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스터 키튼은 온전히 자기만의 새로운 영화언어를 발명한 위대한 예술가 중 하나다. 영화학자 데이빗 보드웰은 「영화예술」에서 버스터 키튼이 보여주는 자유자재의 ‘공간’의 희극에 대해 “버스터 키튼의 슬랩스틱 코미디는 우리를 둘러싼 주변의 사물과 환경과의 ‘관계’로부터 출발한다는 앙드레 바쟁의 관찰을 확인시켜 준다”고 말한다. 이처럼 각각 프랑스와 미국을 대표하는 영화이론가이자 평론가인 앙드레 바쟁과 데이빗 보드웰이 한목소리로 극찬하는 버스터 키튼은, 인간의 육체와 공간의 무한한 활용을 통해 영화라는 매체가 활용할 수 있는 운동 이미지의 극한을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그런 극한의 운동 이미지 속에서도 감독이자 주연배우인 버스터 키튼은 딱히 표정이 없다. 왜 웃지 않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행복하다는 것을 표현할 다른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

버스터 키튼이 생각하기에 배우의 ‘표정’이란, 감정과 상황을 전달하기에 너무나도 손쉬운 것이다. 그는 영화가 ‘육체와 운동의 예술’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닫고 실천한 인물이다. 앙드레 바쟁과 데이빗 보드웰 외에도 그에게 찬사를 보낸 저명한 인물은 또 있다. 철학과 문학, 그리고 대중문화 전반을 아울러 영향력 있는 저작들을 꾸준히 써낸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이자 작가인 질 들뢰즈도 버스터 키튼에게 매혹된 인물 중 하나였다. 대사와 사운드가 부재한 무성영화는 배우의 육체 자체가 ‘언어’가 된다. 버스터 키튼은 그 육체 언어의 마술사였다. 들뢰즈가 보기에, 그의 영화언어가 현대의 씨네필들을 흥분시키는 이유는 인물의 비상과 추락, 위기와 안심, 그리고 인간관계의 모든 양상을 육체의 운동 에너지로 연출하고 결국 웃음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버스터 키튼(1895~1966)과 찰리 채플린(1889~1977)은 동전의 양면처럼 1920년대를 풍미했다. 할리우드 고전기를 빛냈던 맥 세네트, 해롤드 로이드, 해리 랭든, 그리고 스텐 로렐과 올리버 하디의 단편들과 더불어 그들은 전세계 희극영화 전통의 화수분이 됐다. 그들은 단지 희극에 헌신한 것뿐만 아니라 운동언어의 예술인 영화를 고전 연극과의 단절로 이끌었다. 소련에서 몽타주 이론의 싹이 자라고 있을 때, 미국에서 키튼과 채플린은 마임의 리듬을 영화 매체의 리듬으로 승화시킨 것. 그들은 〈국가의 탄생〉(1915)을 통해 현대 영화언어의 창시자라 불리는 D.W.그리피스의 영화문법에 새로운 융통성을 부여하면서, 또한 그리피스의 협력자로서 체계적인 희극 미학을 완성했다. 참고로, 키튼의 첫 장편영화 〈세 가지 시대〉(1923)는 서로 다른 시기에 발생한 이야기를 동시에 진행한 그리피스의 〈인톨러런스〉(1916)를 패러디한 작품이다. 한편, 찰리 채플린이 특유의 걸음걸이나 익살스러운 표정 등을 통해 웃음을 유발하기도 했다면, 버스터 키튼은 주변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는 ‘위대한 무표정’(Great Stone Face)으로 일관하며, 그를 자기만의 독보적인 개성으로 만들었다.


1985년 미국에서 태어난 버스터 키튼은 배우였던 부모님을 따라 보드빌 무대에서 곡예, 서커스 등이 가미된 공연을 통해 아크로바틱 연기를 익혔다. 프랑스에서 군복무를 끝내고 돌아와 1920년대 초반 자신이 연출한 코미디 시리즈에 직접 주인공으로 출연하면서 무표정한 얼굴의 슬랩스틱 연기로 큰 인기를 끌었다. 1920년대 말까지 보통 1년에 2편 정도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우리의 환대〉(1923), 〈셜록 주니어〉(1924), 〈항해자〉(1924), 〈일곱 번의 기회〉(1925), 〈제너럴〉(1926), 〈스팀보트 빌 주니어〉(1928) 등이 대표작으로 기억되며, 찰리 채플린을 비롯해 해롤드 로이드 등과 함께 무성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긴장감 넘치는 연출과 탁월한 운동 이미지, 명쾌한 서사를 뒷받침하는 기발한 촬영과 조명, 상상을 초월하는 공간과 소품 활용, 그리고 과감하고 창의적인 슬랩스틱 연기로 ‘버스터 키튼의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무성영화의 황금기가 끝나갈 즈음 유성영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그는 1928년에 자신의 소규모 스튜디오를 포기하고 MGM 영화사의 고용감독으로 들어가면서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그의 초인적인 아크로바틱 연기가 대사와 혼연일체가 되기에는 당시의 기술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찰리 채플린 역시 유성영화 도입 후 침체기를 맞았지만 1919년 D.W. 그리피스, 매리 픽포드, 더글러스 페어뱅크스와 함께 배급회사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를 설립하면서 보다 나은 여건에서 일했다. 반면 근근이 연명하던 버스터 키튼은 이후 빌리 와일더의 〈선셋 대로〉(1950)에서 어딘가 자기 반영적인 느낌을 풍기는, 잊혀진 무성영화 시대의 스타로 카메오 출연했고, 찰리 채플린의 〈라임 라이트〉(1952)에서 채플린의 어시스턴트 역으로 캐스팅되어 여전히 녹슬지 않은 연기력을 과시했지만, 이제 할리우드에서 더 이상 그의 아름다운 육체의 리듬을 볼 수 없게 됐다. 마치 〈고 웨스트〉(1925)에서 뉴욕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나머지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버스터 키튼의 운명처럼 된 것. 하지만 이후 그의 영화는 자크 타티, 오슨 웰스, 짐 자무시를 비롯해 홍콩의 성룡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오마주의 대상이 됐고 앙드레 바쟁, 데이빗 보드웰, 로저 에버트, 질 들뢰즈와 같은 평론가가 학자는 물론 살바도르 달리와 데이빗 보위 등 경계를 초월한 예술가들에게까지 전방위적인 영향을 미쳤다.
▶ 버스터 키튼에 관한 글은 두번째 기사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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