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콘텐츠란 무엇일까. ‘좋은’ 콘텐츠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것이 ‘좋은’ 콘텐츠인가? 해마다 여러 시상식에서 ‘작품상’이 수여될 때마다, 선정 작품에 대한 이견이 갈리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 확고한 기준으로 작품과 창작자들을 선정하고 격려하는 행사가 있다.
‘벡델데이’는 한국 영화영상 미디어에서의 성평등 재현을 돌아보기 위해 마련된 행사로, 영화·시리즈를 통해 성평등에 대한 관객들의 인식을 제고하고 문화다양성 향상에 기여하는 콘텐츠 페스티벌이다. 한국영화감독조합(DGK)에서 주최·주관하는 벡델데이는 2020년에 시작되어 올해로 6회째를 맞는다.
앨리슨 벡델의 ‘벡델 테스트’란
DGK의 ‘벡델데이’는 앨리슨 벡델의 ‘벡델 테스트’를 기반으로 한다. 앨리슨 벡델의 ‘벡델 테스트’란, 벡델의 1985년 만화 「경계해야 할 레즈비언」(Dykes to Watch Out For)에서 처음 등장한 개념이다. 앨리슨 벡델이 제안한 ‘벡델 테스트’ 기준은 아래와 같다.
앨리슨 벡델의 ‘벡델 테스트’
①영화 속에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최소 두 사람 나올 것
②1번의 여성 캐릭터들이 서로 대화를 나눌 것
③이들의 대화 소재나 주제가 남성 캐릭터에 관한 것만이 아닐 것
앨리슨 벡델이 그의 만화에서 위 기준을 제시한 지 꼭 40년이 지났다. 2025년 지금, 위의 세 가지 기준을 모두 만족하는 영화와 시리즈를 떠올려보자. 그야말로 ‘최소한’의 기준이기에, 2025년 현재 위의 기준을 모두 만족하는 콘텐츠의 수는 과거에 비해 현저히 증가했다. 실제로,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2024 한국영화 성인지 결산’ 보고서에 따르면, 작년 흥행 순위 30위 안에 든 영화 중에서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작품은 총 16편으로, 조사 대상이었던 27편 중 59.3%를 차지하는 수치다. 절대적으로 매우 높은 수치는 아니지만, 영진위가 성인지 통계를 발표하기 시작한 2017년 이후 가장 높은 기록이다.
벡델데이만의 ‘벡델 테스트 7’ 기준 뜯어보기
그러나, ‘최소한의 조건’ 같았던 이 세 가지 기준조차, 불과 십여 년 전까지 국내 상업영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더불어, 앨리슨 벡델의 ‘벡델 테스트’ 항목들을 통과했다고 해서 반드시 성평등한 작품이라고 볼 수는 없다. 감독, 제작자, 프로듀서, 주연, 각본가, 촬영감독 등 핵심 콘텐츠 창작 인력의 성비가 여전히 불균형하고, 여성 캐릭터가 양적으로는 증가했더라도 여전히 주변부에 머무르거나, 평면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DGK는 제작 측면, 인물들의 서사 내 입지, 여성 캐릭터의 재현 방식과 다양성, 성별 고정관념의 해체 등을 다각적으로 고려하기 위해, 앨리슨 벡델의 기준에 4가지 항목을 추가해 ‘벡델데이’만의 새로운 ‘벡델 테스트’ 기준을 세웠다. DGK의 ‘벡델테스트 7’ 기준은 아래와 같다.

벡델데이의 ‘벡델 테스트 7’
①영화 속에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최소 두 사람 나올 것
②1번의 여성 캐릭터들이 서로 대화를 나눌 것
③이들의 대화 소재나 주제가 남성 캐릭터에 관한 것만이 아닐 것
④감독, 제작자, 시나리오 작가, 촬영감독 중 1명 이상이 여성 영화인일 것
⑤여성 단독 주인공 영화이거나 남성 주인공과 여성 주인공의 역할과 비중이 동등할 것
⑥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적 시선을 담지 않을 것
⑦여성 캐릭터가 스테레오 타입으로 재현되지 않을 것
확장된 기준은 콘텐츠가 어떤 시각과 태도로 세계를 재현하고 있는지를 면밀히 따져보게 한다. 그러나 위의 일곱 가지 기준 역시, 이 항목들을 통과했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작품, 그리고 성평등한 작품이라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벡델데이의 심사위원들은 토론을 통해 ‘벡델테스트 7’을 통과한 콘텐츠가 성별에 따른 ‘정형화된 묘사’를 답습하고 있는지, 캐릭터가 서사를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이끌고 있는지, 인물들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이 성평등한지 등을 질적으로 따져 올해의 수상작(자)을 결정한다.
벡델데이 2025, 올해의 작품과 창작자는
벡델데이는 매년 ‘벡델테스트 7’의 기준을 토대로 국내 공개된 가장 성평등한 영화와 시리즈 각 10편씩을 ‘벡델초이스10’으로, 성평등에 기여한 감독, 작가, 배우, 제작자를 ‘벡델리안’으로 선정한다. 벡델데이 2025는 지난해 6월부터 올해 5월까지 공개된 한국영화와 시리즈를 대상으로 ‘벡델초이스10과 ‘벡델리안’ 4개 부문 선정자를 가렸다.

영화 부문 ‘벡델초이스10’으로는 〈검은 수녀들〉 〈그녀에게〉 〈딸에 대하여〉 〈럭키, 아파트〉 〈리볼버〉 〈빅토리〉 〈최소한의 선의〉 〈파과〉 〈하이파이브〉 〈한국이 싫어서〉 (가나다순) 가 선정되었다. 수녀를 퇴마의 주체로 세운 〈검은 수녀들〉, 누아르 장르를 여성의 시선으로 전복한 〈파과〉와 〈리볼버〉, 슈퍼히어로물의 틀을 깬 〈하이파이브〉가 주목받았다. 〈그녀에게〉, 〈딸에 대하여〉, 〈최소한의 선의〉, 〈빅토리〉 등은 여성의 삶과 관계, 연대를 입체적으로 그렸고, 〈한국이 싫어서〉와 〈럭키, 아파트〉는 차별과 혐오를 성찰하는 작품으로 평가됐다. 한편, 영화 부문의 벡델리안으로는 감독 부문에 〈딸에 대하여〉 이미랑 감독, 배우 부문에 〈파과〉 이혜영 배우, 작가 부문에 〈최소한의 선의〉 김수연 작가, 제작자 부문에 〈빅토리〉 〈하이파이브〉를 만든 안나푸르나필름 이안나 대표가 선정됐다.

한편, 벡델데이 2025 시리즈 부문 ‘벡델초이스10’에는 〈굿파트너〉, 〈낮과 밤이 다른 그녀〉, 〈미지의 서울〉, 〈선의의 경쟁〉, 〈옥씨부인전〉,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정년이〉, 〈정숙한 세일즈〉, 〈폭싹 속았수다〉, 〈하이퍼나이프〉가 선정됐다. 올해는 〈폭싹 속았수다〉, 〈정년이〉, 〈옥씨부인전〉 등, 대작 사극과 시대극의 성평등이 돋보였다. 또 〈낮과 밤이 다른 그녀〉, 〈미지의 서울〉은 현실 공감, 〈하이퍼나이프〉, 〈굿파트너〉는 장르 전형성의 전복, 〈선의의 경쟁〉, 〈정숙한 세일즈〉는 여성 연대와 성장 서사로 주목받았다. 한편, 시리즈 부문 벡델리안으로는 감독 부문에 〈정년이〉 정지인 감독, 작가 부문에 〈옥씨부인전〉 박지숙 작가, 배우 부문에 〈미지의 서울〉 배우 박보영, 제작자 부문에 〈정숙한 세일즈〉 한석원·황기용·신혜미 대표가 선정됐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여성 주인공 중심의 영화나 드라마는 흥행 리스크 요소로 여겨졌다. 그러나 올해의 벡델초이스에는 다수의 상업영화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TV 드라마 등이 다수 포진돼 있다는 점으로 보아, 관객은 여성 중심 서사에서도 충분한 재미와 몰입을 느끼고, 더 나아가 새로운 시각에 목마름을 느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성평등 서사가 더 이상 리스크가 아니라 콘텐츠 확장의 동력이며, 콘텐츠의 재미와 성평등이 반비례하는 요소가 아님을 반증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성평등 놀이터’로서의 벡델데이 2025 프로그램

벡델데이가 지향하는 ‘미디어의 성평등’은 지루한 명제가 아니라, 콘텐츠에 활력을 불어넣고 다양성을 넓히는 ‘촉진제’와도 같다. 따라서, 올해의 벡델데이 2025 역시 ‘성평등 놀이터’로서, 벡델데이의 취지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기 위해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관객과 창작자들을 만날 예정이다.
올해 벡델데이 2025는 9월 6일부터 7일까지 KU시네마테크에서 이틀간 열린다. 이번 행사에는 스페셜 토크, 특별 상영과 GV 등이 예정돼 있다. 먼저 6일 토요일 ‘벡델리안과의 만남’에는 벡델리안으로 선정된 〈딸에 대하여〉 이미랑 감독, 〈빅토리〉와 〈하이파이브〉를 제작한 이안나 대표, 〈최소한의 선의〉의 김수연 작가, 〈정년이〉의 정지인 감독, 〈정숙한 세일즈〉의 제작자 신혜미 대표가 자리해 장르와 서사에서 자신의 지분을 확보한 여성 캐릭터와 서사 내 성평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편, 같은 날 영화 〈파과〉의 상영과 민규동 감독, 이혜영 배우가 함께하는 ‘원 앤 온리! 배우 이혜영: 여성 배우의 경계를 확장하다’ 토크가 마련돼 관객들과 영화, 그리고 이혜영이라는 배우의 성취에 대해 이야기할 예정이다. 더불어, 이날 저녁에는 〈딸에 대하여〉의 특별 상영이 예정돼 있다.


다음 날인 7일에는 벡델초이스10에 선정된 영화 〈빅토리〉의 상영과 함께 박범수 감독, 박세완 배우가 참석하는 관객과의 대화가 열릴 예정이다. GV에는 〈연애 빠진 로맨스〉의 정가영 감독이 모더레이터로 참여한다. 한편,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를 비롯해 〈골 때리는 그녀들〉 〈무쇠소녀단〉 등 최근 뜨겁게 화제가 된 TV 예능의 성평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도 마련돼 있다. SBS 〈골 때리는 그녀들〉의 권형구 PD, 이영진 배우와 Mnet 〈월드 오브 우먼 스트릿 파이터〉의 정경욱 PD는 ‘몸의 자유, 억압되어 온 여성의 욕망과 도전을 깨우다’라는 테마로 미디어 속 승부욕의 성평등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 더불어, 이날 저녁에는 〈최소한의 선의〉 특별 상영이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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