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앤 해서웨이의 신작 <아마겟돈 타임>이 이번주 개봉했다. 1980년 미국을 배경으로,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자신의 위신과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고심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준다. 해서웨이가 누군가의 어머니를 처음 연기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2000년대 초를 대표하는 신데렐라 배우로 커리어를 시작한 앤 해서웨이의 지난 20년간의 행보를 정리한다.

프린세스 다이어리

앤 해서웨이의 커리어는 시작부터 탄탄했다. 폭스 TV 드라마 <겟 리얼>을 통해 얼굴을 알린 후, 데뷔작인 디즈니 영화 <프린세스 다이어리>(2001)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아마겟돈>의 리브 타일러가 유력한 캐스팅 후보였으나 결국 해서웨이가 미아 역에 낙점됐다. 해서웨이는 오디션 중에 의자에서 떨어졌는데, 게리 마셜 감독은 그걸 보고 미아 역에 캐스팅 하기로 결정했다고. 아버지 사진이나 반려묘가 등장하거나, 치아교정기를 썼던 경험이 반영되는 등 실제 해서웨이의 면면이 적절히 녹아 있다.

엘라 인챈티드

미라맥스가 배급한 <엘라 인챈티드>(2004)에서 다시 공주 캐릭터를 맡았다. 10대 시절 원작소설을 읽은 앤 해서웨이는 동화와 영화의 느낌을 잘 살리기 위해 의견을 더했고, 영화 속 모든 노래를 직접 소화했다. 다만, <프린세스 다이어리>의 큰 성공에도 불구하고 <엘라 인챈티드>를 비롯한 해서웨이의 영화들은 흥행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프린세스 다이어리 2

<오페라의 유령>의 크리스틴 역에 캐스팅 됐으나 거절하고, <프린세스 다이어리 2>(2004) 촬영을 마쳤다. 처음엔 속편을 망설였으나, "전작의 연기를 되풀이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리 마셜 감독의 설득에 출연을 결심했다. 흥행 성적도 준수했다. 마셜은 2016년 해서웨이와 3편을 만들 거라는 소식을 전했지만,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브로크백 마운틴

베니스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이안 감독의 걸작 <브로크백 마운틴>(2005)에 출연하면서 성숙한 캐릭터를 소화하는 배우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본래 미셸 윌리엄스가 연기한 에니스(히스 레저)의 아내 알마 역에 제안이 들어 왔지만 시나리오를 읽고 잭(제이크 질렌할)의 아내 루린을 원해 그 역의 오디션을 봤다. 이안 감독에게 승마를 할 줄 안다고 거짓말을 할 만큼 역할에 대한 의지가 대단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는 앤 해서웨이 하면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작품이 됐지만, 실은 그는 앤디 역 물망에 오른 배우 중 우선순위가 낮은 축에 속했다. 해서웨이는 제작사 '폭스'에 본인을 적극적으로 어필했고, <브로크백 마운틴>을 본 메릴 스트립이 그녀를 지목하고 나서야 앤디 역을 차지할 수 있었다. 촬영 첫날 스트립은 해서웨이에게 "당신은 이 역에 완벽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건 앞으로 내가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좋은 소리라 될 것"이라 말했다고. 해서웨이는 경매회사에서 일주일 동안 업무를 담당하면서 역할을 준비했다.

비커밍 제인

시대극 <비커밍 제인>(2007)은 영국의 대문호 제인 오스틴이 토마스 리프로이와 사랑을 나누던 시기를 재현한 작품이다. 앤 해서웨이가 주인공을 맡았고, 이는 그가 실존인물을 연기한 첫 영화다. 10대 시절부터 제인 오스틴의 팬이었던 해서웨이는 오스틴의 작품과 서신을 다시 읽어나갔을 뿐만 아니라, 피아노 연주를 배우고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 악센트를 익혔다.

겟 스마트

미국의 TV 시리즈를 각색한 <겟 스마트>(2008)는 앤 해서웨이가 처음으로 도전한 코미디/액션 영화다. 성형수술을 받아 미녀형사로 거듭났다는 설정의 캐릭터인 에이전트99를 연기했다. 코미디 연기의 달인인 스티브 카렐을 적절히 서포트 하면서 영화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영화가 개봉하고 몇 년간 속편이 제작된다는 소식이 꾸준히 들려 왔지만,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레이첼, 결혼하다

<양들의 침묵>을 연출한 조나단 데미 감독의 숨은 명작 <레이첼, 결혼하다>(2008). 제목과 포스터를 큼직하게 차지한 앤 해서웨이의 얼굴을 보면 그가 레이첼 역을 맡았을 거라 예상하기 십상인데, 결혼을 앞둔 레이첼이 아닌 동생 킴을 연기했다. 약물중독 치료를 위해 재활원에 있다가 언니의 결혼식을 위해 잠시 바깥으로 나온 킴이 버거운 마음을 가누지 못해 가족 모두가 상처를 입게 되는 과정을 집요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본래 팀 버튼 감독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10) 제작에 착수하기 전부터 주인공 앨리스를 앤 해서웨이에게 맡길 계획을 세워 두고 있었다. 하지만 해서웨이는 앨리스가 이전에 거쳐온 캐릭터와 비슷하다며 고사했고, 결국 하얀 여왕 역을 맡게 됐다. 아름다운 외모와 우아한 동작 등은 루이스 캐럴의 원작과 대번에 다르지만, 어딘가 어설퍼 보이는 행동거지만큼은 유사하다. 6년 뒤 제작된 속편 <거울나라의 앨리스>(2016)에도 참여했다.

러브 & 드럭스

섹시한 유머와 절절한 로맨스가 어우러진 <러브 & 드럭스>(2010)는 앤 해서웨이와 제이크 질렌할이 <브로크백 마운틴> 이후 5년 만에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춘 영화다. <브로크백 마운틴> 속 해서웨이와 질렌할이 부부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하지 않는 사이였다면, <러브 & 드럭스>는 가벼운 관계로 시작해 서로 거리를 좁혀가는 과정을 그려 나간다. 두 번째 협업인 만큼 두 배우의 '케미'가 남다르다.

원 데이

단 하루의 이야기가 아니다. <원 데이>는 대학 졸업파티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이 20년 간 우정과 사랑 사이를 맴돌며 연을 이어가는 시간을 따라간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소설을 바탕으로 작가 데이빗 니콜스가 직접 시나리오까지 썼다. 앤 해서웨이는 상대역으로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로 얼굴을 알린 짐 스테거스를 직접 지목했다고.

다크 나이트 라이즈

크리스토퍼 놀란은 슈퍼히어로 영화의 역사를 다시 쓴 <다크 나이트>를 잇는 속편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의 캣우먼을 앤 해서웨이에게 맡겼다. 초대 캣우먼의 배우 헤디 라마르를 레퍼런스 삼은 해서웨이는 1주에 5일간 온갖 트레이닝을 소화하는 등 경력 통틀어 가장 육체적으로 고된 준비 과정을 거쳤다. 10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현재까지도 해서웨이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최대 수익을 거둔 작품으로 남아 있다.

레미제라블

앤 해서웨이를 비롯한 휴 잭맨, 러셀 크로우, 아만다 사이프리드 등 배우들의 앙상블이 돋보이는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2012). 5살 때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미국 첫 투어 공연을 보고 자라 판틴 역까지 맡은 만큼 앤 해서웨이는 실제 머리카락을 잘라 판틴의 초췌한 모습을 만들었다. 영화의 최고 명장면으로 손꼽히는 'I Dreamed a Dream'을 부르는 대목은 무려 8시간 동안 촬영돼 결국 네 번째 컷이 사용됐다. 해서웨이는 <레미제라블>로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거머쥐었다.

인터스텔라

배우 편애로는 누구 못지 않은 크리스토퍼 놀란은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 이어 SF영화 <인터스텔라>(2014)에도 앤 해서웨이를 기용했다. 주인공 조셉(매튜 매커너히)이 이끄는 인듀어런스 호의 대원인 아멜리아 브랜드 역. SF임에도 아날로그적인 촬영을 고수하는 놀란의 연출 때문에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아이슬란드에서 촬영할 때 해서웨이의 우주복이 열리는 바람에 저체온증을 앓기도 했다.

인턴

30세 여성 CEO와 70세 남성 인턴사원의 연대를 그린 <인턴>(2016)은 한결 기운을 덜어낸 명배우 로버트 드니로와 앤 해서웨이의 담백한 협업이 돋보인다. 처음부터 그렇게 계획된 것마냥 완벽한 조합인데, 그들의 첫 선택은 아니었다. 티나 페이와 마이클 케인이 처음 물망에 올랐고, 페이의 자리에 리즈 위더스푼이 거론됐다가, 결국 해서웨이와 드니로가 호흡을 맞추게 됐다.

오션스 8

'오션스' 시리즈의 여성판 스핀오프 <오션스 8>(2018). 산드라 블록을 필두로 케이트 블란쳇, 헬레나 본햄 카터, 리아나, 사라 폴슨, 아콰피나 그리고 앤 해서웨이 등이 오션스 8 멤버로 뭉쳤다. 해서웨이가 연기한 다프네는 멧 갈라 쇼의 호스트인 유명 배우인데, 뚱뚱해 보이면 안 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항상 껌을 씹고 가짜 손톱을 붙이고 다닌다는 설정은 해서웨이가 직접 떠올린 것.

다크 워터스

<캐롤>의 토드 헤인즈 감독이 2019년 발표한 영화 <다크 워터스>는 폐기물질 유출로 전세계를 독성 물질 중독에 빠뜨린 미국의 대기업 '듀폰'의 악행을 고발한 변호사 롭 빌럿의 실화를 영화화 했다. 거대 기업에 맞선 빌럿 한 개인의 지난한 싸움이 마크 러팔로의 호연을 통해 이루어지는 가운데, 앤 해서웨이가 연기한 아내 사라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지쳐가는 롭의 유일한 안식처가 된다.

아마겟돈 타임

<잃어버린 도시 Z> <애드 아스트라> 등 독보적인 필모그래피로 당대 가장 단단한 영화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제임스 그레이의 신작. 뉴욕 등지에서 성장한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레이건이 선거에서 이기면 안 된다는 리버럴이지만, 자식의 성장하는 과정에선 언제나 안전한 길을 택하는 보수적인 어머니의 표상을 보여주는 해서웨이의 묵직한 연기는 이젠 그가 어엿한 중견배우라는 걸 곱씹게 한다. 순간순간의 선택 뒤에 인물들의 그늘을 비추는 제임스 그레이의 연출 또한 놀라운 작품이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