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장 인간다운 이야기가 가장 인간다운 배우를 만났다. 민준(저스틴 민)은 처음 만난 춘희(김혜옥)에게 대뜸 반말을 한다. 존댓말과 반말 사이에 놓인 위계와 예의, 그 미묘한 거리를 모르는 이방인의 반말은 무례하기보다 오히려 서로의 경계를 허무는 계기가 된다. 그렇게 두 사람의 거리는 단숨에 좁혀지고, 민준은 이내 춘희를 ‘엄마’라고 부르기에 이른다. 춘희와 민준, 그리고 피아노에 재능을 지닌 소년 성찬(박대호)은 혈연이 아닌 음악과 진심으로 엮여 서로의 가족이 되어간다.
비언어적 교감의 힘을 믿는 영화 〈흐르는 여정〉은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자신만의 여행을 준비하던 춘희가 새로 이사 간 아파트에서 예상치 못한 인연들을 만나며, 고요했던 일상에 새로운 선율이 흐르기 시작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안드로이드임에도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온기를 품었던 〈애프터 양〉의 양, 위선과 찌질함을 숨김없이 까발리며 서글픈 공감을 자아냈던 〈완벽하지 않아〉의 벤처럼, 배우 저스틴 민이 표현해온 인간들은 언제나 결함이 있기에 비로소 인간다워지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마침내 저스틴 민은 〈흐르는 여정〉이라는 따스하고 인간다운 서사로 한국 관객을 만났다.
첫 한국 장편영화에 출연한 저스틴 민은 〈흐르는 여정〉을 한국에 보내는 러브레터라고 표현했다. 온전히 속하지 못한다는 느낌에서 출발해 결국 진심으로 사람들과 연결되는 민준의 여정이, 곧 인간 저스틴 민의 여정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가장 한국적인 술 막걸리를 가장 서구적인 술잔인 와인잔에 따라 빨대로 마시는 민준처럼, 한국계 미국인인 그의 안에도 두 문화가 나란히 흐르고 있다. 〈흐르는 여정〉의 28일 개봉을 앞두고, 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모처에서 씨네플레이는 저스틴 민을 만나 그의 흐르는 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주말 동안 〈흐르는 여정〉 GV로 한국 관객들을 많이 만나셨는데요. 기억에 남는 한국 관객의 질문이나 반응이 있었나요? 직접 관객들을 만난 소감이 궁금합니다.
바로 어제였어요. 영화를 보신 한 관객분이 최근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그 이야기를 듣는 게 너무 마음 아팠는데, 동시에 그분이 영화를 보면서 위로를 얻으신 것 같았어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가 왜 이 일을 하는지, 왜 이런 이야기를 세상에 나누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다시금 상기하게 돼요. 또 관객을 만나는 건, 영화를 만드는 일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 중 하나예요. 극장 안에서 낯선 이들과 나란히 앉아 집단적인 경험을 공유하는 것 말이죠. 요즘은 스트리밍 서비스 때문에 사람들이 극장에 가는 일이 드물어지고 있는데, 저는 그게 참 큰 손실이라고 생각해요. 낯선 사람들과 한 공간에 모여 무언가를 함께 바라보고 느낀다는 것은 정말 강력하거든요. 지난주에 한국 관객들과 그 경험을 나눌 수 있어서 정말 기뻤습니다.

인스타그램에는 〈흐르는 여정〉이 마치 본인이 한국에 보내는 러브레터와 같다고 적으셨어요.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표현하셨나요?
제 커리어에서 한국에서 찍은 첫 영화이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민준이 한국과 맺어가는 관계가 실제로 제가 한국과 맺어온 관계를 아주 많이 거울처럼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어딘가 온전히 속하지 못한다는 느낌에서 출발하지만, 서서히 이곳의 문화와 사람들, 심지어 언어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그 과정 말이죠. 민준의 여정이 제가 지나온 삶의 궤적을 많이 닮아 있어서, 자연스럽게 이 나라를 향한 저의 러브레터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첫 한국 장편으로 〈흐르는 여정〉을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몇 년 동안 한국에서 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찾아왔어요. 대본을 꽤 많이 읽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음 깊이 연결되는 작품을 만나지 못했죠. 그러다 〈흐르는 여정〉의 각본을 받았는데, 읽자마자 즉각적으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민준의 이야기, 그리고 제 삶의 여정을 거울처럼 비춘다는 점에 마음이 움직였어요. 또 하나는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 때문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주제들이거든요. 그 이유들로 이 작품의 일원이 되고 싶었습니다.

민준의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를 거울처럼 비췄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지점에서 그렇게 느끼셨나요?
어렸을 때 가족과 한국에 왔는데, 거리를 걷다가 저와 똑같이 생긴 사람들을 처음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죠. 그런데도 제가 여기에 온전히 속해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어요. 특히 그때는 형이랑 영어로 대화하면 모두가 저희를 빤히 쳐다봤거든요. 지금과는 정말 다른 시대였어요. 요즘은 한국에서 영어를 써도 아무도 신경 안 쓰잖아요. 다들 영어를 하니까요. 그런데 그때는 형이랑 유창한 영어로 이야기만 해도 사람들이 ‘세상에, 저 한국 애들이 영어를 유창하게 하네’ 하는 반응이었어요. 그때 ‘내가 여기 속하는 걸까, 나는 누구지’ 하고 느꼈던 게 기억나요. 그런 면에서 민준도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어디에 속하는지 잘 몰랐을 거예요. 하지만 특히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에 점점 더 자주 오면서, 한국이 제2의 고향처럼 느껴지게 됐어요. 여기 있으면 정말 편하고, 이제는 문화와 역사, 언어도 훨씬 많이 알게 됐고요. 그리고 네, 이전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방식으로 소속감을 느껴요. 하나 더 덧붙이자면, 저는 한국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 한국인과 같은 한국인은 결코 될 수 없다는 걸 압니다. 어떤 면에서는 항상 다르겠죠.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저는 그 차이점들을 온전히 포용하고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어요. 이제는 그 다름이 결함이나 부족함이 아니라, 축하하고 긍정할 수 있는 부분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자랐기에 미국적인 문화가 깊이 배어 있지만, 제 안에는 여전히 지극히 한국적인 부분들이 분명히 존재하니까요.
〈흐르는 여정〉은 삶과 죽음, 상실을 다루지만 무겁기보다는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작품이었는데요. 배우로서 이런 이야기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셨나요?
저는 드라마와 유쾌함, 재미와 슬픔이 함께 어우러지는 이야기를 가장 좋아합니다. 그게 모두 우리 인간 존재의 일부라고 생각하거든요. 무언가로 힘들어하고 있다고 해도, 삶이 늘 슬프기만 한 건 아니잖아요. 큰 성공을 거두고 있을 때도 늘 행복하기만 한 건 아니고요. 삶은 언제나 그 두 가지가 섞여 있어요. 그게 이 영화가 정말 잘 해내는 아름다운 점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인물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힘들어하지만, 그럼에도 서로에게서,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관계 안에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찾아내니까요.

말씀하신 것처럼, 〈흐르는 여정〉은 잔잔하고 묵직한 이야기지만, 곳곳에 유머가 포진해 웃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는데요. 민준이 막걸리를 와인잔에 담아 빨대로 마신다거나 효자손으로 등을 긁는 등 유머러스한 디테일들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이런 설정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그 부분을 알아봐 주셔서 정말 기쁘네요.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영화이기에 관객이 숨 쉴 수 있도록 가능한 한 가볍고 산뜻한 온기를 불어넣고 싶었습니다. 유머나 농담을 더할 수 있는 여지가 보이면 최대한 영화에 녹여내려 했죠. 막걸리를 마시는 설정 자체는 원래 대본에 있었지만, 그것을 굳이 와인잔에 따르고 빨대를 꽂아서 마시는 방식은 제가 감독님께 직접 제안한 설정이었습니다. 민준이 한국에 온전히 뿌리내리지 못한 인물이라는 질감을 드러내고 싶었거든요. 막걸리라는 가장 전통적인 한국의 술을, 서구적인 와인잔에 담아 빨대로 마시는 그 이질적인 결합 자체가 두 문화의 혼합이자 민준이라는 인물의 정체성을 상징한다고 보았습니다. 피로 보면 한국인이지만 여기 출신은 아니라서, 꽤 다른 부분들이 있는 사람이요. 효자손 장면은 원래 대본에 적혀 있었는데, 현장에서 김혜옥 선생님과 정말 재미있게 가지고 놀았습니다.(웃음)
이런 이야기를 쓰는 김진유 감독님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함께 작업하며 배우로서 바라본 감독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김진유 감독님은요, 실제로 만나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아는 가장 섬세하고 감성적인 영혼을 지닌 분이에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늘 어머니의 김치찌개라고 답하거든요. 세계 최고의 레시피여서가 아니라, 그걸 먹을 때 어머니의 사랑이 온몸으로 느껴지기 때문이죠. 감독님과 작업할 때 정확히 그 감정을 느꼈습니다. 이 프로젝트 구석구석에서 감독님의 심장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어요. 영화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활짝 열어 보이셨죠. 심지어 지난주 내내 매일 우셨어요.(웃음) 저는 감독님의 그 여리고 따뜻한 감수성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영화에는 강릉 명주동과 주문진, 양양 낙산사 홍련암을 비롯한 강원도의 아름다운 풍경이 담겼습니다. 주로 강릉과 양양에서 촬영하셨는데,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으신가요?
강릉에서는 정말 멋진 기억이 많아요. 정말 평화로웠어요. 서울을 사랑하지만, 서울은 가끔 너무 정신없잖아요.(이 대목에서 저스틴 민은 ‘정신없어’를 한국어로 말했다) 강릉은 훨씬 조용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삶의 방식 같은 거예요. 제가 강릉에서 지낸 아파트는 해변에서 30초 거리였어요. 그래서 매일 촬영을 시작하기 전에 해변을 걸었어요. 제 작은 방은 침대 하나, 책상 하나뿐인 정말 소박한 방이었는데, 삶에 많은 게 필요하지 않다는 걸 일깨워줬어요. 행복해지려면 아주 작고 단순한 것들만 있으면 된다는걸요. 그리고 동네 사람들을 알게 된 게 기억나요. 촬영한 아파트에 사시는 어르신들을 모두 알게 됐는데, 늘 저희에게 인사를 건네주셨어요.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이 작품에는 세 명의 주연 배우가 등장하는데요. 연기가 처음인 피아니스트 박대호 씨, 한국을 대표하는 원로 배우 김혜옥 선생님, 그리고 한국계 미국인 배우인 저스틴 민 배우님까지, 조합 자체가 굉장히 독특해요. 세 분이 함께 연기하면서 특별했던 점이 있었나요?
케미스트리라는 건 인위적으로 제조해 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냥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죠. 감독님이 캐스팅을 정말 잘하신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게 정말 맞아요. 저희 셋은 이보다 더 다를 수 없을 만큼 다른데, 왠지 모든 게 잘 맞아떨어졌고, 서로에게 케미와 유대감을 느꼈어요. 실제 삶에서뿐 아니라 캐릭터로서도요. 그러니까 모든 게 삶을 반영하는 거죠. 구체적으로 왜 잘 맞았는지는 설명을 못 하겠어요. 그냥 마법 같은 케미가 존재했고, 그 점에 정말 감사해요.
영화는 언어뿐 아니라 음악이나 눈빛, 태도, 수어 등 비언어적인 소통으로도 진심이 충분히 통한다고 말하는 작품입니다. 인간 저스틴 민으로서도, 언어의 장벽을 넘어 비언어적으로 진심이 통했다고 확신한 순간이 있었나요?
촬영 과정 전체가 비언어적 소통의 현장이었습니다!(웃음) 제가 김진유 감독님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감독님은 영어를 아예 못 하세요.(웃음) 촬영할 때 제가 무언가를 표현하려 해도 감독님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셨고, 감독님이 무언가를 말하려 해도 저는 무슨 말씀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죠. 그런데 영화와 똑같이, 저희 사이에 뭔가 그냥 이해되기 시작한 게 있었어요. 우리 둘 다 최선을 다하기 위해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이 작품과 캐릭터들을 깊이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에 언어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통했던 거예요. 생각할수록 이 영화는 우리가 겪었던 실제 삶을 그대로 반영했기에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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