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플레이 객원 기자 김명재
소녀 감수성을 수상하리만큼 잘 아는 감독, 이와이 슌지. ‘오겡끼데스까’로 유명한 〈러브레터〉(1995)부터 봄이면 떠오르는 첫사랑의 고전 〈4월 이야기〉(1998), 그리고 소녀들의 우정과 성장, 사랑을 다룬 〈하나와 앨리스〉(2004)까지 이와이 슌지 감독은 자연광으로 연출한 빼어난 영상미와 그에 어울리는 담백하고 섬세한 로맨스 서사로 한국에도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다. 잠깐, 여기서 ‘이와이 슌지가?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당신은 ‘블랙 이와이’를 좋아하는 팬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데뷔작이자 속박증후군을 다룬 〈언두〉(undo, 1994), 이지메를 다룬 〈릴리슈슈의 모든 것〉(2001)과 그로테스크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1996) 등 동일 감독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정반대의 매력을 선보이는 작품들이 있다. 그래서 이와이 슌지 팬들은 그의 밝은 영화를 화이트 이와이, 어두운 영화를 블랙 이와이라 부르며 이를 합쳐서 ‘이와이 월드’라 칭한다. 화이트 이와이 작품이 아무래도 대중성이 높아 국내에선 화이트 이와이 작품이 유명한 편인데, 이번에 블랙 이와이의 대표 작품인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가 7월 16일에 재개봉했다. 이를 기념해 그의 대표작들을 톺아보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만약 최고 작품이 리스트에 없다면 댓글로 공유해주시길.
〈러브레터〉

이 영화를 안 본 사람은 있어도 아마 위의 “오겡끼데스까” 장면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 한국에선 수많은 미디어 매체에 패러디되며 한국 내 일본 영화의 전설로 남은 〈러브레터〉는 홋카이도 오타루시 설원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 영화로, 영상미와 대중적 감수성은 물론 예술성까지 확보한 보기 드문 작품이다. 국내에선 일본문화 개방정책으로 이제 막 일본 영화가 수입되던 1999년, 140만 명이란 이례적인 관객을 동원하며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다. 영화는 ‘죽은 사람에게서 도착한 편지’와 ‘첫사랑’이라는 로맨스 장치를 이용해 죽음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와 애도를 다루고 있다.

영화는 약혼자 후지이 이츠키(카시와바라 타카시)를 잃고 히로코(나카야마 미호)가 그의 옛 주소로 편지를 보내면서 시작된다. 하지만 편지는 이츠키와 같은 반 친구이자 동명이인인 여자 후지이 이츠키(나카야마 미호-1인2역)에게 전달되고, 답장이 올 리 없는 편지에 답신을 받게 된다. 두 사람은 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죽은 이츠키를 간접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여기서 영화는 멜로드라마적 감정을 확대하는 대신, 죽은 이의 기억을 공유한 두 여성의 교차된 시간을 따라가며 한 사람의 존재가 타인의 기억 속에서 어떻게 재구성되는지 보여준다. 히로코는 이츠키의 편지로 자신이 몰랐던 약혼자의 과거를 알게 되고, 이츠키는 자신도 모르고 있던 과거의 감정을 되짚는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자신이 경험했던 죽음과 상실을 떠올린다. 히로코는 약혼자의 죽음을, 이츠키는 아버지의 죽음을 떠올리며 상실 이후 애써 묻어두었던 슬픔과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을 지내지만 작은 트리거만 있어도 단숨에 그 순간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내면에 소화되지 않은 상실을 그려낸다. 영화를 보지 않았어도 설원 위에서 히로코가 “오겡끼데스까”라고 외치는 대사는 떠나보내지 못한 사람에게 건네는 인사처럼 들린다. 감독은 감정을 클로즈업하여 극대화하기보단 행동으로 연출했는데, 특히 학창 시절 여자 이츠키가 남자 이츠키를 대하는 장면에서 서툴고, 뭘 잘 모르던 사춘기 시절 사랑을 세세하게 묘사한다. 괜히 이츠키에게 다른 사람을 소개시켜준다고 떠보거나, 장난치는 이츠키에게 툴툴대면서도 멀어지지 않는 점이나, 이츠키의 시선에 남자 이츠키가 걸리는 카메라 연출은 좋으면서도 이게 무슨 감정인지 몰라 불편한 사춘기 그 자체다. 감정을 행동 뒤에 숨겨 놓으며 상실을 여백으로 연출한 점이 인상적인 작품.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는 〈러브레터〉 이후 이와이 슌지 감독이 발표한 두 번째 장편 영화로, 블랙 이와이임에도 올해 7월 16일 재개봉했다. 전작이 애도와 기억을 섬세하게 다뤘다면, 이번 작품은 정반대에 가까운 스타일과 주제를 택하는데, 디지털 이전 시대의 거친 16mm 필름 질감, 도시의 혼란스러운 에너지를 바탕으로 정체성과 언어, 자본의 혼종성을 다룬다.

배경은 ‘엔’이 세계 최강의 화폐가 된 가상의 일본. 이민자들이 몰려든 도시 외곽의 빈민가 엔타운에선 다양한 국적과 언어, 계층이 뒤섞여 살아간다. 영화는 성매매를 업으로 하는 이민 여성들, 거리의 청소년, 사기꾼, 갱단 등 실질적인 국적이 없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이들이 공동체를 구성해 가는 과정을 따라간다. 주인공 아게하(이토 아유미)는 어머니를 잃고 방황하던 중 중국에서 온 창녀 글리코(CHARA)를 만나 그와 그 주변 인물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어머니를 잃은 아게하처럼 글리코 역시 돈을 벌기 위해 큰오빠 랑쿠이, 작은오빠 랑카이와 함께 엔타운에 왔지만 일본어 한 마디 할 줄 모르는 그들에게 일자리는 주어지지 않았고, 소매치기를 하던 도중 랑카이가 교통사고로 죽게 된다. 사고 현장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언어도, 신분을 증명할 방법도 없었던 그들은 결국 가족을 잃고 그대로 헤어진다. 글리코는 아게하에게 ‘아게하(호랑나비)’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그를 거두어주고, 아게하는 그의 주변에서 돈을 좇아 엔타운으로 흘러들어온 이민자들과 함께 얽혀 살아간다. 폭력과 위조지폐, 혐오와 연대로 이뤄진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는 특정 인물보다 공간과 분위기를 우선시한다. 하나의 이야기라기보단, 다양한 정체성의 파편들이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집단 서사에 가깝다. 거리에서의 생존, 언어의 단절, 억압된 욕망을 집단적으로 묘사하며 자본주의가 만든 위계 구조와 사회 주변부의 삶을 조명한다. 특징적인 점은 극중 대부분의 인물들이 제3국어를 쓴다는 점이다. 엔타운은 명확한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 경계의 공간으로, 그 안에서 인물들은 끊임없이 이름을 잃고 다시 부여받으며 공동체라는 허상의 안전망 안팎을 부유한다. 주인공들은 위조지폐를 만들게 되는데 사회에 슬쩍 흘러들어가려다 결국 색출되어 폐기되는 위조지폐의 모습에서 이민자의 삶이 얼핏 스친다.

영화는 블랙 이와이답게 어둡고 거친 톤이 전반을 지배한다. 핸드 헬드 카메라와 뚜렷한 그레인, 즉흥적인 컷 분할이 특징인데 정제된 미장센 대신 날것의 리듬이 살아 있다. 아직 블랙 이와이를 접하지 않았다면 단연 가장 먼저 추천하는 작품. 일본 얼터너티브 록 장르 흐름을 반영한 음악과 중독성 있는 글리코의 목소리도 매력 포인트다.
〈4월 이야기〉

〈4월 이야기〉는 봄에 추천하는 영화 리스트 단골손님으로, 도쿄로 상경한 주인공 우즈키(마츠 다카코)의 낯선 환경에 대한 긴장과 설렘을 다룬 작품이다. 러닝타임이 고작 67분으로, 일반적인 상업영화의 분량에 미치지 못하지만 극도로 축소된 이야기 구조를 통해 개인의 감각 경험에 오히려 집중했다. 하나의 감정을 밀도 있게 담은 최적의 러닝타임이다.

홋카이도에서 도쿄로 상경한 대학 신입생 우즈키, 그가 고등학생 시절 짝사랑했던 선배가 도쿄에 있다. 영화는 이사나 수업 참여, 동아리 가입, 서점 탁생 등 우즈키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가는 일상을 따라가는데 그 안에는 전형적인 서사 구조나 갈등, 반전이 없다. 카메라는 플롯이 아닌 우즈키의 표정, 창밖 풍경, 사물의 디테일, 그리고 봄비나 벚꽃 같은 계절의 감각을 포착한다. 극 중 대사는 최소화되어 있고, 많은 장면이 정적인 롱테이크로 구성되었다. 인물 내면을 설명하기보단, 관객이 감정의 결을 따라가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짝사랑했던 선배와의 로맨스는?’이란 의문이 들 테지만, 〈4월 이야기〉가 특별한 지점이 여기 있다. 영화는 사랑이 아닌 ‘사랑의 시작점’을 다룬다. 우즈키는 ‘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 공간’을 배회하고, 고대하던 선배와의 마주침은 어떠한 서사도 없이 그대로 흘러가 버린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 사이의 아주 작은 연결고리가 생겼을 때, 영화는 막을 내린다. 새 학기, 새 시작, 그리고 사랑의 시작까지 영화는 철저히 ‘시작’이 주는 낯섦과 설렘을 담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사랑의 무르익음은 군더더기로 제거되었다. 일본은 새 학기가 4월에 시작한다. 달뜬 일본의 4월을 느린 프레이밍과 잔잔한 음악, 호흡으로 그려낸 작품.
〈릴리 슈슈의 모든 것〉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10대 청소년기의 고립과 폭력, 그리고 해체를 다룬다. 영화는 원래 인터넷 연재소설로 시작되었다. 감독은 1999년부터 가상의 가수 ‘릴리 슈슈’ 게시판을 운영하며 독자와 함께 극의 일부를 채워갔고, 그 실험을 바탕으로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영화화했다. 영화가 2000년대 초반 일본 사회 정서를 그대로 담을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실제 초기 디지털 시대를 기반으로 서사 실험을 한 덕택이다. 팬들 사이에선 최고 작품으로 손꼽히는데, 실제로 감독도 “유작을 고르라면 이 작품으로 하고 싶다”라고 말했을 정도.

이야기의 중심에는 두 중학생 유이치(이치하라 하야토)와 호시노(오시나리 슈고)가 있다. 두 사람은 친구였으나 호시노는 한 사건을 계기로 반의 리더가 되어 이지메를 주도하고 유이치는 그 피해자가 되어 두 사람 사이에 계급이 생긴다. 유이치는 현실을 잊기 위해 릴리 슈슈 음악과 온라인 팬 커뮤니티 활동에 몰입하고, 그곳에서 자신을 늘 챙겨주고 위로하는 아오네코에게 특별한 유대를 느낀다. 영화는 온라인상 소통 공간과 교실이란 폭력적인 현실 공간을 교차 편집하여 두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감정의 분열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웹상에서 따스하게 위로하는 사람도, 현실에선 주먹질을 휘두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성장영화가 아니다. 좋은 친구에서 가해자로 전복된 호시노의 모습에서 폭력은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정체성의 왜곡으로 확장됨을 시사한다. 보기 편한 영화는 아니다. 청소년기의 고립과 고통을 끝까지 몰아붙이는 서사와 연출에 내내 괴롭고 불편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 손이 가는 이유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경험했던 10대의 파괴적 궤적을 정교하게 그렸다는 것, 그리고 이를 ‘음악’으로 풀어냈다는 점이다. 몽환적인 전자 음악부터 드뷔시의 클래식까지 혼재되어 주인공 유이치의 감정축을 표현한다.
〈립반윙클의 신부〉

감독이 집필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립반윙클의 신부〉는 기존의 화이트 이와이와 블랙 이와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이와이 월드다. 〈하나와 앨리스〉(2004) 이후 12년 만에 선보인 실사 장편 영화로, 디지털 시대 이후 인간관계의 변화와 고립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 나나미(쿠로키 하루)는 비정규직 교사로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으로 학교에서 놀림받고 있다. 그가 유일하게 목소리를 내는 곳은 SNS 플래닛. 그곳에서 만난 남성과 결혼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남편과 달리 결혼식에 초대할 가족이 없는 나나미는 플래닛에서 알게 된 아무로(아야노 고)를 만나 하객 아르바이트 서비스를 이용하게 된다. 시작부터 거짓인 결혼 생활을 이어나가기 위해 끝없이 거짓말을 이어가고 결국 남편과 이혼하게 된다. 의지할 곳 없이 홀로 남은 나나미는 아무로의 소개로 대저택 가사도우미 일을 시작하는데, 그 과정에서 만난 여성 마시로(코코)와 함께 하면서 나나미는 점차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분명하지 않은 삶으로부터 벗어난다. 영화는 나나미가 빌린 관계들 안에서 다시 인간적인 접촉이 발생하고, 끝내 상실을 받아들이며 독립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이와이 슌지는 이 작품으로 인간이 더 이상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지 못하는 시대에 어떻게든 타인과 연결되기 위해 ‘가짜’를 빌리는 현상을 다룬다. 친구, 결혼식, 장례식까지 모든 것이 타인에게 의뢰가 가능한 사회에서 감독은 오히려 그 가짜 관계 안에서 피어나는 감정과 유대를 보여준다. 나나미가 마시로와 함께 지낸 시간은 짧지만 그 안에서 나나미는 삶의 균열을 견딜 수 있는 진짜 감정을 경험한다. 영화는 SNS 메시지 화면 삽입, 극도로 절제된 음악, 롱테이크와 정적인 쇼트 구성 등으로 고립된 정서를 형상화하는데, 이를 통해 관객은 감정을 체험하게 된다. 특히 러닝타임 내내 반복되는 침묵과 정적인 시선 처리는 타인과 연결되지 못하는 인물의 상태를 드러낸다. 잔잔한 영화의 킥이 되는 건 역시 아무로의 존재다. 아무로는 SNS에 의존하는 나나미와 같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척하며 이용해 이득을 취하는 존재로, 선과 악이 교묘히 섞여있다. 그리고 짐짓 지루할 뻔한 서사에 아무로의 속을 알 수 없는 행보는 긴장감을 더한다. 새로운 이와이를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추천하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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