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는 수많은 방법으로 뉴스를 주고받을 수 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뉴스는 다름 아닌 연예계, 연예인의 사건사고다. 연예인의 신비주의가 깨진 지금도 그런데, 스타라는 이름에 치장한 고전 할리우드 스타들은 얼마나 사건 사고에 민감했을까. 고전 할리우드 배우들의 이미지를 산산조각 낸, 혹은 그 스타를 잊히게 만든 사고들을 정리해봤다.
뜨거운 사랑? 최악의 불륜?
엘리자베스 테일러, 에디 피셔의 결혼
“세기의 미녀”. 미인들이 즐비한 할리우드에서 이 칭호를 부여받은 엘리자베스 테일러. <젊은이의 양지>, <자이언트> 등 연기와 흥행 모두 거머쥔 최고의 배우. 하지만 그에게 단 하나 단점이 있었으니, 남성 편력이었다. 살아생전 결혼을 8번 했는데, 그중에서도 4번째 남편, 에디 피셔와의 결혼은 모든 사람의 비난을 받았다. 왜? 에디 피셔는 친구의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영화 제작자 마이크 토드와 결혼했다. 1년 후, 마이크 토드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실의에 빠진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친구 데비 레이놀즈와 그의 남편이자 마이크 토드의 친구 가수 에디 피셔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위로해줬다. 마이크 토드가 사망하고 1년 후, 에디 피셔가 데비 레이놀즈와 이혼하고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결혼했다. 제아무리 결혼과 이혼이 빈번한 할리우드여도 이 결혼은 대중들을 경악게 했다. 결과적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친구의 남편과 바람을 피운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의 배우가 다른 배우의 가수 남편을 빼앗았다. 이 결혼이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켰는지, 교황청까지 이 사건에 대해 직접 비난했을 정도다. 에디 피셔도 여성 편력이 엄청났던 사람이지만, 당시 사회 관념상 친구 남편과 결혼한 여성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더 많은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았으니,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클레오파트라> 촬영 이후 에디 피셔와 이혼, 리차드 버튼과 결혼했다. 대중들은 도리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이런 구설수에도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비밀> 등으로 탄탄한 필모그래피를 이어가 여전히 훌륭한 배우로 언급되고 있지만, 적어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데비 레이놀즈는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세상을 뜨기 전, 직접 만나서 용서해주었다고 한다.
유일한 이탈리아어 ‘띠아모’
잉그리드 버그만과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만남
5개 국어 구사, 훤칠한 미모, 탁월한 연기 감각, 명장들이 선택한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은 아름답고 완벽한 여성 배우의 대표주자였다. <카사블랑카>를 기점으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가스등>, <잔 다르크> 등으로 이어진 그의 출연작은 이름도 제대로 읽기 힘든 스웨덴 배우를 미국 영화의 얼굴로 만들었다. 그러나 할리우드가, 미국 국민들이 사랑한 배우는 한동안 미국 땅을 밟을 수 없었다. 이 사랑 고백 때문에.
“이탈리아어는 오직 ‘띠아모(당신을 사랑해)’만 알고 있는 배우인데요, 저는 당신과 함께 일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갈 준비가 돼 있습니다. 잉그리드 버그먼.”출처 씨네21
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가 받은 편지의 일부다. 두 사람은 이 편지를 시작으로 틈틈이 만났다. 예술 영화의 선봉장과 할리우드 최고 스타의 만남은 버그만이 <스트롬볼리> 촬영을 위해 이탈리아로 가면서 구설수에 올랐다. 감독이랑 배우랑 사랑하는 게 그렇게 비난받을 일이야? 그럴 일은 아니다. 둘 다 기혼자가 아니었다면. 로베르토 로셀리니도, 잉그리드 버그만도 가정이 있었다. 심지어 자녀도 있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결코 환영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버그만과 자주 작업한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대놓고 “다시는 (버그만과) 만나지 않겠다”고 말한 일화는 당시 미국 대중들이 느꼈을 배신감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잉그리드 버그만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로셀리니와 함께한 <스트롬볼리>, <유로파>, <이탈리아 여행>, <시아모 돈>, <불안> 다섯 편의 영화는 (예술영화답게) 흥행 실패에도 비평적 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자신을 전적으로 믿어준 아나톨 리트박 감독 덕분에 <아나스타샤>에 캐스팅돼 할리우드에 복귀할 수 있었다. 모두가 비난한 불륜은 버그만이 유럽 영화계와 미국 영화계 모두 휩쓴 독특한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진 분수령이었다.
침묵으로 지킨 사랑
클라크 게이블, 로레타 영의 숨겨진 딸
분명 불륜이었는데, 많은 이들에게 연민을 산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클라크 게이블과 로레타 영은 <야성의 부름>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다. 쭉 읽어온 독자라면 예상하겠지만, 클라크 게이블은 당시 기혼자였다. 하지만 로레타 영과의 밀회를 즐겼고, 로레타 영은 결국 게이블의 아이를 가졌다. 로레타는 클라크 게이블이 이혼하고 자신과 결혼하지 않을 거라 확신하고 미국을 떠나 이탈리아에서 아이를 출산했다.
로레타 영은 클라크 게이블이 자신에게 돌아오든, 아니든 아이를 키우고 싶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아이가 생기면 언론에서 물어뜯을 것이 뻔했기에 계획을 세웠다. 아이를 고아원에 보낸 후 다시 입양해오는 방식이었다. 로레타 영은 이런 방법으로 생부에 대한 비밀과 언론의 집요한 호기심으로부터 아이를 지켰다. 로레타 영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야 딸 루이스 영의 생부가 클라크 게이블임을 대중들에게 밝혔다. 루이스 영 본인은 31살에야 생부가 누군지 어머니가 알려줬다고 밝혔다. 클라크 게이블이야 로레타 영의 비밀 엄수 덕분에 생전에 비난받는 걸 피했으니 억울해도 별 수 없고.
사랑보다 더 무서운 우정 파괴
클라라 바우 vs. 데이지 데보
계속 사랑 얘기를 해왔는데, 사랑보다 더 치열한 다툼도 있다. 무성 시대 최고 스타 클라라 바우와 그의 비서 데이지 데보와의 법정 싸움이었다. 바우가 헤어드레서인 데보를 자신의 전속 비서로 고용할 만큼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였다. 일이 없을 때면 함께 시간을 보낼 정도였다. 그러나 클라라 바우가 럭스 벨이란 남자를 만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럭스는 연인인 클라라 바우에게 사업 투자를 권유했고, 데보는 바우가 럭스의 말에 넘어가지 못하게 말리곤 했다. 결국 두 사람은 점점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데보는 겁이 났다. 상대는 당대 최고의 배우 중 한 명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바우가 자신을 해고해버리면 그냥 버려지는 신세. 그래서 데보는 클라라 바우의 자산에 관한 서류를 숨겼다. 그리고 숨긴 서류의 대가로 12만 5천 달러를 요구했다. 럭스 벨은 데이지 데보가 클라라 바우를 협박했다고 신고했고, 데보는 체포돼 법정에 섰다. 궁지에 몰린 데보는 바우에 대한 악의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바우가 문란한 성생활을 즐긴다는 둥, 알콜중독자라는 둥 수많은 말을 법정에서 내뱉었고, 이 말들은 언론을 타고 대중들에게 퍼져나갔다.
결과적으로 데보는 패소했고, 보석금을 낼 때까지 징역살이를 했다. 하지만 인생이, 명예가 완전히 무너진 쪽은 바우였다. 측근인 데보의 입에서 퍼진 악성 루머들은 검증되지 않은 채 많은 이들의 상상력이 더해져 기정사실화되고 말았다. 바우는 배우를 은퇴하고 럭스 벨과 결혼했지만, 행복하지 못했다.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자살 시도도 했으며, 끝내 럭스 벨과도 이혼했다. 무성 영화 시대 섹슈얼리티의 상징이었던 배우는 그렇게 쓸쓸하게 자신의 인생을 견뎌야만 했다.
다시는 재기하지 못한 코미디 배우
로스코 아버클의 성폭행 의혹
누명이라면 이쪽도 만만치 않다. ‘뚱보’란 별명으로 활동한 로스코 아버클은 코미디 영화의 대부다. 찰리 채플린도, 버스터 키튼도 그와의 협업을 거쳐 스타로 거듭났으니 감히 코미디계의 거장이라 해도 아깝지 않은 배우였다. 물론 그에게도 치명적인 흠이 있었다. 술과 여자를 밝힌다는 거였다. 파티를 열어 며칠을 만취한 채 사는 게 일상이었던 그는 자신의 파티에 참석한 배우 버지니아 레이프의 사망으로 인생의 위기를 맞이했다.
지금은 버지니아가 완전히 만취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르핀 주사만 맞다가 사망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당시 현장에 있던 뱀비라 모드 델몬트가 “아버클이 레이프를 성폭행했다”고 증언하며 그가 살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때부터 사건의 모든 관심은 로스코 아버클에게 향했다. 대중들에게 웃음을 안겨주는 코미디 배우, 뒤에선 여자를 성폭행하고 죽인 살인마. 대중들의 배신감은 날로 커져갔다.
사건은 마침내 아버클이 무죄를 선고받으며 막을 내렸다. 그러나 대중들은 그가 방탕하고 거만한 사고뭉치라는 시선을 여전히 거두지 않았다. 어떻게든 배우로 복귀하고 싶었던 아버클은 ‘윌리엄 굿리치’라는 예명까지 사용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로스코 아버클은 다시 장편 영화 주연을 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촬영이 들어가기 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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