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전취식 독거노인 삼인방… ‘K’ 말고 진짜 한국사회의 일면 '사람과 고기'

〈사람과 고기〉 포스터
〈사람과 고기〉 포스터

무대 위 조명 받는 아이돌처럼, 어떤 역경에도 끝내 승리를 거두는 선수처럼, 그 모든 시기와 질타를 겪고도 끝내 사랑을 쟁취하는 드라마처럼, 한국을 상징하는 ‘K’의 세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그러나 ‘K’가 아닌 한국, 그리니까 우리의 실제 사회는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예를 들면 한국사회를 완벽하게 점령하고 있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직시하지 않는 그것이 있다. 바로 고령화다. 그나마 사회적 문제로 논의 중인 저출산도 장기적으로 보면 이 고령화 문제를 심화시키는 것인데, 그럼에도 이 고령화는 그만큼 대두되지 않는다. 그렇게 (기자를 포함해) 한국인의 노동적 삶은 더 길어질 예정이다. 그리고 그 현실은 우리에겐 멀지만 지금 당장 눈앞에 들이닥친 사람들도 있다. 노인 세대다.

(왼쪽부터) 형준 역 박근형, 우식 역 장용, 화진 역 예수정
(왼쪽부터) 형준 역 박근형, 우식 역 장용, 화진 역 예수정

이렇게 긴 서두로 장황하게 글을 여는 이유는 한 영화를 소개하기 위해서다. 10월 7일 개봉한 〈사람과 고기〉는 고깃집을 전전하며 무전취식하는 독거노인 세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다. 설명만 읽으면 각자의 마음속에 썩 좋지 않은 단어들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사람과 고기〉를 직접 본다면, 그 마음의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민 단어들을 주워 담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현실에서 수없이 마주친, 때로는 불편하고 심지어 불쾌하기도 했던 ‘꼰대’들을 다시금 재고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고기’를 먹는 세 ‘사람’을 그린 〈사람과 고기〉는 그렇게 관객 각자에게 노인과 언젠가 들이닥칠 우리의 미래를 환기한다.

이야기를 이끄는 박형준, 장우식, 백화진은 일면식인 사이다.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폐지를 줍거나 채소를 팔아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그런 독거노인이란 점이다. “모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라는 유명 러시아 소설의 문장처럼 세 사람은 비슷한 처지지만 저마다의 이유로 상황이 다르다. 형준은 근사한 집도 있고 가족도 있다. 다만 연락을 주고받은 지 한참 됐을 뿐이다. 화진은 하나 있는 손자를 간신히 대학까지 보냈지만, 손자는 돈이 필요할 때만 화진을 찾는다. 가족 하나 없는 우식은 저 고갯길 위 작은 집에서 길고양이 하나를 거둬 우유 하나를 나눠먹으며 배를 곯는다. 처음엔 ‘이게 내 거네 네 거네’ 하면서 주먹질로 말을 튼 형준과 우식이, 우연찮게 끼니를 함께 하게 된다. 여기서 화진이 얼떨결에 합세한다. 셋이 합심해서 만든 음식은 소고기뭇국. “왜 먹지들 않고 구경만 해”라는 화진의 타박처럼, 형준도 우식도 그런 호사는 너무나도 오랜만이라 첫술을 뜨지 못한다. 오늘 뭘 먹지, 이런 고민이 일상인 한국사회에서 누군가는 이렇게 고기 한 점 먹지 못해 그것마저 감격한다. 박근형, 장용, 예수정 세 원로 배우의 능숙한 연기는 이 짜여진 극의 노인들이 마치 현실의 독거노인처럼 현현하게 하고 관객들은 그 모습에 자못 엄숙해진다.

〈사람과 고기〉
〈사람과 고기〉

물론 영화는 무겁지만은 않다. 굳이 분류하자면 코믹한 분위기에 가깝다. 우식은 ‘고기를 사겠다’며 형준, 화진을 고깃집에 데려가더니 “사실 나 돈 없어”라며 무전취식을 권한다. 어쩌겠는가. 돈 없는 건 마찬가지다. 그렇게 세 사람의 작은 일탈은 몇몇 규칙을 세우고 그것을 충실하게 지키는 선에서 거듭 자행된다. 일종의 케이퍼 무비를 연상시키듯 세 노인의 “장사 잘되는 집”만 노리는 무전취식은 일순간 그들의 생활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고되게만 보였던 노인의 삶에 이렇게 생기를 불어넣는 장면부터가 굉장히 낯설고, 그래서 반갑다. 그런 즐거움이야 응당 오래갈 순 없지만(또한 법치사회에선 오래가서도 안되지만) 잠깐이나마 이 세 사람의 즐거움이 영원히 지속되길 바라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결국 각자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 가까워져 온다. 숨기고 싶었던 것들이 하나씩 드러나고, 세 사람은 이 즐거운 여정을 끝내야만 하는 상황까지 온다. 여느 영화였다면 몇 번씩 눈물 쏟게 몰아붙였을 테지만, 〈사람과 고기〉는 형준, 우식, 화진 세 사람만큼 담담하게 그들과 동행하길 선택한다. 그리고 그 담담함이야말로 그들과 함께 100여 분, 짧다면 짧은 시간을 보낸 관객들의 마음에 진하게 남는다.

〈사람과 고기〉
〈사람과 고기〉

무전취식을 하는 세 노인의 이야기에서 한국사회의 한 지점을 주시하려는 〈사람과 고기〉는 안타깝게도 현실의 논리에 의해 점점 밀려나고 있다. ‘볼 것이 없다’는 관객들에게 이 영화를 꺼내들고 싶지만, 문제는 ‘볼 곳이 없다’. 직업상 매일 극장가의 형편을 들여다보는 입장에서 극장가의 선택을 비난하는 건 결코 아니다. 산업이 쪼그라든 현재, 관객이 한 명이라도 더 들 작품을 거는 건 시장 논리니까. 그런 사정을 이해한다손 쳐도 개봉 직후 일일 스크린 점유율이 최고 1.4%, 일일 최다 상영 횟수가 101회에 불과한 건 〈사람과 고기〉에게 가혹한 출발선이었다.

다행히 진가를 알아본 관객들, 그리고 최강희와 유태오 등 동료 영화인들이 SNS에 적극적인 입소문, 후원 상영회 등으로 〈사람과 고기〉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절대적인 수치는 적어도 주말 관객 수는 꾸준히 유지됐고, 심지어 21일 월요일을 기점으로 오히려 상승세를 보였다(23일 통계 기준). 좋은 영화를 알아본 관객들의 힘이라 할 수 있다. 그 힘이 폭풍처럼 천지개벽을 일으키진 못해도, 극장가에 작은 파문을 만들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한다. 그리고 “거봐, 내 말이 맞지?” 같은 뻔뻔한 말을 할 수 있는 현실이 되길 기대한다.

〈사람과 고기〉 촬영 현장
〈사람과 고기〉 촬영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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