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져스: 엔드게임>(2019) 이후 오랜만에 만나는 마크 러팔로의 신작 <다크 워터스>가 절찬 상영 중이다. 러팔로는 거대기업 듀폰이 저지른 환경 파괴를 고발하는 실존 변호사를 연기했다. CG 가득한 헐크의 육체에 가려지지 않은, 러팔로의 세심한 연기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그가 지금까지 거쳐온 작품들을 한데 모았다.

<유 캔 카운트 온 미>

마크 러팔로는 1990년대 중반 저예산 호러/코미디에 출연하면서 경력을 쌓았다. 출중한 연기력을 자랑하기 시작한 건 2000년 작 <유 캔 카운트 온 미>였다. 연극연출가 케네스 로너건의 영화 데뷔작으로, 그의 연극 <이것이 우리의 청춘>에서 주인공 데니스를 연기했던 러팔로가 첫 영화에서도 주연을 맡았다. 뉴욕 근교 작은 마을에 사는 싱글맘 새미(로라 리니)를 찾아오는 동생 테리를 연기했다. 서로 라이프스타일이 전혀 다른 남매가 갈등을 겪고 화해하는 과정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인 더 컷>

흑인 속어집을 만드는 영문학자 프래니(멕 라이언)는 뉴욕 뒷골목의 바 지하에서 어느 남녀의 정사를 훔쳐본다. 이웃집 여자의 살해 사건을 조사하러 온 형사 말로이(마크 러팔로)는 그날 본 남자와 똑같은 문신을 하고 있고, 살해 당한 이웃이 그 남자와 있던 여자라는 걸 알게 된다. <인 더 컷>(2003)의 러팔로는 연쇄살인범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에도 떨칠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이다. 나긋나긋하되 확실한 태도로 프래니를 완전히 매혹시키는 관능. 섹시한 러팔로를 보고 싶다면.

<이터널 선샤인>

우리 시대 최고의 로맨스 영화 중 하나로 추앙 받는 <이터널 선샤인>(2004)에서도 마크 러팔로를 만날 수 있다. 주인공 조엘(짐 캐리)이 헤어진 연인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찾아가는 '라쿠나'의 기술자 스탠이 바로 그다. 조엘의 기억을 지우던 중 접수원 메리(커스틴 던스트)와 마약을 하고 놀다가 조엘이 프로그램을 거부하는 걸 늦게 알아채 하워드 박사를 부르게 되면서, 영화는 조엘과 클레멘타인뿐만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가 사랑으로 엮여 있음을 보여준다. 부스스 공대생 같은 모습은 펑크 밴드 클래시의 팬이라 멤버 조 스트러머처럼 꾸민 걸 의도했다고.

<콜래트럴>

한밤 중의 LA를 배경으로 톰 크루즈와 제이미 폭스가 팽팽한 연기 대결을 펼치는 <콜래트럴>(2004). 마크 러팔로는 행색만 보면 영락없이 악당 같은데 성실히 수사에 임하고 있는 LA 경찰 레이 역을 맡았다. 마약단속반 업무 중에 빈센트(톰 크루즈)가 증인들을 처리하려는 걸 알고 추적하던 중 코리아타운에서 총을 맞는다.

<완벽한 그녀에게 딱 한가지 없는 것>

<완벽한 그녀에게 딱 한가지 없는 것>(2004)은 순식간에 30살이 된 13살 소녀의 이야기다. 뉴욕의 고급 아파트에 사는 패션지 에디터가 된 제나(제니퍼 가너)는 자기만 좋아할 줄 알았던 옆집 친구 매트(마크 러팔로)를 찾아간다. 카메라를 목에 걸고 다니고 펑크 음악에 몸을 흔들던 취향은 그대로인데, 왠지 제나를 데면데면하게 대한다. 매트가 여전히 제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감추고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보면 더 재미있는 연기다.

<조디악>

60년대 말 캘리포니아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연쇄살인범 '조디악'을 추적하는 이들의 이야기. 마크 러팔로가 분한 데이빗 토시는 샌프란시스코 형사다. 곱슬머리와 커다란 나비넥타이는 실제 토시의 스타일을 그대로 가져온 것. 범인을 도저히 잡을 수 없는 답보 상태 자체를 그리는 데에 초점이 맞춰진 <조디악>(2007)에서 러팔로는, 직업인 특유의 시니컬한 태도에서 점점 사건에 간절해지다 못해 탈진해가는 변화를 면면이 드러냈다.

<눈먼 자들의 도시>

눈이 머는 전염병이 창궐한 도시, 안과의사(마크 러팔로) 역시 앞을 볼 수 없게 되고 유일하게 시력이 멀쩡한 아내(줄리안 무어)는 눈먼 척을 하고 그를 따라 격리 장소로 간다. 앞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인간은 바닥을 감추지 못한다. 안과의사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엔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상황이 점점 진행될수록 지쳐가 아내에게만 의탁하게 된다. 나약한 데다가 점점 뻔뻔해지기까지 해서, 격리시설에서 별별 악행을 다 저지르는 악당1(가엘 가르시아 베르날)만큼이나 꼴보기 싫어진다.

<레저베이션 로드>

제목 '레저베이션 로드'는 에단(호아킨 피닉스)이 뺑소니 사고로 아들을 잃은 공간이다. 마크 러팔로가 바로 그 가해자 드와이트를 연기했다. 에단은 직접 범인을 잡아내겠다 나서고, 드와이트는 그런 에단의 주변을 맴돈다. 범행을 감추려는 드와이트를 향한 적개심보다 그를 둘러싼 죄책감과 불안이 먼저 보이는 건 러팔로의 섬세한 연기 덕분에 가능했다.

<셔터 아일랜드>

연방보안관 테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동료 척(마크 러팔로)과 함께 여성 수감자가 사라진 감옥섬 '셔터 아일랜드'를 수사를 자원한다. 아내를 죽인 방화범을 만나기 위해서다. 디카프리오 특유의 신경질적인 얼굴처럼 늘 상기되어 있는 테디와 달리, 척은 엷은 웃음을 띈 채 느긋해 보이기만 하다. 수사관치고는 어설픈 척의 행동은 뇌절개술로 폐인을 만들려는 덫에 빠졌다는 공포를 가중시킨다. 마크 러팔로는 직접 마틴 스콜세지에게 그의 작품에 출연하고 싶다는 팬레터를 보내 <셔터 아일랜드>(2010)에 출연하게 됐다.

<에브리바디 올라잇>

줄리안 무어는 <눈먼 자들의 도시>(2008)에서 부부로 호흡을 맞춘 마크 러팔로를 <에브리바디 올라잇>(2010)에 강력히 추천했다. 레즈비언 부부 닉(아네트 베닝)과 줄스(줄리안 무어)는 아들의 부탁에 따라 그들에게 정자를 제공한 폴을 초대한다. 두 아이가 생물학적 아버지를 따를까봐 경계해도 결국 아이들은 폴과 친해지고, 줄스까지 그를 좋아하게 된다. 러팔로는 여유로운 태도로 주변에 묘한 긴장을 만드는 캐릭터를 자주 맡았는데, <에브리바디 올라잇>은 그 매력이 제일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노멀 하트>

HBO가 제작한 TV영화 <노멀 하트>(2014)에선 동성애자를 연기했다. 에이즈가 아직 이름 모를 희귀병이었던 1981년 여름, 친구들이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는 걸 지켜봐야 하는 남자들의 이야기다. 커밍아웃한 작가 네드(원작자 래리 크레머의 분신이다)는 죽음과 싸우는 연인 펠릭스(맷 보머)의 곁을 지키면서, 이 희귀병에 대한 정부의 지원과 사회의 경각심을 만들기 위해 애쓴다. 자극적인 퍼포먼스에 기대지 않고도 연인과 활동가의 면모를 동시에 아우르는 세심한 연기가 돋보인다. 러팔로의 최고작을 꼽는 수많은 리스트들이 <노멀 하트>를 상위에 포함시켰다.

<나우 유 씨 미>

마크 러팔로는 하이스트 무비 <나우 유 씨 미: 마술사기단>(2013)에서도 범인을 수사한다. 무명 길거리 마술사에서 순식간에 파리 은행의 비자금을 털어버리는 조직 '포 호스맨'을 쫓는 FBI 수사관 딜런 로즈를 연기했다. 조폭 사건을 다루다가 마술사기단 사건이나 맡으라는 지시에 불만이 많은데 정작 번번이 포 호스맨의 트릭에 넘어가기 일쑤다. 속편에서 딜런은 FBI가 아니다.

<비긴 어게인>

<비긴 어게인>(2013)의 댄은 천재 프로듀서다. 자기가 설립한 회사에서 해고된 날, 스타가 된 애인에게 버림 받고 뉴욕의 바에서 노래하던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의 곡을 듣고 머릿속으로 세션을 구성해 노래를 완성시키는 천부적인 감각을 가졌다. 돈돈돈 하는 음악계 사람들과 달리 알콜중독인 댄은 진심으로 음악을 즐기면서 그레타의 창작을 북돋는다. 러팔로와 나이틀리 사이의 좋은 호흡은 댄과 그레타 사이에 피어나는 '썸'의 기운을 적절히 뿜는다. 여름방학 시즌 한국에 개봉한 <비긴 어게인>은 <명량>과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의 틈바구니를 뚫고 300만 명이 넘는 흥행을 기록했다.

<폭스캐처>

굴지의 기업 '듀폰'의 상속인 존 듀폰의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한 <폭스캐처>(2014)는 '열등감'을 영화로 보여주겠다는 야심으로 완성됐다. 단 한번도 집안에서 인정 받아본 적 없는 존(스티브 카렐)은 금메달리스트 친형 데이브(마크 러팔로)에 가려 변변치 못한 커리어의 레슬러 마크(채닝 테이텀)를 자기의 레슬링팀 '폭스캐처'에 영입한다. 러팔로가 연기한 데이브 슐츠는 가족에 대한 열등감에 짓눌린 존과 마크를 케어하면서도 그 존재만으로 그들의 병증을 자극하게 되는 인물이다. 카렐과 테이텀이 선보이는 오묘한 광기에 대비되는 러팔로의 무던함이 <폭스캐처>를 천천히 파국으로 몰아넣는다.

<스포트라이트>

가톨릭 사제의 아동 성범죄 논란을 보도한 '보스턴 글로브'의 기자들의 실화를 그린 <스포트라이트>(2015). 마이클 레젠데스 기자 역을 맡은 마크 러팔로는 레젠데스와의 첫 만남부터 그가 말하는 방식을 노트와 녹음기에 기록해 인물의 리얼리티를 구현하는 데에 만전을 기했고, 레젠데스는 그의 연기를 지켜보며 "유령의 집에 있는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고 밝혔다. 대부분 영화에서 좀처럼 격한 감정을 쏟아내지 않던 러팔로는, 천인공노할 만한 사건을 추적했던 레젠데스에게 남에게 소리지르는 걸 들어볼 수 있는지 묻기도 했다고 한다.

<다크 워터스>

마크 러팔로는 <폭스캐처> 이후 5년 만에 다시 한번 듀폰 기업을 둘러싼 사건을 파고든 <다크 워터스>(2019)에 출연했다. 듀폰의 독성 폐기물질 유출을 세상에 알리려는 변호사 롭 빌럿을 연기하고, 직접 프로듀서까지 맡아 민감한 소재를 다룬 영화가 무사히 완성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실체가 보이지 않는 막강한 상대와의 지난한 대결에서 탈진해가는 이의 얼굴을 비춘다는 점에서, <다크 워터스> 속 러팔로의 연기는 <조디악>의 그것과 닮아 보인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