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주인 버스터 키튼 ②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위대한 무표정’

버스터 키튼은 주변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는 ‘위대한 무표정’(Great Stone Face)을 자기만의 독보적인 개성으로 만들었다.

〈제물〉
〈제물〉

버스터 키튼은 웃지 않는데, 왜 우리는 그를 보고 웃는 걸까. 영화에서 운동 이미지는 항상 호기심의 대상이며, 영원히 그치지 않는 탐구의 대상이다. 우리의 눈은 영화를 보면서 프레임 구도에 사용된 많은 형식 요소들을 하나의 통일된 전체로 조화시키기 위해 자동 반응을 하게 된다. 여러 요소를 동시에 감지하는 인체의 눈을 고려해볼 때 운동 이미지의 죽음은 바로 영화의 죽음이라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고차원적인 상징 구조와 담론 체계를 갖춘 영화라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운동 이미지의 감각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운동을 기호에 의해 재현함으로써 우리는 운동을 현재화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재화는 항상의 결여의 틀 속에서만 일어난다. 왜냐하면 기호의 사용은 언제나 그 기호가 반영하는 대상의 결여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환대〉
〈우리의 환대〉

이상하게도 역사적으로 운동 이미지는 문화가 통제력을 발휘할 수 없는 다른 극단, 즉 ‘문화’나 ‘제도’가 아니라 ‘자연’에 속해있는 것처럼 보였다. 말하자면 ‘언어’와 완전히 분리된 것처럼 여겨졌다. 그렇게 운동 이미지는 언어로부터의 추락, 즉 원초적 충동에 의해 지배되는 유아기의 전(前) 상징적 공간으로 회귀하는 것이라고도 생각됐다. 인간이 운동 이미지를 언어 속에 포함하려 노력했던 것은 어쩌면 이러한 운동 이미지의 타자성에 대한 인식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운동 이미지에 대한 감각과 인식은 더 나아가 영화 속 모든 질서와 상징의 바탕이 된다. 영화의 역사가 무성영화로 시작했다는 것을 떠올려 보라. 영화는 온통 운동 이미지로 이뤄져 있다. 그걸 증명하는 것이 바로 버스터 키튼의 영화다.

〈고 웨스트〉(왼)와 〈헌티드 하우스〉

다시 말해, 버스터 키튼의 영화들은 텍스트가 의미를 획득하는데 있어 운동 이미지가 중심 요소가 되는 과정, 즉 의미가 운동 이미지에 의해 구현되는 과정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그의 영화가 지금도 지속적으로 환기되는 부분은 바로 그 현대적 면모들 덕분이다. 키튼의 카메라는 관객으로 하여금 곤경에 빠진 주인공에게 거리를 두고 관찰하게 만들다가, 어느 순간부터 결국 그에게 이입하여 감탄하게 만든다. 〈피고 13〉(1920)에서 감옥에서 탈출한 한 죄수와 옷을 바꿔 입었다가 결국 감옥으로 끌려가 곧 교수형에 처해질 것을 알게 되는 주인공, 〈헌티드 하우스〉(1921)에서 접착제를 엎어버려 손이 주머니에 붙어 강도를 보고도 쫓아낼 수 없는 은행 직원, 〈제물〉(1921)에서 ‘죽음의 총잡이 댄’으로 오인받고 경찰서장의 추격을 받는 주인공의 모습, 여기서 관객은 처음부터 주인공과 쉽게 감정의 동화를 이루지 못하는데, 그것은 키튼 특유의 냉철한 무표정과 잡식성의 패러디 효과와 맞물려 강한 정서적 이화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카메라맨〉
〈카메라맨〉

질 들뢰즈는 「시네마 1」에서 “버스터 키튼의 가장 중요한 역설은 희극을 큰 형식 속에 직접 끼워 넣는다는 역설이다. 희극이 본질적으로 큰 형식에 속한다는 것은 진실이지만, 키튼에게는 비견할 수 없는 어떤 것, 심지어는 오직 담론의 형상과 희극적인 특성의 상대적 삭제를 통해서만 큰 형식을 정복할 수 있었던 찰리 채플린과도 비교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고 썼다. 버스터 키튼은 희극적 행위와 비극적 상황의 결합을 통해 희극성을 영화 속에 새롭게 도입하고 사유했다. 사실주의에 있어 아는 것이란 곧 보는 것이며, 재현이란 곧 묘사이다. 더불어 사실주의의 기본 전제는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떠나서는 그 인간을 결코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스팀보트 빌 주니어〉(왼)와 성룡의 〈A계획속집〉

들뢰즈의 표현대로, 버스터 키튼은 자신이 출연하고 연출한 영화 안에서 거대하고 파국적인 환경으로 에워싸인 아주 작은 점과 같다. 〈항해자〉(1924)에서 ‘배’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자유자재로 펼치는 슬랩스틱 코미디와, 〈제너럴〉(1926)에서 적진 속에 홀로 남아 일대다의 외로운 싸움을 벌이는 그의 모습이 그렇다. 그러나 키튼의 독창적인 상상력은 바로 낯선 환경을 자신의 공간으로 만들고 주변의 지형지물을 끌어들여 지속적으로 희극적인 장치로 만들어 나가는 그 과도한 생산력과 친화력에 있다. 〈스팀보트 빌 주니어〉(1928)에서 (성룡이 1987년작 〈A계획 속집〉에서 그대로 따라 한) 무너지는 건물의 창틀 하나 사이에서 살아남는 스턴트의 기예처럼, 그가 보여주는 미학은 환경과의 화해와 동화를 초월한 생존의 미학이다. 들뢰즈가 보기에 그 생존의 미학이 채플린과 키튼의 세계를 구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측면이다.

〈제너럴〉
〈제너럴〉

〈제너럴〉(1926)에서 기차 제너럴호의 바퀴 빗장 위에 힘없이 앉아있는 조니(버스터 키튼)는, 기차가 천천히 움직이면서 그의 몸도 바퀴의 운동을 따라 천천히 원을 그리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희비극이 공존하는 그 장면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돌아가는 운명의 힘을 보여준다. 〈모던 타임즈〉(1936)의 채플린이 기계와 대립한다면 키튼은 기계들을 자신의 가장 소중한 파트너로 만든다. 그의 시각 기법은 세련되고 우아하면서도 기능적이고 단순하며 직접적이다. 버스터 키튼의 코미디는 본질적으로 공간적이며 그 희극성은 통일된 공간 내에 있는 사물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그의 끝을 알 수 없는 운동 이미지의 연쇄, 한정된 프레임 안에서 주변환경과 이루는 절묘한 육체의 기하학은 시대의 경계를 초월해 말 그대로 ‘모던’하다. 버스터 키튼이 시대를 초월한 레전드인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

▶ 버스터 키튼에 관한 글은 세 번째 기사로 이어집니다.

영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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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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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에 관한 이 글은 1부에서 이어집니다. 감독은 외계인의 위치를 잘못 짚는 범석의 모습을 통해 관객들도 교란한다. 범석과 종구는 둘 다 경찰이지만 겁도 많고 무능하다. 두 영화의 인물이 공유하는 무능한 경찰이라는 설정은 재난의 상황에 부재하는 정부를 드러내는 알레고리이지만, 동시에 나홍진이 관객에게 제안하는 유희적 게임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나홍진은 의도적으로 주인공을 재난과 같은 상황에서 무너지고, 혼란을 느끼는 보통의 사람으로 설정한 후 주인공에게 이입하는 관객의 감정을 역이용한다. 주인공의 불완전한 시점을 공유하는 관객은 감독이 설계한 거대한 인지적 함정 속에서 주인공과 함께 오인을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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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는 이미 예고편에서부터 외계인을 등장시키며 인간과 외계인을 둘러싼 정면 대결을 기대케 했다. 그러나 나홍진 감독은 외계인을 러닝타임의 50분이 지난 이후에 비로소 등장시킨다. 그렇다고 초반 50분 동안 외계인의 전사를 빌드업하는 것도 아니다. 이질적인 것이 한데 모여 있는 모호한 공간인 호포항에 관한 배경 설명도, 인물의 전사도 설명하지 않는다. 영화의 이해를 돕기 위한 모든 설명을 최소화한 채 그가 서사적 측면에서 관객에게 보여주기로 선택한 것은 그저 사소한 소문에서 시작된 일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져 가는 진행 과정이다. 관객은 주인공 범석 의 시점으로 그 과정을 따라간다. 그러나 범석은 사건에 관해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자꾸만 외계인의 위치마저 오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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