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몸의 언어로 관객을 업어 데려다주는 영화” 〈봄밤〉 한예리, 김설진 배우

씨네플레이 이화정 객원기자


〈봄날〉 김설진(왼), 한예리 배우(사진제공=(주)시네마달)
〈봄날〉 김설진(왼), 한예리 배우(사진제공=(주)시네마달)

당신의 심장을 움켜쥘 아주 독특한 영화가 도착했다. 강미자 감독의 <봄밤>은 서정적 제목 안에 숨어든 칼날 같은 고통의 시간을 기술하는 영화다. 아니, 그 고통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 만이 찾을 수 있는 환희의 시간을 기술하는 영화다. 권여선 작가의 「안녕 주정뱅이」에 수록된 단편 「봄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각자의 인생에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중년의 남녀가 첫눈에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고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여자는 알코올 중독이고 남자는 류머티즘 관절염, 더 이상 “살아갈 길은 없”어 보이는 둘은 포기해야 할 그 순간 “죽을 길은 있어”라는 마음에 함께이길 택했다.

<봄밤>은 겨울의 찬 기운에도 기어이 고개를 내밀어 뺨에 다가오는 봄바람의 온도를 머금은, 절망의 끝 잠시 찾아온 둘 사이의 에너지를 놓치지 않고 잡아 가장 완벽한 두 사람의 사랑의 형태로 변환해 주는 기운을 가진 영화다. 상대에게 강요하지도, 교정하려 들지 않고 묵묵히 서로를 받아들여 주는 이 사랑은 금세 빠져들었다가 상대를 나에게 맞추려 안달하는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분명 사라진 연애다. 그토록 ‘올드패션’에 가까운 낯선 속도와 호흡을 담기 위해 이 영화가 택한 방식은 다소 급진적이고 실험적이다. 거두절미, 감정보다 더 앞서 그들은 동거를 택했고 백 마디 말에 앞서 서로의 몸에 기대고 감각한다. 수환(김설진)의 등에 업힌 영경(한예리)이 술에 취해 간절하게 읊는 시는 스크린의 적막한 공기를 뚫고 고스란히 관객의 귀에 가닿고, 언어와 내러티브로 도착하지 못할 감각의 공간으로 관객을 ‘업어’ 데려다준다.

〈봄날〉 한예리 배우(사진제공=(주)시네마달)
〈봄날〉 한예리 배우(사진제공=(주)시네마달)
〈봄날〉 김설진 배우(사진제공=(주)시네마달)
〈봄날〉 김설진 배우(사진제공=(주)시네마달)

감각의 언어로 흐트러짐 없이 꽉 채워진 67분의 러닝타임. 한예리와 김설진은 짧지만 압축적인 영경과 수환의 사랑, 감정의 결을 끌어와 봄밤의 정서를 완성하는 주역이다. 스토리를 친절하게 설명해 줄 대사에 기대지 않고 몸의 표현, 동작의 흐름에 몰두한 연기로 호흡하는 두 배우은 스크린이 아닌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춤사위이자, 때로는 미술관에서 보는 회화의 한 장면을 응시하는 듯한 감흥을 안겨 준다. 세밀한 연기로 날선 감정을 포착해 온 한예리뿐만 아니라, Mnet <댄싱 9>으로 존재감을 알리며 안무가를 넘어서 넷플릭스 시리즈 <스위트홈>, tvN 드라마 <빈센조> 등을 통해 꾸준히 연기자로 영역을 확장해온 김설진. 둘은 사실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에서 함께 춤을 전공한 동기로 함께 한 영화는 이번이 처음. 몸으로 표현하는 감정에 특화된 두 배우의 강점이 고스란히 영경과 수환의 언어가 된 경우다.

<봄밤>은 작년 베를린국제영화제 초청, 부산국제영화제 초청,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회 특별상 수상 후 올 무주산골영화제 뉴비전상을 수상하며 영화의 색다른 표현 방법에 호평을 얻은 작품으로 오는 7월 9일 개봉한다. 시사가 끝난 후 두 배우를 만나 영화의 시작부터 작업의 과정을 들어 보았다.


〈봄날〉 포스터
〈봄날〉 포스터

<봄밤>에 합류하게 된 과정을 먼저 들어보고 싶어요. 아무래도 강미자 감독과의 전작으로 이어진 인연으로 한예리 배우에게 제안이 먼저 오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한예리 제가 2008년에 강미자 감독님과 함께 <푸른 강은 흘러라>를 찍었고, 오랜만에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그 영화를 다시 상영하고 싶어서 감독님께 연락을 드렸어요. 그 이후 감독님께서 새로운 시나리오가 있는데 봐줄 수 있냐고 하시더라고요. 감독님께서 한동안 영화를 더 이상 찍고 싶은 마음이 안 드셨다가, 지금 오랜만에 구상하고 있는 작품이 있다고 하셨죠. 그 작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다는 말씀도 하셨고요. 그 얘기를 듣고 나니까 제가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그럼 내가 이걸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작을 감독님과 했으니, 어쩌면 마무리도 함께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을까 싶었죠.

미니멀한 형식 안에 고통을 체화한 인물을 온전히 표현한다는 것, 선뜻 도전하기 쉽지 않은 역할이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한예리 감독님께서 작품 쓰실 때부터 이 영화는 드라마가 있거나 스토리가 있는 보통 작품들과 다른데, 그걸 온전히 표현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아무리 궁리해 봐도 나에게는 예리 너밖에 없다, 너를 염두에 두고 썼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너무 어려운 역할이었어요. 압축적으로 모든 어려움이 몰려 있어서, 솔직히 ‘몸이 부서지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도 감독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용기를 냈어요. ‘어차피 할 거라면 제대로 해보자’는 마음으로요.

〈봄날〉
〈봄날〉

상대 역인 수환은 그때 캐스팅 전이었죠? 예리씨의 의견이 캐스팅에 반영되지 않았을까 생각되는데요.

한예리 감독님께서도 처음에는 ‘누구를 떠올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이 영화는 개런티도 부족하고 스태프도 거의 없죠. 저희 스태프가 다섯 명 밖에 없었어요. 심지어 살도 빼야 하죠. 그런데도 몸은 잘 써야 하죠. 또 연기도 잘해야 해요. 그리고 저와 호흡도 좋아야 하고... 조건이 너무 많고 정말 까다로웠어요. 이걸 누가 한다고 할까.(웃음) 그래서 고민하다가 제가 (김설진) 오빠를 떠올리고 시나리오를 드렸어요. 솔직하게 모든 상황을 말씀드렸는데 오빠가 너무 흔쾌히 같이 하겠다고 해주셨어요. 정말 고마웠죠.

김설진 시나리오를 보고 처음 읽었을 때는 같은 장면이 여러 번 나오길래 프린트가 잘못됐나, 이거 혹시 오타인가 했는데 아닌 거예요. 그 둘의 사랑 얘기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끄적거리면서 그날 한 번에 시나리오를 다 읽었어요. 근데 결국엔 받아들인 게 아니고 약간 스며든 것 같아요.

김설진 배우는 독립영화계에서는 굉장히 낯선 이름일 수 있는데요. 많은 배우들 중에 김설진 배우를 수환으로, 상대 배역으로 떠올린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한예리 체력적인 부분이 가장 컸어요. 이 영화는 감량도 해야 하고, 감량한 몸으로도 몸을 잘 써야 했어요. 이게 곧 에너지가 좋아야 한다는 말이에요. 버티는 에너지가 좋아야 하죠. 수환이라는 인물은 제가 보기엔 ‘바위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오빠는 무용 트레이닝을 오래 해왔던 사람이라, 체력적으로 이 배역을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촬영을 하다가 체력적으로 무너진다면 멘탈도 흔들릴 수 있잖아요. 그러면 영경도 같이 무너질 수 있어서, 저는 그게 정말 무서웠어요. 그걸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오빠밖에 없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렇게까지 몸을 밀어붙여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봄날〉
〈봄날〉

예리 배우의 추천으로 수환 역을 제안받았는데요. 거의 이 정도면 제물로 바쳐진 것 같은데요. (웃음)

김설진 예리가 저한테 시나리오를 건넸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좋았어요. 학교에서 작업 한 이후로 오랜만에 함께 작업하는 거였어요. 평소에 자주 만나서 이야기는 나눴지만, 실제로 함께 작품을 하는 건 오랜만이었거든요. 게다가 춤이 아니라 ‘연기’로 같이 작업하는 거니까 정말 영광스러웠죠.

두 분 모두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출신이신데요. 두 분의 만남은 학교 때로 거슬러 올라가죠?

한예리 네, 저와 대학 동기예요. 그 사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런 궁금증도 있었어요.

김설진 2003년도 정도니 오랜 시간이 흘렀네요. 그때 제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예리를 바라봤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의 예리와 겹쳐지면서 긴 시간이 흘렀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다시 만났을 때 어색한 것 하나 없이 너무 자연스럽게 작업에 들어갔어요. 뭔가 시간이 뚝 건너뛴 것처럼요.

〈봄날〉
〈봄날〉

춤으로 만났지만, 근 20년 사이 연기를 하는 배우로서 각자의 자리에서 활동해 왔는데요. 서로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나요.

한예리 저는 오빠가 연극이나 다른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걸 자주 봤어요. 항상 느꼈던 건, 몸을 써온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움직이는 감각이 있다는 거예요. 오빠는 그게 너무 자연스러워요. 그리고 그 이후에 꼭 다시 ‘내가 왜 그렇게 움직였지?’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는 점이 인상 깊었어요. 그게 배우로서 굉장히 중요한 자세라고 생각해요. 안무를 했던 경험 덕분에 서사를 찾고 인물에 대한 탐구를 하고 감정의 층위를 만드는 능력이 뛰어나세요. 철학과 사유가 있는 연기를 한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김설진 예리가 연기를 하는 걸 보면서 이 친구는 유연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계속 자기 심지를 단단하게 만드는 사람이구나 그래서 궁금했어요. 한번은 예리가 무용 솔로를 하는 작품을 보고 나서 만나서 수다를 나눴는데 예리는 저한테 무용을 물어보고 저는 예리한테 연기를 물어봤던 기억이 나요. 나도 연기를 하고 싶다 그런 생각을 그때 했던 것 같아요. 옆에서 본 예리는 굉장히 예민한 촉각을 가진 배우라고 생각해요. 마치 몸에 난 솜털로 신호를 감지하듯이, 누군가의 불편함이나 감정의 미묘한 변화를 빠르게 알아채는 그런 민감함이 있어요. 그래서 절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사람 중에 한 명이거든요. 그게 공기로 느껴지니까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깊은 교감이 가능했던 것 같아요.

〈봄날〉
〈봄날〉

같은 작품에서 연기로 교감하셨는데요. 한예리 배우는 워낙 스크린 경험이 많아서 함께 작업하는 데 있어서 한편으로 긴장과 부담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김설진 좀 다른 감정이 컸는데요. 잘 보이려고 했던 게 아니어서 긴장이나 부담이 아니었고 설렘이었어요. 어떻게 하면 영경을 잘 볼 수 있을까, 영경에게 잘 해줄 수 있을까 고민을 하고 현장에 갔는데, 도착하니 그곳에 이미 영경이 있었어요. 저는 너무 편하게 나는 그냥 영경만 보면 되겠다라는 생각으로 작업을 할 수 있었죠. 책임져야 하는 장면이 정말 많은 작업이었는데요. 촬영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버티는 예리를 보면서 정말 많이 배웠어요.

작품 안으로 들어가, 두 분이 연기한 캐릭터가 어떤 인물인지, 또 둘의 관계를 먼저 파악해 볼게요. 두 배우의 호흡이 이 영화에 절대적인 요소였어요. 등장인물이 거의 없는 이 영화에서 영경과 수환의 관계, 인생의 마지막에 다다른 둘의 관계가 영화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데요. 영경과 수환의 관계를 두 분은 어떻게 해석하셨나요. 서로를 바꾸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은데 이 커플은 그걸 해내죠.

한예리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사랑 이야기’라고 느꼈어요. 영경에게는 이 시간이 굉장히 오랜만에 찾아온 너무 행복한 시간이에요. 누구한테도 그런 사랑을 받지 못했던 사람이 수환에게서 절대적인 애정과 믿음을 받는 순간들이니까요. 그게 핵심이라고 생각했어요. 이게 단지 힘든 상황의 이야기로만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는 영경의 입장에서 이건 이 둘의 온전한 사랑이야기이고, 나는 그것에 집중하자. 초점을 맞추자. 그들의 관계를 절실하고 뜨거운 사랑이라고 받아들였어요.

〈봄날〉 김설진(왼), 한예리 배우(사진제공=(주)시네마달)
〈봄날〉 김설진(왼), 한예리 배우(사진제공=(주)시네마달)
〈봄날〉 한예리 배우(사진제공=(주)시네마달)
〈봄날〉 한예리 배우(사진제공=(주)시네마달)

첫 만남에 서로를 알아보고 거두절미 직진하는 관계죠. 영경이 “수환이, 옥탑방 정리하고 내 아파트로 들어와” 하고 말하는 단도직입적인 구애도 인상적인데요.

한예리 네, 확 찍었죠. (웃음) 심지어 같이 살자고 제가 먼저 얘기하면서 둘의 관계가 진전되죠.

김설진 요즘은 상대방을 바꾸지 않고 온전하게 있는 그대로를 안아줄 수 있는 관계를 보기 힘든 것 같아요. 자기한테 혹은 어떤 다른 잣대에 맞추려 하죠. 누군가 원하는 모습으로 상대가 바꿔가기만을 원해요. 그런데 영경과 수환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걸 택해요. 그래서 시나리오를 처음 볼 때는 좀 당황했어요. 가진 것도 없고 상황도 안 좋은데, 영경이 먼저 “같이 살자”고 제안하는 게 ‘너무 무모한 거 아니야?’ 싶었거든요. 그런데 여러 번 대본을 읽으면서 이해됐어요. 이 사람들은 서로 기대고 있지 않으면 무너져버릴 만큼 아슬아슬한 상태였던 거예요. 하나라도 빠지면 무너지는 카드 집처럼, 간신히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고 있었던 거죠.

영경이 둘 관계를 보다 적극적으로 이끌어 나간다면 수환은 그런 영경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따라주는데요. 역시 강요를 하지 않는 존재로 영경에게 편안함을 주는 상대인데요.

김설진 맞아요. 수환은 굉장히 많은 경험을 했고, 배신도 당하고, 위축된 채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 그가 처음 친구 결혼식 뒤풀이에서 만나나 꿋꿋이 술 마시고 있는 자유로운 영경을 보고, 저 사람은 누구인가 첫눈에 사로잡혔을 거예요. 수환에게 영경은 훨훨 나는 새처럼 보였을 거예요.

한예리 영경한테는 그냥 이 방법밖에는 없는 거예요. 둘이 그래도 조금이라도 뭔가 삶을 유지하거나 마무리를 하기 위해서는 방법이 없는 거죠. 선택권이 없는 거고 그렇게 해야지만 그래도 하루라도 더 보고 살 수 있는 거고 그래서 둘의 만남이 필연적이었던 것 같아요.

〈봄날〉
〈봄날〉

사실상 이 영화는 어찌 보면 굉장히 불친절할 수 있는 전개인데요. 캐릭터가 내러티브 안에서 움직인다기보다, 마치 회화나 무용의 장면 안에서 상징적으로 현실의 고통을 표현하고 있는 느낌이 들게 만드는 작품인데요. 배우들에게는 이 작업에 매료된 이유가 여기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한예리 감독님과 리딩을 하면서 이 세계는 현실이 아니라, 그냥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설정을 갖고 출발했어요. 그래서 너무 현실적인 디테일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영경과 수환, 이 둘만의 고유한 모드가 존재한다고 느꼈어요. 감독님께서 영경과 수환의 고통이 관객에게 너무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않기를 바라셨어요. 그래서 거리감을 두고 지켜보는 형식을 선택하신 것 같아요. 클로즈업도 거의 없고요. 감정에 개입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저 바라보게 만드는 방식이었죠.

김설진 그래서 앵글도 회화적으로 접근하셨던 것 같아요. 영화를 보면서 당연히 기대할 만한 클로즈업이나 무빙이 거의 없더라고요. 그게 오히려 미술관에서 회화 한 점을 응시하듯 느리게 바라보게 만든다는 느낌이었어요.

한예리 무엇보다 감독님이 영경과 수환의 고통을 관객이 직접적으로 느끼도록 강요하고 싶지 않아 하셨어요. 감정에 몰입시키기보다는 일정 거리에서 지켜보게 만들고 싶어 하셨죠. 저도 감독님께 클로즈업이나 감정 안으로 깊게 들어가는 촬영은 지양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었어요. 영경은 우는 장면이 많았기 때문에, 그걸 클로즈업으로 계속 보여주면 오히려 관객이 지칠 수 있거든요.

다른 표현 방식을 가진 영화라 작업을 하면서 <봄밤>의 영화적 언어에 대해서 배우들의 체험도 남달랐을 것 같아요. 다른 작품과 비교를 해볼 때 어떤 점이 가장 와닿던가요. .

한예리 시간의 흐름이 느껴졌던 부분이 인상 깊었어요. 특히 장면이 암전 되며 ‘툭’ 끊길 때, 처음엔 그게 효과적으로 느껴질까 걱정했거든요. 너무 급작스럽게 느껴지지 않을까 싶어서요. 일반적으로는 그런 장면을 한 번 정도만 쓰잖아요. 근데 이 영화에는 두세 번씩 반복되니까, 관객들이 당혹스러워하면 어쩌나 걱정했죠. 그런데 막상 보니까 그게 시간의 경과처럼 느껴져서 괜찮았어요. 그리고 원래 시나리오에는 영경과 수환이 만난 뒤 이어지는 장면이 더 있었는데, 감독님이 과감히 덜어내셨어요. 완성된 영화를 보고 나니 그게 너무 좋았어요. 필요 없는 설명을 빼고 더 압축적으로 만든 선택이 굉장히 멋졌고, 감독님의 절제력이 느껴졌어요.

김설진 이렇게 과감하게 고정된 앵글로 간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어요. 지금 한국 영화에서 그걸 선택할 수 있다는 건 감독님의 큰 용기라고 생각했어요. 일반적으로 클로즈업이나 카메라 무빙이 있을 법한데, 이 영화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어요. 회화적인 앵글로 설계된 장면들을 보면서, 우리가 오히려 너무 빨리 지나가는 영상에 익숙해져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어요. 최근에 영화를 보던 내 모습이 생각나더라고요. ‘왜 나는 이 장면을 빨리 넘기고 싶어 했을까?’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더라고요.

〈봄날〉 김설진 배우(사진제공=(주)시네마달)
〈봄날〉 김설진 배우(사진제공=(주)시네마달)

마치 고통으로 춤을 추는 듯한 장면들이 캐릭터들이 가진 상황을 스크린 밖으로 전달해 주는데요. 무엇보다도 촬영 전 이미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망가진’ 영경과 수환의 모습을 완성하고 임해야 했는데요. 상당한 준비가 필요했을 것 같아요.

한예리 살 빼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살을 정말 많이 뺐어요. 우리는 분장도, 의상 담당도 따로 없는 현장이었어요. 감독님도 “진짜 빼달라”고 영경이 ‘말라서 아파 보였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저는 거의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다가 물 마시는 장면을 찍었고, 오빠는 또 드라마도 병행하면서 살을 빼야 했기 때문에 진짜 힘들었죠. 한 번에 내리 찍으면 좋은데 계절감을 담아야 했고, 제주도 현장으로 내려가는 일정 등을 고려하다보니 중간중간 한 달 정도 촬영이 없는 기간이 힘들었죠.

김설진 저는 그때 드라마 <세자가 사라졌다>도 병행하고 있어서 드라마 현장이 지방이었는데 왔다갔다 촬영을 했었어요. 그런데 계속 살을 빼다 보니까 겨울옷이 줄줄 흘러내릴 정도였어요.

한예리 전 정말 그 상태로 다른 연기를 병행하는 걸 보면서 오빠가 정말 대단하다 싶었어요.

김설진 예리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전 단백질 쉐이크 이런 거나 먹는 정도였는데 예리가 건강식으로 도시락을 싸줘서 덕분에 잘 먹었어요. 둘이서 얼마나 아파보여야 하는지, 살을 어떻게 뺄지 토론을 정말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웃음)

한예리 밀가루는 진짜 안 먹었어요. 계란이나 바나나 같은 걸 준비해서 먹고 아몬드 몇 개, 이 정도를 챙겨 먹었죠. 안 먹다가 먹으니 얼굴이 잘 붓더라고요. 총체적 난국이었죠. (웃음)

〈봄날〉
〈봄날〉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준비한 배우의 몸이야말로 이 영화의 언어가 되는데요. 대사보다 더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오죠. 처음 영경이 수환에게 업힐 때, 영경이 수환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 그들이 어떻게 서로에게 의지가 되고 교감하는지 느끼게 되죠.

김설진 대형견 쓰다듬듯이요.(웃음)

한예리 맞아요.(웃음) 저는 오빠한테 업혔을 때 그 겨울의 체온이 기억에 남아요. 오빠한테 업혔을 때, 진짜 수환에게 업혔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오빠의 상체가 넓어서 안정감이 있고, 체온도 따뜻했어요. 그래서 영경이 수환이 아픈 걸 알면서도 자꾸 업히고 싶어 했던 게 이해됐어요. 몸의 언어라는 게 얼마나 강력한지 이번 영화를 하면서 정말 많이 느꼈어요.

김설진 수환이 영경에게 유일하게 해줄 수 있는 게 ‘업어주는 행위’였는데, 병이 심화되면서부터는 그것조차 못 하게 됐을 때 오는 자괴감이 컸죠. 그게 겹쳐지면서 이상한 감정들이 밀려왔죠. 거기서 울면 안 되는 장면이었는데, 감정이 너무 북받쳐서 참기 어려웠던 기억이 나요.

영경이 술을 마시러 요양원을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그 장면이죠. 수환은 영경이 나가도록 허락했지만 보고 싶은 마음에 매일 밤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죠. 쓰러져 오는 영경과 휠체어에서 떨어져 영경에게 가는 수환 둘의 만남이 이들의 사랑의 형태를 압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요. 관계를 상징하는 한 편의 현대무용을 보는 것 같은 연출이었어요.

김설진 감독님께서 “이 장면이 잘 돼야 그다음이 이어진다”고 하셨어요. 우리 영화 전체에서 가장 움직임이 많은 씬이기도 하잖아요. 감독님이 어떻게 찍어야 할지 계속 고민을 하셨던 장면인데, 이상하게도 오히려 저는 크게 어렵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기다리던 사람이 휘청거리며 걸어오면 당연히 마중 나가고 싶잖아요. 자신의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도요. 오히려 저는 그 상황에서 제 몸보다 ‘영경이 괜찮을까’라는 걱정이 먼저였어요. 그래서 ‘영경이가 어떻게 다가올까?’를 미리 묻지도 않았어요. 수환은 계산적으로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니까요. 수환에게 중요한 건 ‘영경이 반갑게 맞아주고, 다치지 않게 안아주는 것’, 그리고 마지막에 찾아온 안도의 숨이었어요. 병 때문에 눈물샘이 말라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상태라 꿋꿋이 울지 않으려 하고, 계속 감정을 다지면서 몸으로 그 감정을 표현하려고 했죠. 그런데 감독님이 “좀 울면 안 될까?” 하셔서 제가 “울면 안 되잖아요” 했더니 “아 맞다” 하고 다시 돌아가시더라고요. 감독님도 그만큼 감정에 깊이 빠지셨고 표현에 고민이 많았던 장면이었어요.

한예리 오히려 감정의 과잉이 되지 않을까 걱정을 했어요. 당시 현장에 비도 오고, 날씨도 추웠고, 테이크도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더 단순하고 심플하게 접근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무언가 보여주겠다’는 의도를 가지면 오히려 흐트러질 수 있거든요. 결국에는 서로 믿고 가는 수밖에 없었어요. 저는 수환 오빠를 온전히 믿었고, 오빠가 제가 중심을 잃지 않도록 잘 해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크게 걱정은 안 했어요. 서로 엉켜 부딪힐 일은 없을 거라는 신뢰가 있었어요.

〈봄날〉
〈봄날〉

감독님 역시 그 믿음으로 배우에게 의지했을 것 같아요. 배우이자 댄서이기도 한 두분이 이 영화에 캐스팅된 이유를 설명해 주는 장면이기도 한데요.

김설진 생각해보면 무용을 해왔던 배경이 작용해서 그 장면을 완성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제 경우에는 아이를 키운 경험도 반영이 됐어요. 아기를 안고 있을 때는 무조건 ‘안전하게 보호해야 한다’는 감각이 생기거든요. 그때의 감각이 이번 장면에서 다시 떠올랐어요. 나의 움직임이 아니라, 상대를 보호하기 위해 몸이 반응하는 그 감각이요.

몸의 언어와 더불어 이 영화를 관통하는 정서이자, 또 하나의 중요한 표현 도구가 있죠. 시작부터 이미 서로를 인정하는 둘에게 있어 대화의 도구는 여느 커플과는 남다른데요. 영경이 김수영 시인의 「봄밤」을 읊조리는 시 낭송과 몸짓이 굉장히 중요한 감정의 언어로 쓰이는데요. 자신의 아이를 빼앗긴 영경은 수환을 만나기 전 알코올과 이 시에 의존해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이 부분은 어떤 방식으로 준비하고 표현하셨나요?

한예리 시 낭송은 일상처럼 자연스럽게 나와야 했어요. 숨 쉬듯, 밥 먹듯. 그냥 이 사람이 말을 하는 방식이 시였던 것 같아요. 어떤 고백이기도 하고, 삶의 언어이기도 했고요. 주사 놓듯 툭툭 던져지는 것 같기도 했어요. 처음에 저는 시가 좀 무겁게 느껴졌어요. 그런데 연습하고 낭송하면서 점점 그 언어들이 ‘영경의 말’처럼 느껴졌고, 나중엔 말로 못 하는 감정을 시로 푸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마지막에 시를 읊을 땐 정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어요. 카메라도 멀리 떨어져 있고 조명도, 스태프도 없는 상황에서 혼자 낭송했기 때문에 더 깊은 감정으로 들어갈 수 있었어요.

〈봄날〉
〈봄날〉

시가 낭송되는 밤의 정막, 그리고 목소리의 정서가 정말 강렬하게 느껴졌어요. 촬영 내내 시와 함께 한 예리 배우님에게 특히 와닿았던 시구절이 있을까요?

한예리 업혀서 시를 읊을 때가 영경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마지막 시를 낭송할 때는, 이 사람이 진짜 너무 슬프구나 싶었어요. 그 술을 마시면서 낭송할 때 분노도 많이 느껴졌고요. 그 분노를 어디에도 표현할 수 없고, 대상을 마주할 수도 없어서 더 무기력하고 외로워 보였어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다른 호흡과 형식으로 다가가는 영화인데요. 익숙한 방식을 거스르는 영화를 보기에 앞서 관객들에게 이 영화를 통해 꼭 가져갔으면 하는 것이 있다면요.

한예리 저는 이 영화가 단지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았으면 해요. 이건 정말 사랑의 이야기예요. 두 사람이 서로를 절실하게 아끼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관객 여러분도 이들을 동정하기보다는, 그냥 있는 그대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김설진 문화가 발전하려면 그 안에 다양한 파이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영화는 익숙한 방식이 아닐 수 있지만, 편안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잠깐 숨을 고르며 바라보셨으면 해요. 그리고 나 자신에게 물어봤으면 해요. ‘나는 지금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본 적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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