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별로 보는 누아르 영화:〈이중배상〉(1944)에서〈더 킬러〉(2023)까지 - 2부

로버트 알트만 버전의 〈긴 이별〉은 아마도 가장 흥미로운 레이먼드 챈들러의 각색이 아닐까 싶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말로우가 늘 혼자이거나 외톨이였다면, 알트먼의 말로우는 사교적이다. 책 속 말로우가 쓸쓸한 정물화처럼 서술되었다면, 영화에서는 1970년대 히피들이 점령한 LA의 에너지를 머금고, 늘 무리 속에 있는 발랄한 말로우로 재탄생한다. 원작에서도, 영화에서도 말로우는 지독한 골초지만 영화 속 말로우의 담배는 원작에서처럼 사색의 수단이라기보다 과시와 유희의 수단이다.

<긴 이별>은 역대 챈들러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들 중에서 가장 덜 어둡고 (누아르 영화의 자장 안에 있으면서도), 덜 우울한 톤을 지녔다. 아마도 <패션쇼> 와 같은 풍자 코미디에 특화한 알트먼의 취향이 적극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알트먼은 챈들러의 하드보일드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절대악, 그리고 그와 맞서는 미생들의 무력감을 정교하게 재현해낸다. 사건에 갇힌 인물들의 초상을 통해 선과 악, 시스템과 규율을 그리는 그의 경향은 <고스포드 파크>(2001)를 포함한 이후 작품에서도 반복되었지만 아쉽게도 <긴 이별>은 로버트 알트먼의 마지막 누아르 영화로 남았다.

 


<침실의 표적> (브라이언 드 팔마, 1984)

드 팔마 연출의 <침실의 표적>은 탐정이나 형사가 주인공이 아닌, 단역과 대역을 도맡아 하는 삼류배우, 제이크(그레그 워슨)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누아르 영화다. 제이크는 밀실 공포증이 있어 좁은 공간이나 폐쇄된 공간, 터널이나 밀실 등의 장소에서는 공포증을 느끼는 선천적 정신 결함의 소유자이다. 제이크는 어느 날 할리우드 언덕의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 동료 배우 샘(그렉 헨리)의 부탁을 받고 그의 집을 봐주기로 한다. 그는 우연히 샘의 거실에 설치되어 있는 망원경으로 부유하고 아름다운 이웃집의 글로리아(데보라 쉘톤)의 침실을 엿보게 된다. 매일 저녁 글로리아의 아름다운 모습을 엿보던 제이크는 망원경을 통해 한 남자가 글로리아를 살인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고 살인자를 찾아 나선다.

 

브라이언 드 팔마는 오랜 시간 동안 ‘히치콕의 모사꾼’이라는 낙인을 감내해야 했던 감독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표작인 <드레스드 투 킬>은 엘리베이터 살인 시퀀스의 구성과 살인범의 설정 등 상당 부분을 히치콕의 <사이코>에서 가지고 왔고, 언급한 작품 <침실의 표적> 같은 경우 <이창>의 메인 아이디어(다리를 다친 제프리가 망원경으로 마주하고 있는 아파트를 엿보다가 살인을 목격하게 된다는)를 그대로 차용했기 때문이다. 주인공에게 폐쇄공포증이 있다는 설정 역시 <현기증>에서 제임스 스튜어트가 연기한 ‘존’의 고소공포증을 살짝 변형만 한 것이다.

다만 그의 ‘모사’가 또 다른 창작의 영역으로 추앙받기 시작한 것은 그가 가지고 온 히치콕 영화들의 모티프를 장르와 배경을 탈바꿈해 완전한 드 팔마 식 ‘네오 누아르’로 재탄생시키면서다. <침실의 표적>은 드 팔마의 ‘히치콕 변주’가 완전히 의도적인 것이며 앞으로도 이러한 예술적 파스티셰(pastiche)가 그의 주요한 작품적 경향이 될 것이라는 것을 예고한 작품이다.

 

강도 높은 성묘사와 살인 재현 등으로 영화의 평은 극단적으로 갈렸지만 평론가들로부터는 전반적으로 호평을 받았다. 로저 에버트는 "영화를 만드는 행위에 있어 (근래 들어 가장) 통쾌하고 재치 있는 선례”라며 극찬을 했고, 뉴욕 타임즈의 빈센트 캔비는 드 팔마가 "또다시 너무 극단적이지만 섹시하고 노골적으로 조잡하며, 오락적이고, 때로는 매우 재미있는 방식으로 그러하다”라고 영화를 추천했다. 또한 이 작품이 “히치콕의 <현기증>에 대한 드 팔마의 가장 노골적인 변형이자, 드 팔마의 어둡고 가장 사적인 환상에 호소하는 드 팔마 식 오리지널 영화”라고 덧붙였다. ‘네오 누아르’라는 분류가 매우 적확해 보이는 이 작품, <침실의 표적>은 과연 황금기 누아르 영화의 충실한 계승이자 할리우드 영화산업을 향한 저속하고도 영리한 풍자극이다.

 


<더 킬러> (데이빗 핀쳐, 2023)

데이빗 핀처 감독의 12번째 장편 영화다. 알렉시스 놀렌트 작가가 쓴 프랑스의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하며, 핀처의 전작, <세븐>의 각본을 쓴 앤드류 케빈 워커가 각색을 맡았다. 영화는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에 노미네이트 되며 기대를 모았으나 수상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야기는 이름이 공개되지 않는 ‘킬러’(마이클 패스벤더)가 중요한 고객이 의뢰한 타겟을 놓치면서 전개된다. 타겟을 놓친 대가로 킬러의 파트너가 잔인하게 폭행을 당하자 그는 얼굴 없는 고객과 관련자들을 모두 처단하기 위한 여정에 오른다.

 

 

영화는 ‘킬러’가 타겟을 기다리고, 놓치고, 복수를 하는 과정을 전적으로 킬러의 나레이션과 시선을 통해서만 보여준다. 따라서 관객은 2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이 킬러의 외롭고 건조한 사투를 그의 시선에 갇혀 지켜봐야 하는 것이다. 굳이 ‘갇힌다’는 표현을 한 이유는 미국과 유럽을 횡단하며 일어나고 마주하는 (총 7개의 챕터와 에필로그는 다른 나라, 혹은 도시로 구성이 되어있다) 다이나믹한 사건과 인물들이 매우 관조적이고 정적으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킬러가 어떤 배후에 의해 파트너가 무작위한 폭행을 당했는지 알아내고, 관련 인물을 처단하는 과정과 순간은 영화적인 기법과 효과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일순간도 차분함을 잃지 않는 이 킬러의 목소리와 시선으로 마치 기록물을 읊조리듯 전달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이클 패스벤더는 꽤나 효과적인 캐스팅으로 보인다. 역설적이지만 그는 선례의 영화들에서 활약한 (<긴 이별>, <머더 마이 스윗>, <명탐정 필립> 등 챈들러 소설·영화의 대표 캐릭터) 필립 말로우의 험프리 보가트나 엘리엇 굴드, 그리고 <이중 배상> 월터 네프를 맡은 프레드 맥머레이가 보유한 카리스마와 인장이 부재하다. 다시 말해, 그런 강렬한 존재감의 부재야말로 데이빗 핀처가 어쩌면 의도했을지 모를, 이 단조롭고 잔잔한 느와르에 적격인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더 킬러>는 한 인물, ‘킬러’라는 직업을 가진 남자의 캐릭터 스터디에 가까운 작품이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누아르 영화의 전형을 기대했다면 크게 실망할 것이다. 그럼에도 <더 킬러>는 레거시로 남을 만한 결정적인 하나의 시퀀스를 남긴다. 영화의 후반, 킬러는 파트너에게 벌어진 비극을 조종한 또 다른 킬러, ‘엑스퍼트’(틸다 스윈튼)를 찾아내 마주 앉는다. 죽음을 직감한 그녀는 가장 비싼 위스키를 시켜 킬러와 함께 마시며 곧 벌어질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듯한 대화를 유도하지만 그녀가 하는 모든 문장과 그가 답하는 모든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그들의 운명과 삶에 대한 은유이자 풍유(諷諭)다. 하얀 탁자 위에 크리스탈 위스키 잔을 마주한 두 킬러의 ‘마지막 만찬’ 시퀀스는 아마도 이 영화에서 가장 철학적이고 고혹적인 장면으로 남을 것이다. 데이빗 핀쳐의 다소 밋밋한 누아르를 져버릴 수 없는 이유다.

 

김효정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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