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연의 보석함] 날것의 공포부터 묵직한 온기까지, '경주기행' '살목지' '빅슬립' 김영성

나는 사람이 궁금하다. 이미 주목받는 배우일지라도, 지금이 그들의 가장 덜 유명한 날일지도 모른다. '김지연의 보석함'은 나날이 고점 갱신 중인 배우들을 소개한다. '떡상 종목'을 ‘저점매수’ 하시라.

〈살목지〉
〈살목지〉

올해 상반기 가장 빛났던 공포영화, 〈살목지〉(2026)에서 투덜투덜하다 가장 먼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인물을 기억하는가. 베테랑 로드뷰 촬영 업체 대표 송경태(김영성)는 갑자기 해야만 하는 일이 생겨 불만투성이다. 로드뷰 결함을 수정하려 휴일에도 긴급 소집되어 저수지로 향한 그는, 최대한 ‘대충’ 일을 끝내고 낚시할 생각에만 몰두해 있다. 저수지에서 귀신이 나왔다느니, 이상한 형체가 보였다느니 하는 소문들은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귀신을 믿지 않는 존재가 가장 먼저 참변을 당하는 게 공포영화의 공식 아니던가. 얄미우리만치 입으로만 주절대던 그는 알 수 없는 존재에 이끌려 물에 빠진 후, 얄팍한 허세는 오간 데 없이 사라지고, 눈앞에 닥쳐온 공포에 압도되어 벌벌 떤다.

〈살목지〉
〈살목지〉

경태는 〈살목지〉를 보는 관객들을 공포로 이끄는 안내자와 같은 역할이다. 경태는 실체를 확인하기 전까지 〈살목지〉의 공포를 정말 무서운지 가늠해 보려는 관객들의 심정을 대변한다. 아마도 관객들은 영화 〈살목지〉가 무섭다는 소문을 듣고, 영화가 ‘소문대로 정말 무서운지’ 반신반의하며 확인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극장에 앉았으리라. 개중에는 마치 경태처럼 공포스러운 소문을 전혀 믿지 않는 관객들도 있었을 터. 그래서 눈을 뜬 채 죽은 경태의 기괴한 시신이 발견되는 장면은 〈살목지〉에서 가장 강렬한 점프 스케어 신 중 하나로 기능할 수 있었다.

경태를 연기한 배우 김영성은 멋진 척, 강한 척하는 거드름의 껍데기를 벗겨낸 자리에 존재하는, 인간의 나약하고 생생한 본능을 온몸으로 표현해 냈다. 그는 “경태가 카메라를 메고 로드뷰를 촬영할 때 관객분들도 살목지에 함께 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길 바랐다”라며, 〈살목지〉의 연기 주안점에 대해 밝힌 바 있다.

〈빅슬립〉
〈빅슬립〉

그처럼, 모든 일을 ‘대충’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태를 연기한 배우 김영성의 ‘대충’ 연기는 사실 ‘대충’ 만들어지지 않았다. 김영성은 독립영화 〈빅슬립〉(2022)으로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과 들꽃영화상 남우주연상, 부일영화상 신인남우상,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남자연기상을 석권한, 영화계에서 이름을 떨친 배우다.

김영성이 연기한 〈빅슬립〉의 기영은 마치 〈살목지〉의 경태처럼 날것의 현실감을 입은 인물이다. 〈빅슬립〉의 기영은 ‘다정한 어른’의 정의를 새로 쓴다. 기영은 가출 청소년 길호(최준우)에게 “야, 밥 먹었어?”라며 무심하게 이불과 잠자리를 챙겨주고, “먹든지 말든지, 또 오지 마”라며 밥값을 툭 쥐여준다. 그렇다고 그가 흔히 말하는 전형적인 ‘츤데레’(쌀쌀맞고 인정이 없어 보이나, 실제로는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을 이르는 유행어) 캐릭터는 아니다. 기영은 “나도 어릴 때 집 나가 봤거든”이라며 아이의 처지를 어렴풋이 알아차리면서도, 무작정 그에게 온정 어린 구원자 행세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김영성의 ‘츤데레’ 캐릭터는 신기하게도 전혀 ‘느끼’하지 않다. 전형적인 츤데레 캐릭터는 ‘사실은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다정한 순간’을 강조하기 마련인데, 김영성의 기영은 오히려 다정함을 굳이 드러낼 필요 없다는 듯, 그저 자연스럽게 하루를 살아낸다. 기영은 “불쌍한 척하면 더 불쌍해지는 거야”라며 본인을 향한 말인지, 길호를 향한 말인지 모를 조언을 건네며 그 자신도 사정과 흉터를 딛고 매일을 살아내고 있음을, 무심한 듯 묵직한 얼굴과 몸짓으로 전한다.

〈빅슬립〉
〈빅슬립〉

기영이 어머니가 남기고 간 화분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그 덤덤한 모습에는 오싹하리만큼 생생한 현실감과 생활감이 서려 있다. 〈빅슬립〉의 김태훈 감독은 지난 2023년 진행된 씨네플레이와의 인터뷰에서 김영성의 오디션 당시를 회고하며, 독특했던 그와의 첫 만남에 대해 밝힌 바 있다. 김 감독에 따르면, 김영성은 오디션장에서 여행 스케치의 ‘별이 진다네’를 틀어 놓은 채 누워서 연기를 했다. 김태훈 감독은 그 모습에서 기영을 보았고, 그와 함께 대화를 통해서 영화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을 받았다고 한다.

〈경주기행〉
〈경주기행〉

바로 오늘(26일) 개봉하는 영화 〈경주기행〉에서도 배우 김영성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김영성은 장주(공효진)의 남편 역할을 연기했는데, 그는 ‘네 모녀’ 팀에 합류한 유일한 남성 멤버이자, 네 모녀가 구상한 ‘죽이는’ 계획의 ‘변수’이기도 하다. 현실적인 인물 묘사와 비현실적 사건을 롤러코스터처럼 오가는 이 로드무비에서, 김영성이 연기한 지극히 평범한 남편 역은 어쩌면 가장 판타지적인 인물인지도 모르겠다. 아내가 사람을 죽이겠다는데, 군말없이 도와준다고 하니 말이다.

김영성은 비극과 희극이 뒤섞인 〈경주기행〉에서 ‘희극’ 축을 담당하며 영화의 톤을 마냥 비장하거나 무거운 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잡아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처럼 상업영화와 독립영화, 장르물과 블랙코미디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필모그래피를 넓혀가고 있는 배우 김영성은 억지로 폼을 잡거나 멋을 부리지 않는다. 대신 날것의 공포부터 묵직한 어른의 온기, 그리고 극의 텐션을 고르는 감초 연기까지, 인물이 발 디딘 삶과 민낯의 모습을 끌어낸다. 아마도 그게 그의 무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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