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이야말로 배우 이현균에 대해 쓰기에 딱 적기다. 물론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를 한창 방영할 때 썼어야 하지만, 그때 어찌저찌 타이밍을 놓친 건 아마 지금 쓰라는 뜻이었나 보다.
진작 모두의 보석함에 담겨 있었을 배우를 지금 다시 꺼내 소개하는 까닭은, 21일 개봉하는 영화 〈실낙원〉과 최근 종영한 드라마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 〈신병4: 사보타주〉, 그리고 24일 첫 방송을 앞둔 드라마 〈파이널 테이블〉까지, 배우 이현균의 작품이 아마 단군 이래 가장 많은 관객과 시청자를 만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진짜 어디 대기업에서 인사팀장 데리고 온 것 아니냐’는 반응이 쇄도했던 JTBC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이하 〈김 부장 이야기〉)의 인사팀장 최재혁은 미디어에서 흔히 보지 못했던 새로운 유형의 ‘빌런’이었다. 대놓고 악독하지 않아 더욱 악독한 인물이라고나 할까. 그는 선배 김낙수(류승룡)에게 사직을 권하면서도 악인처럼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오히려 정중한 존댓말과 무심한 반말을 은근슬쩍 섞어 쓰는 ‘반존대’의 묘한 화법으로 원하는 바를 관철하고, 상하관계를 순식간에 역전시킨다. 희망퇴직 대상자 명단을 넘기라며 “나 진짜 절박해서 그래요. 이렇게까지 하는 건 나도 처음이야”라고 상대의 감정을 살살 건드리는 그는, 갑질인지 진심 어린 호소인지 모를 경계 위에서 능숙하게 줄을 탄다. ‘선배님’이라고 부르다가도 ‘형’으로 호칭을 바꾸며 심리적 우위를 점하는 지극히 평범한 악인의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소름 돋는 현실감을 선사했다.
시청자들은 그를 보고 ‘PTSD가 온다’고 했지만, 정작 이현균은 최재혁을 나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리에서 자기 일을 하는 사람으로 봤다. 감정을 실으면 태생부터 나쁜 놈처럼 보일 것 같아 선을 넘지 않으려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시스템의 부품으로 살아남기 위해 기꺼이 비정해진 K-직장인의 얼굴을 전형적인 빌런처럼 과장하지 않고 담백하게 그려 냈기에, 그는 이 드라마의 날카로운 현실감을 완성한 일등 공신이 됐다.

그런 그가 또다시 출근했다. 최근 종영한 티빙 오리지널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이하 〈로또 1등〉)의 홍성인터내셔널로 말이다. 이현균은 공은태(이준혁)와 대척점에 있는 듯, 혹은 그를 누구보다 아끼는 듯 속내를 좀처럼 알 수 없는 ‘츤데레’ 상사 장경철로 분했다. 로또 1등에 당첨된 뒤 “이 회사가 차장님 회사는 아니지 않습니까”라며 그간 참아 왔던 말을 모두 쏟아 내는 공은태에게 그는 “야 공은태, 팀장이고 차장이고 부장이고, 회사원들은 직장에서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이야. 그거 못 하겠으면 회사를 다닐 게 아니라 그냥 니 사업을 해. 뭐, 로또라도 된 거야?”라며 ‘현실 상사’의 화법을 그대로 재현한다. 하지만 그는 절에 가서 공은태의 안녕을 빌어 줄 만큼 누구보다 부하를 아끼는 따뜻한 인물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는 〈김 부장 이야기〉와 〈로또 1등〉을 거치며, 살아남기 위해 때로는 냉철한 직장인의 얼굴을 해야만 하는 인간의 본능을 꿰뚫어 본 것이 아닐까.

따지고 보면 이현균은 회사뿐 아니라 그야말로 모든 조직을 통달한 배우다. (물론 〈강릉〉에서 진짜 ‘조직’ 생활을 경험해보기도 했다.) 〈신병4: 사보타주〉(이하 〈신병4〉)에서 보여 준 신임 대대장 변혁진만 봐도 그렇다. 취임 화환을 전부 거절하고 쌀로 받아 필요한 곳에 기부하겠다는 남다른 포스로 등장한 그는, 군대라는 경직된 집단에서 보기 드문 ‘일잘러’ 지휘관의 면모를 보인다. “제가 있는 동안에는 모두 다 변화시킬 것입니다”라더니 흡연 정지 운동을 밀어붙이고, 위수지역 상인에게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부대원들은 “스타일이 군인 같지 않고, 어디 대기업 인사팀장 같습니다”라고 수군대는데, 이현균의 필모그래피를 아는 이들에게 바치는 ‘배우 개그’였다.
돌이켜보면 이현균이 얼굴을 알린 것은 영화 〈1987〉부터였다.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사건을 세상에 처음 알린 의사 오연상. 영화의 문을 열며 숨이 멎은 박종철에게 심폐소생술을 하던 바로 그 의사다. 극단 생활을 하다 연극을 멈추고 1년간 직접 프로필을 돌리던 시절, 연극제 수상 기사를 본 조감독이 인물과 닮았다며 연락해 왔고, 오디션을 보고 석 달을 기다린 끝에 출연이 확정됐다. 그에게 처음으로 소속사가 생긴 것도 그때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현균은 ‘연상호’라는 직장에 가장 성실하게 출근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넷플릭스 영화 〈정이〉를 시작으로 시리즈 〈지옥〉, 〈기생수: 더 그레이〉, 〈선산〉, 영화 〈얼굴〉, 〈군체〉, 그리고 〈실낙원〉까지. 이쯤이면 연상호 유니버스의 ‘정규직’이라 불러야 할 것 같다. 21일 개봉하는 〈실낙원〉에서 이현균은 류소영(김현주)의 아들 선우(배현성)의 뒤를 좇는 기자 오경원 역을 맡았다. 그는 아마 〈실낙원〉에서 관객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선 인물이 아닐까. 9년 만에 돌아온, 그러나 어딘가 낯설어진 아들을 둘러싼 이 스릴러에서 그는 관객과 함께 선우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 나가며 충격적인 진실에 한 걸음씩 다가선다.

24일 첫 방송을 앞둔 JTBC 드라마 〈파이널 테이블〉에서는 셰프다. 이현균이 연기하는 재일교포 박제현은 한국인 아내를 따라 귀화했고, 요리로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하려는 인물이다. 인사팀장과 차장과 대대장을 거쳐 이번엔 주방이라니, 이 배우가 섭렵할 조직은 아직 남아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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