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나희 평론가의 '비발디와 나' ② 봄, 혹은 들리기만 했던 존재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봄은 그저 꽃이 피는 계절이 아니다. 들리기만 했던 존재들이 마침내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우리는 아주 잠시나마 상대를 다 이해하거나 알았다고 느끼고, 그렇게 믿기도 한다. 음악 안에서, 음악으로 소통하는 것이 그러하다.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 가장 깊은 층위는 비발디가 밤중에 먼저 체칠리아의 은신처를 찾아와 쏟아내는 고백에서 드러난다. 그것은 사랑의 고백이 아닌, 음악을 향해 쏟아내는 절절한 진심이다. 음악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그는 말한다. 천식으로 자주 몸이 무너지는 그가 오직 음악 안에서만 격렬해질 수 있다고. 자신의 전부를 음악에 걸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진정성 때문에 이 장면은 가장 사무친다. 비발디에게 음악은 사회적 지위로, 이름으로, 이동의 자유로 환원된다. 체칠리아에게는, 아무리 탁월해도, 그 어느 것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같은 음악을 연주하며, 음악에 이토록 깊이 헌신하고, 비슷한 열정과 뜨거움으로 다가서지만 남성과 여성인 그들이 음악을 통해 외부 세계와 만나는 방식은 처음부터 아주 달랐다. 영화는 끝까지 비발디를 악인으로 그리지 않는다. 소극적인 옹호자이되, 자신이 두 번째 심장처럼 아끼는 바이올린을 결혼을 앞둔 체칠리아에게 선물하는 진심을 가진 존재라는 걸 보여준다. 너의 재능은 눈부시니 결혼을 하더라도 연주를 이어가기를 바란다는 순수한 마음. 그러나 순도 높은 진심도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은 극복할 수 없다. 체칠리아는 태어나면서부터 격자 안의 세계에 놓였고, 비발디는 격자 밖에서 꿈을 위해 모험을 떠났다 실패한 뒤 잠시 돌아와 숨을 고르고 있다. 칭찬받기 위해서가 아닌, 그저 음악이고자 연주하는 체칠리아에게서 비발디는 음악적 영감을 얻는다. 그녀를 뮤즈로 삼아 음악적 성취를 이뤄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사회의 관습과 맞서 싸울 만큼 패기 있거나 기존의 질서를 뒤흔들 만큼의 영향력을 지닌 존재는 아니다.

〈비발디와 나〉
〈비발디와 나〉

그럼에도 그들이 음악 안에서 잠시나마 수평적 존재로 조우할 수 있었던 것은, 둘 다 음악만이 자신을 온전히 담을 수 있는 유일한 그릇임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두 사람 사이에 그 어떤 낭만도 위계도 허락하지 않는다. 한 사람은 음악 안에서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다른 사람은 그것을 통해 인정을 구한다. 그 비대칭 속에서도 그들은 공평하게 주고받는다. 비발디는 당대 최고의 악기 제작자를 불러 정확히 체칠리아의 팔 길이에 맞는 바이올린을 주문한다. 소녀의 몸은 일반 성인 남성 연주자와 완전히 다르다. 내 팔 길이에 딱 맞는 바이올린을 갖는다는 건 당시 연주자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였을 것이다. 규격에 몸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몸에 규격을 맞추는 것. 모두 같은 옷을 입고 지내는 피에타에서 소녀들의 몸은 늘 제도의 틀 안에 끼워져 왔다. 이 바이올린은 정확히 그 반대 지점을 가리키는 물건이다. 간절히 애정과 대화와 인간의 온기를 열망하지만 어디로 향해야 할지 그 방향을 모르는 소녀가 바이올린을 쥔다. 그 순간부터 악기는 단순한 재능의 증명이 아니라, 제도에 의해 관리되어 온 몸, 소녀의 것이지만 단 한 번도 자기 것처럼 느끼지 못했던 몸이 자기 존재를 처음으로 발화하는 방식이 된다.

〈비발디와 나〉
〈비발디와 나〉

이 영화에서 가장 긴 울림을 남기는 것은 야외 공연 시퀀스다. 처음으로 격자문양 바깥 세상에 나선 소녀들은 배를 타고 운하를 가로질러 숲으로 간다. 따사로운 봄볕 아래 연주하고, 새 생명이 피어나고 있는 호숫가를 걷고, 숲의 정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통제되던 몸이 처음으로 제도 밖의 공간에서 신선하고 새로운 공기를 들이마신다. 봄이 한 순간 새싹처럼 돋아나듯 바이올린의 현이 혼자 가만가만 봄의 시작을 탐색한다.

소녀들이 돌아오는 길은 그래서 더 잔인하다. 운하 위의 배를 탄 그녀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있어 표정을 알 수 없지만 어딘가 침울하고 슬프다. 격자문양에서 벗어난 만큼, 외부 세계로 나온 소녀들은 가면으로 존재를 지운다. 조금 전까지 따사로운 햇볕 아래 봄 속에 놓여 있던 몸들이 다시 익명이 되어 물러난다. 뱃길 어딘가, 정육점 앞을 지날 때 카메라가 잠시 멈춘다. 도축된 돼지가 배를 갈린 채 매달려 있고, 그 피가 아무렇지 않게 운하로 흘러든다. 내부가 열려 비워지고, 버려진다. 그 이미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소녀들과 나란히, 그냥 거기 있다.

〈비발디와 나〉
〈비발디와 나〉

고아원으로 돌아온 그녀들은 목욕을 하고, 몸을 씻어내다가 소리 내어 운다. 바깥 세상의 자유를 만끽하고 경험한 후 돌아온 몸을 그대로 씻어내야 하는 자리에서. 목욕은 휴식이나 정화가 아니라 폭력적인 기억의 삭제다. 봄의 기운, 햇볕과 뺨을 스쳐가는 바람의 감촉, 야외에서 연주하는 순간의 짜릿함 같은 것들이 흘러가 버린다. 운하에 죽은 동물의 피가 흘러 들었고, 욕조에는 봄을 빼앗긴 소녀들의 눈물이 고인다.

체칠리아의 연주는 덴마크 국왕을 완전히 사로잡는다. 왕은 감격해 체칠리아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말한다. 열정적이고 길게. 이편으로 건너온 왕과 함께 비발디와 총감독은 셋이서 프랑스어로 대화한다. 당대 유럽 권력의 언어인 프랑스어. 당연히 체칠리아는 그 언어를 모른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말들이 정확히 어떤 문장인지, 어떤 단어로 자신을 불렀는지, 그녀는 끝내 알지 못한다. 감동을 준 사람 당사자가 막상 그 감동의 언어 밖에 서 있다. 그 감동이 순수하게 음악 때문인지, 음악에 젊음과 순수한 미모가 더해진 결과물인지 다소 불분명하다. 격자가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든, 프랑스어로 만들어진 것이든, 그것이 구획하는 안과 밖의 논리는 언제나 같다.

〈비발디와 나〉
〈비발디와 나〉

체칠리아는 결혼을 앞두고 스스로 처녀성을 버린다. 천진난만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자발적 선택을 내린다. 그리고 사정을 알게 된 정혼자에게 웃음기 묻은 얼굴로 말한다. 당신에게 악감정은 없다고. 이 시대에, 이 제도 안에서, 자기 몸을 자기가 결정해 마음대로 쓰고 감히 음악을 통해 명성과 커리어를 쌓을 수 있다고 논한 대가는 지독한 결과로 돌아온다. 정혼자는 체칠리아의 왼팔을 두 번에 걸쳐 부러뜨린다. 바이올린을 다시는 잡을 수 없도록.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 자존심에 상처를 낸 것에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몸에 대한 보복이다. 그 야만성과 호전성이 전쟁터에서 그를 살아남게 했을 것이다. 세계는 그런 사람들이 이기도록 설계되어 있으니.

체칠리아 대신 결혼한 친구 콘스탄자는 옛 동료들의 연주를 들으며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마음껏 울지 못한다. 남편이 눈치를 주기 때문이다. 화려한 옷과 보석을 온몸에 두르고도, 눈물 한 방울 떨구는 것조차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허락하는 삶이 무엇인지, 여성의 몸이 과연 누구의 것인지를, 영화는 이 한 장면으로 말한다. 설명하지 않는다. 보여줄 뿐이다.

〈비발디와 나〉
〈비발디와 나〉

자신이 속해 있던 제도를 깨부수고 속박하던 감옥을 벗어난 체칠리아는 배를 타고 운하를 지나가며 어머니가 남긴 나침반이 그려진 카드 반쪽을 강물에 던진다. 누군가 찾아와 주기를 기다리는 것을 그만두는 행위. 방향을 남에게 맡기는 것을 끝내는 행위. 감추어져 있던 머리카락을 처음으로 드러내고, 부러진 팔을 안은 채 그녀는 걸어 나간다. 고관대작의 부인이 될 수 있었던 자리를 버려두고, 아무도 약속해 준 것 없는 미지의 세계로. 원래의 주인을 찾은 여성의 몸이 그 이후에 어떻게 될지, 굳이 영화는 말하지 않는다.

촬영현장의 다미아노 미킬레토 감독(왼)과 배우 테클라 인솔리아
촬영현장의 다미아노 미킬레토 감독(왼)과 배우 테클라 인솔리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여성의 얼굴을 누가 소유하는가를 묻고,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자기 몸을 사회에 더 이상 제공하지 않겠다는 급진적 철수를 그린다면, 〈비발디와 나〉는 그 두 지점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 아직 도망칠 수 없는 몸들이 음악을 통해 잠시나마 자신을 초월하는 순간. 탈출이 아닌 예술을 통한 초월. 그것이 가능한 유일한 형태의 자유였기에, 더욱 처연하다.

봄은 그저 꽃이 피는 계절이 아니다. 들리기만 했던 존재들이 마침내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김나희 음악평론가

영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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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희 평론가의 '비발디와 나' ① 봄, 혹은 들리기만 했던 존재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영화 〈비발디와 나〉의 원제는 《Primavera》, 이탈리아어로 봄이다. 비발디의 《사계》 중 첫 번째 협주곡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의 봄은 해방의 다른 말이다. 1968년 프라하의 봄, 1980년 서울의 봄, 2011년 아랍의 봄처럼, 억압의 시기 이후에 다가왔던 시간들. 오래 억눌린 것들이 다시 본래의 색을 되찾고 피어나는 순간들이다. 우리 모두는 어떤 식으로든 '봄'이 해방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영화 엔딩 크레딧과 함께 듣는 〈봄〉과 이 단어가 갖는 의미는 오랜 여운을 남긴다. ​18세기 초 베네치아,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는 버려진 소녀들을 거두고 교육시켜 탁월한 음악가로 길러냈다. 그녀들은 촘촘한 나무 격자 뒤에서, 존재를 감춘 상태로만 연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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