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촬영 현장은 기본적으로 공동작업장이다. 하나의 작품을 위해 모두를 함께 움직이게 하면서도, 선을 넘어 개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조율하는 건 감독들의 필수 능력이다. 감독들은 어떤 규칙을 가지고 촬영장을 운영해왔을까. 인터뷰를 통해 밝힌 여러 영화 촬영장의 규칙들을 모아봤다.


아역 배우와 함께 하는 성인분들에게

윤가은 감독, <우리집>

<우리집>의 촬영장 수칙

윤가은 감독의 신작 <우리집>은 (원래도 기대작이었지만) 개봉 전 ‘촬영 수칙’이 공개돼 이목을 모았다. <우리집>의 아역 배우들을 위한 성인 배우와 스태프끼리 공유된 규칙이었다. 총 아홉 가지 규칙들은 찬찬히 뜯어보면 단순히 ‘촬영장 규칙’이라기보다 실생활에서 성인들이 아이들에게 지켜줘야 할 예의, 행동들이 꼼꼼하게 적혀있음을 알 수 있다. ‘험한 말 금지’ 같은 상식적인 것은 물론이고, ‘칭찬은 아역 배우들의 외형이 아닌 태도나 노력에 초점을 맞춰줄 것’처럼 육아 교육에 어울릴 법한 중요한 부분도 포함됐다. 단편 <콩나물>, 첫 장편 <우리들>부터 아역 배우와 호흡을 맞춰온 윤가은 감독다운 세심함이 담겨있다. 정작 본인은 “촬영장에서 100% 지켜지지 않은 것 같아 부끄럽다”지만 그의 배려는 영화인뿐만 아니라 관객들도 감탄케 한다.

<우리집> 촬영장에서 아역 배우들과 대화 중인 윤가은 감독(왼쪽 사진 오른쪽, 오른쪽 사진 가운데)

불면 안되니까 시간 엄수

봉준호 감독, <기생충>

칸영화제 기자회견 당시 봉준호 감독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 현장에서 꼭 지켰다는 두 가지. 하나는 표준근로계약. 하나는 밥시간. 봉준호 감독은 “표준근로에 밥시간뿐만 아니라 촬영 시간도 맞춰져 있다”고 설명했지만, 뒤이어 “만두, 떡볶이, 면 등 타이밍을 놓치면 불게 되는 건 저도 민감하다”고 덧붙였다. 역시 디테일로 유명한 봉준호 감독답다. 사실 봉준호의 밥시간 엄수는 그의 오랜 파트너 송강호에게서 전해진 일화. <기생충> 칸영화제 기자회견 당시 송강호는 봉준호 감독에 대해 “딱 좋은 연기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준다”고 입을 열었다가 “무엇보다 밥때를 너무 잘 지킨다"라고 진담 섞인 농담을 더했다. 그간 수많은 촬영장을 오갔을 송강호가 <기생충> 촬영장의 ‘밥때’를 언급했으니, 봉준호의 밥시간 엄수가 꽤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칸영화제에서도 “배고픈데”라고 말하는 모습이 포착됐던 봉준호 감독

태도의 문제를 변화하는 것

백승화 감독, <걷기왕>

<걷기왕> 콘티북의 성희롱 예방 관련 수칙들

한국에서 미투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건 2016년 문학계 인사들의 성추행, 성폭행 사실 폭로가 기점이다. 이후 영화 촬영장에서도 성희롱 예방 교육이 여러 차례 진행됐는데, 이보다 먼저 성추행 예방 교육을 실시한 감독이 있다. <걷기왕>의 백승화 감독이다. <걷기왕>의 콘티북에는 성추행을 예방하는 생활수칙을 비롯해 성추행 피해자, 동료, 행위자에 대한 매뉴얼로 세심하게 적혀있다. 또한 촬영 전 스태프 대다수가 참여한 강의를 진행하며 한국영화계 최초 성희롱 예방 교육 실시 영화로 기록됐다. 백승화 감독은 “<걷기왕>을 공동 집필한 남순아 작가가 영화산업노조 홈페이지에서 성희롱 예방교육 프로그램을 발견하면서 실시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법적 효력을 바랐다기보다는 태도의 문제에 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씨네21’의 ‘영화계 내 성폭력 일곱 번째 대담’에 참석한 백승화 감독

모든 생명체, 사살 금지!

임순례 감독, <리틀 포레스트>

<리틀 포레스트> 사계절 풍광 포스터

도시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간 혜원(김태리)의 이야기를 그린 <리틀 포레스트>. 영화 속 자연친화적 슬로우 라이프를 그리기 위해 임순례 감독은 영화 촬영 또한 자연에 발맞춰 갔다. 먼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담기 위해 촬영을 한번에 몰아 하지 않았다. 계절에 맞는 장면을 촬영하고 잠시 휴식을 가진 후 계절이 변하면 다시 촬영에 들어가는 식. 영화 촬영이 일반적으로 3개월이면 끝나는데, <리틀 포레스트>는 실제로 1년 가까이 촬영을 지속했다. 그 덕에 꾸며내서는 얻을 수 없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세 주연 배우들의 훈훈한 케미스트리를 모두 담을 수 있었다.

더불어 임순례 감독은 <리틀 포레스트> 촬영장에 한 가지 수칙을 더했다. 바로 생명 보호. 동물보호단체의 대표이기도 한 임순례 감독은 현장의 모든 생명체를 절대 죽이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영화에 등장하는 송충이, 달팽이, 개구리 등은 촬영이 끝난 후 자연으로 되돌아가게 귀환시켜줬다. 심지어 야밤에 켠 조명에 꼬이는 벌레도 잡지 않았다는 일화를 들으면 현장 스태프들이 꽤 고생하면서 찍었을 모습이 자연스럽게 상상된다.

유기견 진원이는 임순례 감독이 영화에 등장하는 개, 오구의 성견 시절을 위해 데려왔고, 촬영 완료 후 <리틀 포레스트> PD가 입양했다.

OK, 방금 그장면 좋았어(소근소근)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이름 없는 총잡이이자 ‘더티 해리’ 해리 캘러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마초적인 남성의 상징이다. 하지만 감독으로서 현장을 지휘할 때만큼은 더없이 젠틀하고 과묵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스트우드 감독은 캐릭터와 유사한 배우를 캐스팅하고, 현장에서 그 본연의 성격을 이끌어내는 방식을 선호한다. 그래서 배우가 집중할 수 있게 소란스럽지 않은 촬영장 분위기를 조성하는 편. 오죽하면 본인도 OK, 컷 사인을 외치지 않고 수신호로 할 정도다. 메릴 스트립조차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과 주연을 맡은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만큼 조용한 촬영장은 경험한 적이 없다고 밝혔겠나. 대신 그런 자연스러운 연기를 위해 리허설을 빙자한 촬영을 진행하기도 해 배우들을 당황하게 만든다고도 한다.

광기를 위한 논리를 준비할 것

조지 밀러 감독,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조지 밀러 감독 앞(오른쪽에서 두번째)

SF 장르는 상상력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사례가 조지 밀러 감독. 조지 밀러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를 만들기 위해 스태프들에게 몇 가지 규칙을 전했다.

탈색한 듯한 색감의 다른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와 달리 시각적으로 컬러풀할 것.

영화 속 미술적인 부분은 최대한 아름다움을 유지할 것.

모든 물건은 종말 이후 어떻게 남겨졌는지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

그는 살아남은 인류 또한 우리처럼 탐미적이고, 논리적일 것이라는 사실성을 부여해 그들의 세계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그는 이런 세상에서 인간은 광기와 광란이 발현될 것이므로 영화의 핵심은 히스테릭한 유머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매드맥스>의 세계는 시각적으로 아름답지만 전체적으로 광기가 서려있는 역설적인 형태로 완성됐다. 조지 밀러의 지침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가 상상력만으로 채워지는 게 아니라는 대표 사례라 할 수 있다.

조지 밀러 감독의 미소에서 만족감이 느껴진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