성공하고, 상을 받거나 하더라도, 그 성공은 이미 수년 전, 과거의 작업에 대한 평가일 뿐,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현재의 작업에 대한 피드백이 아니라는 게 힘들어요. 그럴 때에는 늪이나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이제 저는 60살을 넘겼고, 심지어 암 투병도 이겨냈고, 코로나 사태라는 초유의 전염병으로 중단된 투어도 이어 나갔어요.

〈레옹〉
〈레옹〉

〈그랑 블루〉 이후 영화 음악에만 전업 작곡가로 매달린지 40년 가까이 되어가는데, 새로운 곡을 쓸 때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하찮게 느껴져요. 제가 그나마 이 길을 가려는 후배 작곡가들에게 할 수 있는 조언은, 스스로에게 만족할 만한 작업을 하라는 거예요. 곡을 쓰다 보면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아요. 청중으로서의 내가 만족할 만한 곡인지 아닌지 말이에요. 먼저 내 자신이 기쁘고 충만하고 자랑스러울 만한 곡을 써내야 해요. 단 한 소절만이라도 그런 작업을 해내고 나면, 나중에 그것들이 쌓여 완성한 곡은 높은 확률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게 들릴 수 있어요. 그렇게 내 곡을 좋게 듣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냥 좋다 정도가 아니라 가슴을 울린다며, 훌륭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나올 확률이 점점 높아지게 되죠. 그 사람들이 하나 둘에서 시작해, 더 많아지고, 그렇게 만족한 나, 는 너, 가 되고 그 혹은 그녀가 되었다가 흔히 말하는 청중, 즉 그들이 되고, 나아가 같은 멜로디와 선율에 감동받는 우리,가 된다고 믿어요. 그러니 계속 나 자신이 만족할 만한 곡을 써내는 데 최선을 다하며, 내 자신을 쏟아부으려고 해요. 언젠가는 ‘우리 ’가 된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으니까요. 제천에 와서 만난 청중들의 환호에서 다시 한번 느꼈거든요. 제천 예술의 전당 공연의 마지막, 잠시나마 그곳에 함께 있던 모두가 ‘우리’였다는 걸요. 언젠가 한국에 다시 와서 더 많은 우리, 와 만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에릭 세라 특별 콘서트 (사진제공=제천국제음악영화제)
에릭 세라 특별 콘서트 (사진제공=제천국제음악영화제)

9월 6일 토요일, 제천 예술의 전당 무대에 오른 RXRA 밴드는 100분 러닝타임 내내 놀라운 집중력과 몰입감으로, 연주하는 곡마다 영화 속 장면을 연상시키게 하는 생생한 연주를 선보였다. 이날 공연을 관람한 모그 음악감독은 “90년대 뤽 베송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영화를 만난 씨네필들이 앞다퉈 〈그랑 블루〉 혹은 〈레옹〉의 포스터로 실내 공간을 장식하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 베이스를 잡은 에릭 세라의 연주 덕분에 시간 여행을 하듯 당시 모두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던 누벨 이마주 영화에 열광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드는 공연이었다”는 감상평을 밝혔다. 다소 건조한 홀의 음향 탓에 잔향이 짧게 남아 아쉬웠지만, 〈그랑 블루〉의 테마부터 에릭 세라의 할리우드 진출 작품인 〈007 골든아이〉를 아우르는 레퍼토리를 선보이는 내내 파리국립음악원 출신 밴드 멤버들이 순간순간 솔로로서 빛났다. 오랜 시간 갈고닦은 솔리스트로서의 음악적 역량이 반짝거리는, 100분이 마냥 짧게 느껴지는 호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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