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히 ‘인생캐’를 갱신했다고 말하겠다. 〈맨 끝줄 소년〉 속 ‘선민희’ 캐릭터 말이다. 데뷔 21년 차 배우에게 새로운 전성기라니. 오래도록 배우 한지은을 지켜봐온 시청자와 관객들은, 이미 너무나 유명하지만 더욱 유명해져야만 하는 배우로 그를 꼽을 터다. 그리고 한지은은 〈맨 끝줄 소년〉의 선민희로 왜 자신이 더욱 주목받아야만 하는 배우인지를 다시 한번 증명한 듯하다.
‘짤 생성 최적화 배우’라고나 할까. 그야말로 ‘밈의 시대’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배우다. 사실 한지은은 줄곧, ‘맛깔난’ 연기의 1인자였다. 대사의 리듬과 말맛, 표정, 억양으로 같은 대사를 해도 한 번 더 듣고 싶게 만들고, 같은 장면도 다시 돌려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배우. 대표적으로 드라마 〈멜로가 체질〉의 “오빠오빠” 장면이나, 〈개미가 타고 있어요〉 속 손님의 여자친구, 엄마로 빙의하며 제품을 술술 판매하는 명품 가방 판매원까지. 한지은은 유독 ‘짤’로 생성하기 좋은 ‘찰진’ 코미디 연기를 능청스럽게 잘하는, ‘맑눈광’ 혹은 ‘도른’ 연기로는 따라올 자가 없는 배우로서 독보적인 입지를 다져왔다. 또한, 차진 욕 연기로는 황정민 다음 가는 배우라고 할까. 드라마 〈별들에게 물어봐〉에서는 전남친 오정세에게 “야, 다 개나 줘버려. 이 뒤통수 엄청 튀어나온 자식아. 야, 니네 어머니가 너 남 뒤통수나 치라고 그렇게 잠 설쳐 가면서 니 뒤통수 앞 굴리고 뒷굴리기 해가지고 예쁘게 만들어 준 줄 알아? 이 똥파리 같은 초파리 새끼야. 너는 온몸에 똥이 묻어가지고 똥구덩이에 앉았어도 냄새나는 줄도 모르지?”라며 속사포 욕을 쏟아내며, 귀에 착 감기는 말맛으로 몇 번이고 돌려보고 싶은 장면을 만들었더랬다.

그래서 지난 6월 26일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맨 끝줄 소년〉 속 한지은이 연기한 선민희의 “개 쪼다야”라는 대사는, 올 상반기 나온 모든 작품을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네 글자다. 극 중 선민희는 허문오(최민식)가 이강(최현욱)의 글을 읽으며 상상해 낸 가상의 인물이다. 배우 입장에서는 현실의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허문오라는 남성이 만들어낸 왜곡된 환상을 연기해야 하는, 까다로운 이중의 미션에 직면한 셈이다. 그러나 한지은은 극의 목표를 정확히 이해한 듯 ‘상상 속 천박함’을 탁월하게 표현해냈다.
선민희는 문오의 뒤틀린 욕망과 열패감, 그리고 편견이 만들어낸 존재인 만큼, 속물적이고 천박하며, 다소 시대착오적이면서도 뻔뻔하고 섹슈얼하게 그려진다. 열패감과 자격지심에 찌든 늙은 교수는 자신의 결핍을 동력 삼아 기괴한 막장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이야기 속 인물들은 통속적이고 자극적인 껍데기를 쓴 채 소비된다. 선민희는 마치 2000년대의 한국 막장 드라마 혹은 영화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인물처럼, 꼭 중년 남성이 가난한 상상력으로 그릴 법한, 치정극을 주도하는 젊은 가사도우미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한지은은 이 상상의 허구성과 속물성을 비웃듯, 묘하게 올드하면서도 생생한 톤으로 인물을 완성해 냈다. 은주(김윤진)에게 “아줌마 남편은 그냥 역겨운 위선자에 세상 몰래 도둑질하는 그런, 개 쪼다야”라고 말하는 옥상 신은 한지은의 표정과 억양에 주목해 몇 번이고 다시 돌려봐야만 하는 명장면이다. 한지은의 선민희는 문오의 상상에서만큼은, 아니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에게만큼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캐릭터로 존재했고, 그래서 더욱 극의 반전이 배로 강렬하게 다가올 수 있었다.

한지은은 드라마 〈멜로가 체질〉의 싱글맘, 〈개미가 타고 있어요〉의 사회초년생, 영화 〈결혼, 하겠나〉의 예비신부 등 오랫동안 현실에 발을 붙인 생활형 캐릭터를 누구보다 맛깔나게 연기해 온 배우였다. 위와 같은 작품들에서 쌓아온 코미디 명장면이 많기에, 한지은은 코믹 연기에 능한 배우로만 이미지가 고착화될 수도 있었는데, 그는 이번 〈맨 끝줄 소년〉으로 그러한 기우를 실컷 비웃는 듯, 우려를 완전히 잠재워냈다.
사실 〈맨 끝줄 소년〉은 한지은에게 새로운 얼굴을 만들어준 작품이라기보다는 그동안 흩어져 있던 장점들을 한곳에 응축해 보여준 작품에 가깝다. 이 드라마에서 한지은은 능청스러움, 뻔뻔함, 짤이 될 법한 강렬한 표정, 찰진 대사빨 등 그의 기존 장점들을 한데 모아 보여주면서도, 웃음기를 배제한 채 ‘빌런’ 혹은 ‘악녀’로서 극의 서스펜스를 강화하고 텐션을 팽팽하게 조율하며 새로운 얼굴을 꺼냈다. 물론, 같은 장면을 여러 번 돌려보고 싶게 만드는 매력 역시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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