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찬욱의 <어쩔수가없다>
박찬욱 감독이 언젠가는 만들 것이라 오래전부터 언급해왔지만 미완으로 남아있던 프로젝트가 바로 ‘도끼’다.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을 원작으로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이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2005)로 영화화한 바 있는 이 소설은 실업자 신세가 된 주인공이 자신의 잠재적 경쟁자가 될 취업 희망자들을 선별해 한 명씩 제거하는 과정을 그린 스릴러로, 처음에 영화화를 결심했을 때 제목을 <모가지>라 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원작의 국내번역판 서문을 박찬욱 감독이 썼는데 그에 따르면 이 소설의 제목은 직장에서 해고당할 때 ‘도끼질 당했다’라는 영어 표현에서 착안한 것이라, 그에 정확히 대응하는 우리말 표현 ‘모가지 당했다’를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어떤 이론서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노동자의 처지를 정확하게 묘사한’ 이 소설에 감독의 시선이 일찍부터 닿아있었던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복수는 나의 것>(2002)에서 경영 합리화를 이유로 해고한 노동자가 자살하는 상황을 마주하며 마지막 남은 양심마저 시험받는 중소기업 사장이 등장한 바 있고, <올드보이>(2003)에서 이우진은 자본의 힘으로 공간을 장악해 일개 소시민에 지나지 않는 오대수의 동선을 추적하고 예정된 함정으로 몰아갔다. <박쥐>(2009)에서 흡혈귀에 가까워질수록 인간성을 잃어가던 태주와 상현 커플은 영화의 후반에 가면 일일이 목을 물어 피를 빠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공장에서의 대규모 도축처럼 피를 얻는 수단을 효율화하는 지경에 이르면서, 현대 자본주의의 공포와 매혹을 동시에 표상하는 이중적 이미지로서의 흡혈귀를 보여준 바 있다. 이처럼 자본과 인간성 사이의 기묘한 반비례 관계, 비틀릴 대로 비틀린 현대자본주의의 살풍경에 대한 탐구는 <공동경비구역 JSA>(2000)에서 <리틀 드러머 걸>(2018)과 <동조자>(2024)로 이어지는 격동의 근현대사와 경계인이라는 또 하나의 거대한 강줄기와 더불어 박찬욱 영화의 심층에 흐르는 중요한 작가적 모티브로 작용해왔다. 따라서 「액스」의 각색과 영화화는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 오픈토크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필생의 프로젝트’라 할 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2017년 <도끼>라는 가제에 영어권 영화로 본격적인 준비 단계에 돌입했던 이 기획은 크랭크인에 들어가기 전에 투자가 무산되면서 중단되었다가(<스토커>(2013) 전에 쓴 각본으로 이때는 <친절한 금자씨>(2005) 이래 함께 해온 정서경 작가와 <비밀은 없다>(2016)의 이경미 감독이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었다) 한국영화로 다시 추진하게 되어 2024년 8월 17일 크랭크인했고, 올해 1월 16일 크랭크업되어 가을 개봉을 목표로 후반 작업 중이라고 한다. ‘히치콕스러운’(Hitchcockian) 취향의 멜로드라마 <헤어질 결심>(2022)으로 잠깐의 외도(?)를 떠났던 박찬욱의, 장장 17년을 미뤄오다 성사된 새 영화가 다시금 우리 시대에 어떠한 사유의 시선을 펼쳐내보일 것인지를 기대해본다.

민규동의 <파과>
“사라진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 구병모 「파과」
청부살인을 업으로 삼아 한 평생을 살아왔던 킬러 ‘조각(爪角)’은 사는 일이 만만치 않다. ‘손톱’이라 불리며 날카롭고 빈틈없는 마무리로 이름하야 ‘방역작업’을 처리하며 이 방면의 대모 노릇을 해왔지만, 65세의 노령에 접어들어 쇠잔해진 몸과 마음은 예전 같지 않다. 퇴물 신세가 된 그녀의 삶에는 조금씩 변화가 찾아온다. 지켜야 할 인연을 만들지 않은 채 철저히 그림자의 삶을 고수하던 그녀는 버려진 늙은 개를 주워 키우는가 하면, 자신에게 일을 맡기려는 의뢰인의 눈을 보면서 그 안에 깃든 슬픔의 심정을 발견하게 된다. 한편 같은 에이전트에서 일하는 젊은 방역업자 투우는 조각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건다. 그의 정체는 과거 조각이 가정부로 위장해 들어가 살해한 집안의 아들. 하지만 조각을 바라보는 그의 심정은 흔히들 생각하는 원수를 갚는다는 것과는 다른 구석이 있다. 어느 날 평소처럼 살인청부를 처리하던 조각은 뜻하지 않게 부상을 입게 되고, 의외의 사건을 계기로 투우와 그녀 사이에 피어오르던 미묘한 감정이 폭발하게 된다.

「한 스푼의 시간」에서의 인공지능 로봇, 「아가미」에서 양서류마냥 아가미를 가진 소년처럼, 소설가 구병모는 예외적인 성격을 지닌 주인공과 비현실적 상상력을 리얼리즘의 필치에 결합시키는 독특함으로 한국문학의 지평을 확장한 작가이다. 대표작이라 할 「파과」 역시 그러하다.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노년’의 ‘여성’이 ‘킬러’로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폭력의 세계 한가운데에 처한다는 소설의 설정과 구도는 사뭇 파격적인데, 작가는 서스펜스와 액션의 색채가 농후(濃厚)한 장르성의 이면에 틈틈이 작중 인물이 겪는 감정의 결을 섬세히 아로새긴다. 이러한 성격의 소설을 영화화하기 위한 각색에는 모종의 위험이 따른다. 필립 K.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가 <블레이드 러너>(1982)로 완성되기까지 각본이 수차례 엎어지며 도중에 겪었던 위기처럼, 자칫하면 총격전과 격투는 현란하게 펼쳐지지만, 정작 작가가 의도한 메시지는 살아남지 못하는 평범한 액션활극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예컨대 조각이 투우와의 결투에 임하기 전 총기상 주인이 하는 대사, “부품도 단종되고, 고장, 단종. 이제 그만 좀 버리세요. 이거 더 이상 못 버틴다니까”라는 문장이 품고 있는 망가져가는 존재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어떻게 영상으로 살려낼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파과>(2025)의 메가폰을 민규동 감독이 쥐었다는 사실은 이 소설의 영화화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키우게 만든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1999), <내 아내의 모든 것>(2012) 등에서 보아왔듯, 통속성을 절제하며 펼쳐내는 입체적이고 섬세한 휴먼드라마를 어색함 없이 장르와 조화시켜온 민규동 감독의 지난 필모그래피를 돌이켜보면 그만큼 「파과」의 영화화에 적격인 감독을 따로 찾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어지는 것이다. 또한 배우 이혜영의 강렬한 존재감과 연기가 파과의 캐릭터성을 어떻게 구현해낼지도 기대감을 갖게 한다. 류승완의 <피도 눈물도 없이>(2002)에서 금고털이의 전과를 지닌 택시기사 경선 역으로 처절한 연기를 선보였던 걸 떠올리자면 더욱 그러하다. 섣부른 예측이지만 <쟈니 기타>(1954)의 조안 크로포드와 <글로리아>(1980)의 지나 롤랜즈에 필적할 무언가를 기대해볼 법하다. 제75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베를린날레 스페셜 부문 초청작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과 포스터 이미지 외엔 공개된 정보가 없는 <파과>가 조만간 장막을 걷고 진면목을 드러낼 날이 오기를 기다려본다.

이상근의 <악마가 이사왔다>
<엑시트>(2019)는 갈수록 성공한 영화의 공식을 답습한 안이한 결과물을 내놓으며 심각한 수준의 질적 하락을 겪던 한국형 오락영화에 있어 국면을 타개할 모범답안을 제시한 수작이었다. 재난 상황에 처한 개인의 시선에 입각해 그의 동선을 따라가며 주어진 환경의 제약을 담력과 기지로 돌파해나가는, 다시 말해 <레이더스>(1981)와 같은 모험활극의 컨벤션을 유독가스가 퍼진 현대 한국의 빌딩숲으로 무대와 설정을 바꿔 펼쳐낸 이 재치 있는 웰메이드 오락영화는 다른 한편으로는 생존을 위해 사방팔방으로 출구를 찾아 헤매는 두 사람의 청춘을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일상 자체가 재난인 오늘날 청년 현실에 대한 모종의 메타포로도 작용했다. 942만 관객의 흥행 기록은 익숙한 장르영화의 공식에 충실하지만, 그 묘사가 현실의 어떤 풍경과 조화되었을 때 비로소 놀라운 폭발력을 자아낼 수 있다는 증거에 다름 아니다.

<2시의 데이트>라는 임시제목이 붙어 있던 <악마가 이사왔다>는 <베테랑2>(2024)와 함께 2024년 5월 20일 칸영화제에서 홍보되었다. 다시 이상근 감독과 호흡을 맞추게 된 배우 임윤아의 언급을 통해 장르가 일종의 호러코미디가 될 것임과 대략의 시놉시스 말고는 그 어떠한 정보도 공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예단할 수는 없지만, 백수 신세를 면치 못하는 청년이 다시금 주인공으로 내세워진다는 점에서 감독의 전작과 일정 부분 발상의 맥을 같이하는 기획으로 보인다. 관객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현실의 세부를 장르의 관습과 연결 지으며 가벼움 속에 일말의 묵직한 메시지를 심어두었던 <엑시트>의 영리한 화술이 모험활극이 아닌 로맨틱 코미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발휘될지, 그 윤곽이 쉽게 잡히진 않는다. 그러나 웰메이드의 빈곤에 시달리는 현재 한국 상업영화에 있어, 가벼운 유희 이상으로 어떤 이정표를 제시해줄 영화가 되어주기를 바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