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 그러면 이렇게 설명해볼게. 마지막으로 아카데미상에 노미네이트된 결합쌍생아 배우가 누구였어?”
고향인 마사스 빈야드를 떠나 할리우드에서 배우의 삶에 도전해보겠다는 쌍둥이 형 월트(그렉 키니어)를 만류하던 밥(맷 데이먼)은, 끝내 자신들의 신체적 조건을 꺼낸다. 밥과 월트는 흔히 ‘샴 쌍둥이’로 불리는 결합쌍생아로 태어났다. 옆구리 22cm가 붙은 채 간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밥과 월트는, 그런 자신들을 평생 지켜본 마사스 빈야드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씩 편견을 극복해 왔다. 형제는 야구부터 복싱, 미식축구, 골프, 아이스 하키 등 다양한 스포츠에 도전했고, 찰떡 같은 호흡으로 ‘주문하면 3분 안에 나오는’ 햄버거 가게도 운영하고 있다. 어린 시절엔 ‘괴물’이라고 놀리는 또래 아이들의 괴롭힘도 당했지만, 이제는 온 동네 사람들을 우군으로 포섭하는데 성공했다.
그런 마사스 빈야드 사람들을 대상으로 아마추어 연극배우로 살아가는 건, 앞으로도 가능한 일일 것이다. 월트는 이미 6년째 매년 마을회관에서 연극을 올리고 있고, 무대공포증이 심각한 밥 또한 월트의 꿈을 지원하기 위해 그 무대 위에 함께 서 왔으니까. 게다가 마사스 빈야드 사람들은 검은 옷을 입은 밥을 시야에서 지우고 오직 월트의 연기만 감상하는 훈련이 끝난 관중들이다. 하지만 할리우드에서라면 그건 또 이야기가 다르다. 월트가 맡을 수 있는 배역에도 분명 한계가 있을 것이고, 다른 걸 다 떠나서 누가 결합쌍생아 배우를 진지하게 바라보겠는가? 밥은 월트의 도전이 무모하다고 생각한다. 고향 사람들이 아니라 생판 남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보일까?
"잠깐, 잠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한테서 그런 이야기를 듣다니. 그거 우리가 평생 들었던 이야기 아니야? 보통 사람들이 하는 건 못할 거라는 이야기. 그런데 우리가 언제는 그런 거에 멈춘 적 있었어?”
간의 대부분을 밥에게 의존하는 탓에 밥보다 빨리 늙고 있는 월트는 밥에게 애원한다. 왜 남들이 편견을 가지고 던지던 질문을 네가 하고 있냐고, 우리가 늘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의 편견과 맞부딪쳐보자고, 내게 시간이 남아있을 때 도전을 해보자고. 월트의 애원에 밥은 마지못해 승락을 한다. 달라붙은 옆구리를 딱 붙인 채, 팔짱을 끼고 발걸음을 맞춰 앞으로 달리면서.
바비 패럴리와 피터 패럴리 형제는 자신들이 제작하는 영화에 소수자들을 즐겨 등장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대표작 〈덤 앤 더머〉(1994)부터가 지적으로 경계선상에 놓인 주인공들을 등장시킨 로드무비였고,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2000)는 보편적인 외모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패럴리 형제는 장애인 캐릭터와 장애인 배우들을 자주 등장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2020년에는 러더만 재단으로부터 모튼 E. 러더만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영화 〈붙어야 산다〉(2003)는, 그런 패럴리 형제가 만든 작품 중 (피터 패럴리가 총 제작자로 참여한 다큐멘터리 〈샘과 매티, 좀비 영화를 만들다〉(2021)를 제외하면) ’장애’와 ‘정상성’이라는 주제를 가장 정면으로 바라본 영화다. 비장애인들 중에서도 외모적으로 수려한 사람들 중심으로 기회가 배분되는 할리우드 스타 시스템 안에서, 결합쌍생아인 채로 평생을 살아온 밥과 월트의 육체는 끊임없는 조롱의 대상이 된다. 오디션을 보러 갈 때면 “이거 누가 생각해 낸 몰래카메라냐”는 이야기를 듣고, 기껏 고용한 에이전트 모티(시모어 카셀)는 밥과 월트를 삼류 포르노 영화에 출연시키려고 든다.
탑스타 셰어(셰어가 자기 자신을 연기했다)와 제작사의 신경전 속에 얼떨결에 미 전역에 방영되는 드라마 주연으로 캐스팅된 월트는, 적절한 화면 프레이밍과 블루 스크린의 힘을 빌어 자신의 재능을 증명해 보인다. 하지만 밥과 월트가 결합쌍생아라는 사실이 들통난 이후 상황은 조금 달라진다. 당당하게 그 사실을 밝히고 나선 덕분에 배우 생활을 지속할 수는 있었으나, 자신들을 바라보는 비장애인들의 시선이 예전 같지 않아진 것이다. 형제가 함께 출연하는 광고나 토크쇼에서는 두 사람의 신체적 조건을 이용한 농담만이 부각된다. 비장애인들은 두 사람을 농담거리로 활용하며 키득거린다. 무엇보다, 밥이 용케도 숨겨왔던 결합쌍생아 사실을 알게 된 밥의 여자친구 메이(웬 얀 쉬)가 당황해서 밥을 떠난다. 월트는 형제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분리수술을 받아야겠다고 결심한다. 비록 수술 중 죽을 확률은 월트 자신이 더 높다 하더라도.
정상성이 지배하는 세계 안에서, 보편의 기준에서 벗어난 육체는 쉽게 배척의 대상이 되거나 개량, 개조의 대상이 된다. 뚱뚱한 사람은 생활습관 개선을 통한 체형 교정을 요구받고, 키가 작은 아이들은 성장판 주사를 맞거나 키 크는 데 도움이 되는 영양제를 먹는다. 보편적인 미적 기준에서 벗어난 외모를 지닌 사람들은 성형수술 제안을 받고, 신체 중 일부분이 결손된 사람들은 (그것이 실제 기능을 못하더라도) 심미적인 목적으로 신체보조장구를 착용하기도 한다. 자존감도 존엄도 사회적인 존중도, 어떻게든 ‘정상’ 범주 안으로 들어와야 비로소 지켜낼 수 있다는 이 무언의 압박은 우리 모두를 옭아맨다. 비장애인들도 그런데, 장애인들은 어떠하랴.
기어코 분리수술을 받은 밥과 월트는 이제 정상성을 획득했으니 행복해질까? 〈붙어야 산다〉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서로에게 기대어 살던 것에 익숙한 밥과 월트가 혼자 서서 균형을 잡고 걸을 수 있게 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고, 두 사람의 찰떡호흡으로 해치우던 그 많은 일들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비장애인들이 정해놓은 정상성의 세계 안에 편입되진 못할지언정, 두 사람은 두 사람만의 호흡과 방식으로 행복해지는 길을 찾았더랬다. 그러나 정상성의 세계에 편입되기 위해 분리수술을 한 순간 그 유니크한 행복의 길도 함께 일그러졌다. 월트는 울면서 밥을 그리워한다.
그래서 육체적으로는 분리되었으나 생활적으로는 여전히 붙어 살기를 선택하는 ‘따로, 또 같이’의 길을 선택하는 〈붙어야 산다〉의 결말은 얼핏 타협 같지만 사실은 선언에 가깝다. 세상이 강요하는 정상성의 모델을 따라 걸어야만 행복해지는 건 아니라고,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괴짜라고 생각하고 괴물이라고 손가락질을 한다 하더라도, 내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지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는 법이라고. 협소한 틀 안에 나를 가두지 말라고.
때로 정상성을 강요하는 세상이 갑갑할 때 나는 〈붙어야 산다〉를 다시 꺼내어 본다. 비록 흥행도 평단의 반응도 미적지근한 작품이었지만, 그 세계 안에는 마냥 보편의 기준을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밥과 월트가 있으니까.
이승한 TV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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