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영화음악의 거장 에릭 세라와의 긴 대화 ① : 뤽 베송과의 인연, 그리고 장항준 위원장을 보며 아버지를 떠올리다

“딥 퍼플의 음반, 내겐 우상이자 음악 선생님”

김나희 음악평론가


에릭 세라 (사진제공=제천국제음악영화제)
에릭 세라 (사진제공=제천국제음악영화제)

프랑스 거장 음악감독 에릭 세라가 생애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지난 9월 4일부터 9일까지 제천시 일대에서 열린 제21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JIMFF)에서 제천영화음악상을 수상하며 국내 관객들과 만나게 된 것. 〈서브웨이〉(1985), 〈그랑 블루〉(1993), 〈레옹〉(1995), 〈제5원소〉(1997) 등 뤽 베송 감독과의 파트너십으로 유명한 그는 〈마지막 전투〉(1983), 〈니키타〉(1990) 등으로 세자르영화제 음악상도 수상하며 현대 프랑스 영화음악을 대표해온 인물이다. 〈007 골든아이〉(1995), 〈롤러볼〉(2002), 〈방탄승〉(2003) 등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하기도 했다. 이번 영화제에서 ‘제천영화음악상’을 수상하고 마스터클래스 시간을 가졌음은 물론 국내 최초로 특별 콘서트도 열었다. 이번 공연은 영화제 음악 콘서트 프로그램 'JIMFF 스페셜 초이스'의 하나로, 9월 6일부터 8일까지 제천예술의전당 대공연장에서 3일간 열렸다. 자신이 이끄는 밴드와 함께 앞서 얘기한 대표작의 음악을 라이브로 연주했다. 김나희 음악평론가가 그와의 대면 인터뷰 및 마스터클래스를 구술로 정리하고, 공연을 감상한 생생한 후기를 보내왔다.


에릭 세라 특별 콘서트 (사진제공=제천국제음악영화제)
에릭 세라 특별 콘서트 (사진제공=제천국제음악영화제)

다섯 살이었어요. 아버지가 처음으로 기타를 사주셨어요. 장난감이라고 해도 좋을 사이즈였는데, 곧바로 저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어요. 그때 우리는 시골에 살고 있었거든요. 어머니가 많이 아프셔서 의사들의 권유로 아버지도 모든 걸 접고 파리를 떠났죠.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로 이사를 갔어요. 주변에 이웃이 없었어요. 가장 가까운 이웃의 집에 가려면 차로 최소 2km는 가야 했어요. 자연 속에서 실컷 뛰노는 어린아이였죠. 숲의 이끼부터 울창한 나무들, 야생 동물, 햇빛과 바람을 맞으면서 마음껏 놀았어요. 오가는 이웃도 없이 너른 포도밭이 끝없이 펼쳐진 풍광 속에서 저 혼자였는데, 유일한 친구로 당시에 키우던 강아지가 있었고, 거기에 기타가 추가된 거죠. 실컷 놀 수 있는 친구가 강아지에서 기타까지 둘로 늘었죠. 끝없이 조용한 시골 마을의 저녁 시간을 제 방에서 기타와 함께 보냈어요. 아버지는 꽤 유명한 가수 겸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었고, 공연이 늘 이어졌죠. 아버지 주변에는 유명인들이 많았어요. 자끄 브렐이 저의 대부에요. 저희 집에 와서 휴가를 보내던 그가 그렇게 유명한 국민가수라는 걸 어릴 때는 몰랐어요. 어린이들은 유명세가 뭔지를 모르니까요. 다른 것보다 그 자끄 브렐이 저희 시골집에 와서 휴가를 보내다가 갔는데, 당시 저는 너무 어려서 음악에 관련한 대화도 못 해본 건 너무 아쉬워요. 아버지가 집에서 늘 자끄 브렐 음반을 주구장창 들으셨거든요. 저는 그냥 모든 명성을 내려놓고, 그를 좇는 언론과 극성스러운 팬들로부터 멀어져 한 사람의 자연인이 된 존재를 느꼈을 뿐이죠. 그는 복잡하고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저도 그래서 늘 단순해지려고 노력해요. 지금도 에어컨으로 냉방이 되는 인위적인 실내 공간보다 이렇게 호숫가에서, 햇빛과 바람을 맞고, 흙과 숲의 냄새, 습도와 열기를 느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더 좋아요. 프랑스에서 열두 시간을 넘게 날아왔고, 서울에서 제천까지 두 시간 넘게 걸렸는데 제천에서 단 한 번의 공연만 하는 게 참 아쉽네요. 이렇게 제천을 대표하는 호수를 경험하고 느껴야 진짜 제가 여길 다녀간 거 아니겠어요?

에릭 세라 특별 콘서트 포스터 (사진제공=제천국제음악영화제)
에릭 세라 특별 콘서트 포스터 (사진제공=제천국제음악영화제)

아버지는 공연이 잦은 만큼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어요. 어머니는 남부로 와서도 계속 건강이 좋지 않으셨고 병세는 점차 악화되었어요. 자연 속에서 자라던 홀로 있던 다섯 살에 만난 첫 장난감이자 친구가 기타였으니, 저에게 기타는 사실 악기 이상으로 의지가 되는 존재였어요. 기타를 치고 있으면 외롭지 않았어요. 노력한 만큼 제가 더 나아지는 걸 매일 느낄 수 있었죠. 독학이었지만 금방 그럴싸하게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고, 음계를 깨치고 멜로디를 연주할 수 있게 되고 나서는 연주를 근사하게 하고 싶어졌어요. 다행히 그 당시에는 스마트폰도 없고, 비디오 게임도 없었고, 저희 집에 텔레비전도 없었거든요. 방에서 한껏 몰입한 채 기타를 연주할 수 있었어요. 시끄럽다고 항의할 이웃도 없었으니 저는 완전히 자유로웠죠! 당시 유행하던 재즈와 록에 기반한 음반들을 참 많이 들었어요. 그중에서도 특히 딥 퍼플의 음반을 많이 들었고, 그 음반이 제 레슨 선생님이자 우상이었어요. 똑같은 기타 리프를 될 때까지 죽어라 반복해서 연주하고 연습하면서 시간을 보냈죠. 저에게 음악은 독학으로 스스로 깨치고, 반복으로 완전히 제 것이 될 때까지 익히는 과정의 연속이었어요.

뤽 베송(위)과 〈마지막 전투〉
뤽 베송(위)과 〈마지막 전투〉

열한 살이 되었을 때, 지방을 순회하던 극단의 휴식 시간에, 친구와 둘이 무대에 올라 연주를 할 기회가 생겼어요. 제 친구는 저만큼 기타에 미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코드를 짚는 정도였어요. 대단하고 화려한 무대는 아니었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가 관객들 앞에 서서 일렉트릭 기타로 솔로를 연주하는 거였죠. 인터미션 20분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청중들이 저에게 환호해 주는데, 너무나 짜릿했어요. 떨리는 마음보다도 흥분과 짜릿함이 더 컸어요. 이래서 무대에 서는 거구나, 아버지가 왜 그렇게 매번 공연을 위해 집을 떠나 있는지, 알 수 있었어요. 그래서 막연하지만 앞으로도 무대에 서야겠다, 기타리스트가 되어야겠다 결심했고 친구들과 그룹을 결성해서 15살 때부터 그룹 활동을 했어요. 그러다가 몇 번이나 대타 연주로 레코딩에 투입이 되었죠. 당시에 프랑스에서도 유행처럼 록밴드와 그룹들이 있었는데 레코딩을 하다 보면 공연과는 다르게 실력이 다 드러나거든요. 녹음 스튜디오에서 연락이 오면 제가 급하게 대타로 투입이 되어서 녹음을 하고 그랬어요. 그만큼 제가 베이스와 기타로 손꼽힌다는 거니까 사실 기분 좋은 제안이었죠. 그렇게 친분이 쌓였던 스튜디오에서 뤽 베송을 만났어요. 우리는 마침 동갑내기였어요. 당시 우리는 둘 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이었어요. 겨우 십 대 후반인데 무엇이 되어 있을 리가 없지 않겠어요?

〈서브웨이〉
〈서브웨이〉

뤽이 영화를 한다고, 지금은 연출부에 있고 시나리오도 쓴다고 소개를 받았어요. 얼마 있다가 한 가수가 녹음을 하러 왔는데, 그도 밴드의 기타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제가 또 대타로 투입이 되었고, 거의 한나절 내내 즉흥 연주를 하며 그 녹음을 완수해냈죠. 그 가수가 마침 뤽의 친구였어요. 뤽도 스튜디오에 놀러 왔고 우연히 제가 대타로 녹음하는 전 과정을 지켜봤죠. 우리가 동갑인데, 제가 즉흥적으로 연주를 해내는 모습이 그에게 무척이나 인상 깊었던 모양이에요. 저에게 오더니 작곡을 해줄 수 있겠냐고 하는 거예요. 저는 당연히 할 수 없다고 거절했어요. 우리가 또래이고, 뤽은 악기를 다룰 줄도 모르고, 음악을 잘 모르니까 제 즉흥 연주에 감명을 받아서 작곡이 될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에게 즉흥 연주와 작곡은 다른 카테고리에 속해 있었어요. 위대한 기타리스트이고 엄청난 즉흥 연주를 하는데 작곡을 할 수 없는 연주자들이 얼마나 많나요. 또, 작곡은 엄청난데, 즉흥 연주가 안 되는 음악가들도 많고요. 그래서 거절했는데 뤽은 왠지 모르게 완전히 확신에 차 있었고, 오히려 저를 설득했어요. 곧 단편을 만드는데, 음악감독이 되어 곡을 만들어 달라고요. 어쩌면 그게 예언처럼 제 운명을 결정지은 걸지도 몰라요. 제가 깨달은 건, 방구석에서 저 혼자 놀이처럼 즐기면서 해왔던 작업이 사실 작곡이나 다를 바 없다는 거였어요. 연주를 하다가 종종 제가 연주하고 싶은 멜로디나 기타 리프를 직접 만들어 내고는 했거든요. 그렇게 시도해봤는데 뤽은 무척 만족했어요. 그다음 장편을 함께 하자고 했죠. 그렇게 뤽의 데뷔작 〈마지막 전투〉에 이어 〈서브웨이〉까지 함께 하게 되었어요. 이 작품으로 프랑스에서 그래미상도 받고, 황금 디스크도 2번이나 수상하는 큰 성공을 거두었죠.

〈니키타〉 촬영현장의 뤽 베송(왼쪽)
〈니키타〉 촬영현장의 뤽 베송(왼쪽)

영화 〈서브웨이〉의 흥행도 음악도 큰 성공이었고, 뤽과 함께 거둔 ‘우리의 성공’이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영화 음악을 업으로 삼을 생각은 없었고, 계속 그룹에서 연주하는 뮤지션의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었고, 영화 음악은 재미있는 파트타임 일과도 같았죠. 그때까지도 연주자로서의 자아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어요. 이후 우리의 세 번째 협업인 〈그랑 블루〉를 준비하게 되었고, 뤽이 쏟는 열정과 노력을 보면서 이제는 그냥 한번 시도해 볼까? 혹은 파트타임으로 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맡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때까지 유지하고 있었던 밴드를 정리했고, 난생처음 풀타임 영화 음악 작곡가가 되었어요. 시간이 늘어나니까 그만큼 영화를 위해, 준비에 쓸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어요. 출연 배우들과 함께, 전통적 테크닉의 잠수를 배웠어요. 뤽이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면서 다음 장편으로 무엇을 소재로 삼을 건지 보여줬는데, 그 다큐멘터리가 너무나 압도적으로 경이롭고 마법 같았어요. 나 스스로 느끼고 알고 싶었고, 경험해야 알 수 있는 거다 싶어서 주연 배우를 포함해 잠수를 배우고 훈련하는 과정을 석 달 넘게 함께했어요.

〈그랑블루〉
〈그랑블루〉

모든 훈련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야 했고, 남프랑스의 코트 아쥐르와 이탈리아, 그리스, 시칠리아를 배경으로 이뤄졌으니 정말 끝내주는 석 달이었어요. 훈련이지만 마치 근사한 여름 바캉스 같았어요. 배우들과 함께. 바닷속에 들어가 몸을 담은 채로, 수면을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산산이 부서지는 찬란한 태양빛의 조각들, 바다 위에 내리쬐는 태양을 해저 12미터 바닷속에서 올려다볼 수 있었어요. 그 자체로 명상이었어요. 포유류인 인간의 몸을 잠시 잊고, 처음 우주가 만들어질 때, 태초의 생명체로 돌아간 것 같았죠. 처음에는 20초도 못 버티다 훈련을 반복하며 나중에는 물속에서 거의 2분 넘게 버틸 수 있었는데, 중력을 잠시 잊은 듯, 온몸이 깊은 바닷속에서 완전히 잠긴 그 감각은 정말 놀라웠어요. 그 감각을 토대로 그랑 블루의 음악을 작곡했어요. 자연스럽게 명상적이고, 뉴 웨이브 적 분위기가 담겼지만 당시의 유행을 의도적으로 노렸다기보다는 직접 체험한 잠수 훈련의 경험과 감각을 음악으로 표현하려니 그렇게 된 거였어요.

장항준 집행위원장(왼)과 에릭 세라 (사진제공=제천국제음악영화제)
장항준 집행위원장(왼)과 에릭 세라 (사진제공=제천국제음악영화제)

〈그랑 블루〉는 엄청나게 성공했고, 제 인생은 달라졌죠. 저와 뤽, 그리고 주연 배우들의 삶까지 하루아침에 다 달라졌어요. 심지어 2020년대인 오늘날까지도 모두들 여전히 〈그랑 블루〉를 말하고, 〈그랑 블루〉를 연주하는 공연을 열면 아레나에 수만 명이 모여서 프랑스 전역을 돌면서 투어를 해야 하죠. 당시에도 이래도 되나? 두려울 정도의 엄청난 성공이었어요. 심지어 미국에서 개봉하면서는 신인인 제 음악이 미국 관객들에게 통하지 않을 거라 믿은 배급사의 선택으로 제 음악이 쓰이지 않았는데 말이에요. 제천에 와서 제천 음악상을 받는데, 너무 놀라웠어요. 음악이 모두에게 통하는 보편의 언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머나먼 지구 반대편에서도 제 음악을 알아봐 주었다는 게 정말 경이롭고 영광스러운 일이니까요. 시상에 나선 장항준 집행위원장은 정말 유쾌한 사람이더군요. 스스로 우스꽝스러워지는 걸 전혀 겁내지 않으며 분위기를 주도하는데, 순발력 넘치는 재치와 위트로 무대에서 좌중을 휘어잡던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어요.

※ 에릭 세라와의 대화는 2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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