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록 서구에서 비롯된 문장이나, 왕이란 때론 태양과 같다. 그것은 왕이 하늘로부터 내려받는다는 ‘혈통’의 고귀함과 동시에 세상 곳곳에 빛을 뿌려 밝혀야 한다는 의무를 동시에 뜻한다. 그렇기에 〈왕과 사는 남자〉에서 폐위된 왕 이홍위를 맡은 박지훈 또한 태양과 같아야 했다. 이홍위, ‘단종’이란 묘호를 받기 전의 노산군은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적통이었으며 그 존재가 세상 곳곳에서 빛을 발했기에 그를 끌어내린 권력가들이 늘 두려워한 인물이었다. 그렇게 박지훈은 못다 뜬 태양이 되어 스크린에 섰다.
상업 영화 데뷔작에서 박지훈은 그야말로 태양이다. 태양을 잠시나마 응시하면 그 빛에 지울 수 없는 잔상이 생기듯, 이홍위를 연기한 박지훈은 그 찰나의 순간에도 덜어낼 수 없는 슬픔을 관객들에게 남긴다.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매김한 유해진이 그 이름값을 한다면, 박지훈은 그 곁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그 무게를 같이 짊어진다. 만일 영화상에 ‘올해의 콤비’라는 부문이 있다면 올해 가장 유력한 후보라고 단언할 정도다. 2월 4일 개봉을 앞두고 1월 23일 서울 종로구 모처에서 박지훈과 만나 〈왕과 사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 〈왕과 사는 남자〉의 클라이맥스 관련한 묘사가 서술됐음을 명시한다.
또한 극중 이홍위는 군호인 ‘노산군’으로 불리나 인터뷰 편의상 사후 받은 묘호 ‘단종’으로 표기를 통일한다.

영화 공개 후에 호평이 많이 나오고 있어요. 리뷰를 좀 찾아보셨나요? 그리고 개봉을 앞둔 소감은?
사실 첫 영화를 개봉하게 돼서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있고요. 지금 영화 시장이 몇 작품 안 나올 정도로 좀 어려운데, 그 안에서 대선배님과 훌륭하신 감독님과 소중한 추억을 하나 만들어낸 것 같아요. 너무 예쁜 추억들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해서 되게 감사해요. 저는 서치를 많이 안 하는 편인데 감독님이 막 보내주시더라고요. 감독님이 카톡으로 계속 보내주세요, 작품을 좋게 봐주신 말들을. 그래서 그거 보면서 '정말 또 하나의 좋은 추억이 생겼구나', ‘좋은 예쁜 작품이 생겼구나‘ 이런 걸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화에 출연하기까지 부담이 컸을 것 같은데, 어떻게 출연을 결심하셨나요?
사실 되게 마음이 무거웠어요. 어쨌든 이 비운의 왕 단종, 어린 선왕을 연기한다는 것 자체가 한편으로는 너무 죄송하기도 했고요. 저는 제 연기에 대한 의심이 되게 많은 사람이라 ‘스크린에 고스란히 제 얼굴을, 그 감정을 내가 헤아릴 수 있을까?’ 이런 고민들을 상당히 많이 했었던 것 같아요. 그런 부담감에 시달리고 있을 때 제가 기억나는 건, 장항준 감독님이 네 번째 미팅 때 “지훈아, 단종은 너여야만 해”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 말을 듣고 집으로 가는데 정말 영화를 한 편 본 것처럼 ‘어쩌면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감독님 믿고 도전해 봐도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 부담감을 결국 이겨내고 한다고 했습니다.
감독님이 네 번째 만남에서 확신을 준 이유가 있었을까요?
선뜻 제가 막 확답을 못 드렸거든요. 작품에 대한 고민이 많다, 이 대본을 보면서도 제가 이런 딥한 감정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심도 있고,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 단종의 마음을 제가 연기하는 게 상당히 죄송스럽다... 이런 말들을 감독님과 많이 주고받았어요. 작품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저라는 사람을 먼저 알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감독님이. 그래서 무겁게 작품에 대한 얘기보다는 되게 시시콜콜한 얘기도 하면서 ‘약한 영웅 때는 어땠냐’부터 시작해서 이런 얘기들을 많이 주고받았던 것 같아요.
감독님은 현장에서 어떤 식으로 디렉팅을 주시던가요?
리딩할 때나 현장에서나 순간 몰입하게 많이 해 주셨던 것 같아요. 계획적으로 ‘이렇게 해, 저렇게 해’라기보다는 그냥 되게 편하게, 되게 열려 계셨어요. 감독님 자체가. 그래서 사실 저도 되게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제가 “이렇게 해볼까요? 저렇게 해볼까요?”라고 얘기했을 때 배우가 편하게 연기할 수 있게끔 열려 계셨던 분이라 그때 감독님 보고 ‘와 정말 대단하신 감독님이구나’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번 영화를 준비하며 15kg를 감량했다고 하시더라고요. 어떤 식으로 체중 감량을 하셨는지요.
감독님께 하겠다고 말씀을 드린 상태에서 제가 제일 첫 번째로 이루어야 되는 목표는 일단 체중 감량이 제일 첫 번째였고요. 대본은 그 후의 문제였었어요. 일단 피폐해진 모습보다도 ‘피골이 상접했다’라는 표현을 좀 듣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냥 말랐다라기보다는 ‘너무 안 됐다, 입술도 버석하게 말라 있고’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어 보이는 애’처럼 보이고 싶었어요. 그걸 표현하기 위해서 진짜 사과 한 쪽만 먹으면서 버텼던 것 같아요. 끼니를 안 먹었고요. 촬영하면서도 물 같은 것도 최대한 좀 안 먹었던 것 같아요. 목소리에 그런 버석함이 있고 싶어서 물도 최대한 안 먹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두 달 반 조금 넘게 체중 감량을 목표로 했었습니다.
감독님은 단종을 나약하지 않은 인물로 그리고 싶어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단종을 어떻게 연기하려고 하셨는지.
저도 그 부분을 대본 보면서 많이 느꼈고요. ‘나약하지만은 않은 감정을 그리고 싶어하셨구나’라는 걸 대본 보면서 많이 느꼈어요. 그래서 단종이 너무 비굴하지 않게, 너무 비극적으로 끝나지 않게끔 그런 페이지에 한 글을 쓰시려고 하시는 게 의도가 너무 보여서 대본 보면서도 상당히 놀랐었고요. 마을 사람들을 만나가면서, 친분을 쌓아가면서 ‘그래, 역시 이 사람은 왕이었지’, ‘역시 왕이었었구나’ 하면서 점점 범의 눈이 되어 가면서... 마지막은 비극적으로 끝나지만 저도 결코 이 사람, 이 어린 사람은 나약하지만은 않았다(고 생각해요). 정통성을 충분히 가진 왕이잖아요. 역사가 바뀌었을 수도 있겠다, 이 어린 친구가 계속 이어왔었다면 비운의 왕이 아니지 않았을까 싶은 그런 의도들을 대본 보면서도 많이 느꼈어요. 저한테 어떻게 보였으면 좋겠다, 어떻게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얘기는 안 하셨는데 그 의도가 (대본에서) 충분히 보였어요.
이홍위가 소리를 지른다거나 감정을 격하게 표현하는 장면이 몇몇 있는데, 어떤 부분을 강조하고 싶으셨을까요?
금성대군에게 서찰을 보내고 ‘이제 더 이상 나로 인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다’라고 딱 느끼고, 태산이(김민)가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그 순간이 싫었을 것 같아요. 결국엔 또 나로 인해서 내 사람들을 잃어가는 모습을 마주했을 때 그 왕이 어떻게 호통을 쳤을까… 그런 부분들을 많이 신경을 썼었고요. 촬영할 때도 여러 테이크 찍어 봤어요. 정말 어린애처럼 소리를 질러보기도, 아니면 정말 이 정통성을 가진 왕이 소리를 내었을 때 어땠을지 상상하며 굵직한 발성으로 내보기도 시도를 했었었는데... 저도 그 후자가 맞다고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래서 여러 테이크를 찍어 봐도 유해진 선배님도 그렇고 장항준 감독님도 그렇고 후자가 더 낫다라고 말씀해 주셨던 기억이 있어서 그 방면으로 호통을 쳤습니다.(웃음)
이번 작품에서도 눈빛 연기가 인상적인데요. 〈약한영웅〉 연시은을 연기할 때도 그렇고 눈빛이 좋다는 말을 많이 들으세요. 이번 작품은 어떻게 차별화를 두려고 하셨나요? 작품에서 항상 눈이 촉촉하시던데 눈빛을 위해 안약이라도 쓰시는 걸까요?
차이를 두려고 신경 썼던 건 사실 없던 것 같아요. 그냥 대본을 보면서 슬픔의 감정을 조금 더 디테일하게 잡아가는 과정들을 그렸었던 것 같고요. 〈약한 영웅〉은 어린 친구의 소외적인 이미지였었더라면, 단종 캐릭터는 그 슬픔 안에 무언가가 있어야 된다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정말 나 홀로인 사람, 이젠 정말 가족도 없고 매화(전미도)와 유배를 떠나가야 할 때의 그 심정들을 생각하면서… 어리지만서도 조금은 무언가가 더 슬픔에 잠겨 있어야 된다라고 표현하는 게 맞다고 할까요? 〈약한 영웅〉 때는 ‘이제 나는 친구들이랑 안 사귈 거야, 그냥 나 혼자만 있을래’의 공허함이었다면 이홍위는 조금 더 단절되고 더 무기력해야 되고 더 밑에, 저 낭떠러지에 있어야 되는 그런 슬픔을 표현해야 된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렇게 디테일을 잡아봤습니다. 안약은 쓰지 않았습니다.(웃음)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속 한 장면 [쇼박스 제공]](https://cdn.www.cineplay.co.kr/w900/q75/article-images/2026-01-29/2a51503b-6956-4059-9d81-f7c16d440a56.jpg)
역사에서 당시 이홍위는 지금 박지훈 배우보다 어린데, 이런 부분도 고려를 하셨을까요?
그 부분은 신경을 쓰지 않았어요. 다만 그런 거는 있어요. 그 마지막에 개울가에서 물장난하는 그런 장면이 있는데, 사실 제가 개울가에서 앉아서 손 씻는 건데 해진 선배님이 그 장면을 보시고 “저 장면도 찍어 놔 보자”라고 해서 영화에 담긴 장면이에요. 그걸 보면서도 저도 납득이 간 게, 사실은 17살이면 사실 친구들이랑 뛰어놀고 할 그럴 시기일 나이인데 혼자 이렇게 유배해 오고… 그 장면을 보면서도 사실 가슴이 아팠던 게 ‘마을 사람들처럼이라도 뛰어놀고 싶지 않았을까?’, ‘왕이기 전에 청소년이고 어린 나이인데… 그런 부분을 장면 찍으면서도 신경을 썼었고 납득이 가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본인이 연기한 장면 중에 '잘 나왔다'라고 느낀 장면이 있나요?
모포를 걸쳐 입고 갓을 딱 메고 제 얼굴이 클로즈업 되면서 번개가 치는 장면이 기억이 나요.. 그 시점으로부터 홍위가 조금 변화하는 시기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 한명회, 유지태 선배님도 “이제는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범의 눈이 되었다”라고 말씀해 주시는데 그 기점으로부터 나약한 홍위가 아니라 ‘조금 더 뭔가 달라졌다’, ‘뭔가 조금 힘이 생겼네’라는 그런 포인트를 계속 신경 쓰면서 연기했었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제가 뭐 스스로에게 ‘잘 표현했구나’ ‘잘했다’고 생각한 건 아니고요. 제가 생각하고 찍은 부분들인 거를 제가 알기에 저렇게 나왔구나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촬영을 영월에서 진행했는데, 촬영 현장은 어땠나요?
역사에서처럼 실제 촬영지가 영월이었고 촬영장 가는 내내 너무 편안했고 기분 되게 좋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아직도 그립게 생각나는 건 아침에 촬영장에 딱 도착을 하면 새가 지저귀는 소리밖에 안 들려요. 그 순간들이 너무… 방 한 켠에 딱 앉아 있는 신이었는데 딱 앉아 있는데도 그냥 밖에서 새 지저귀는 소리만 들리고, 강가 쪽으로 가다 보면 그냥 물소리들 이런 것만 들리고... 정말 현장이 너무 고요했고 분위기가 ‘깨끗하다’라는 말이 좀 이상한가요? 아무튼 저는 그걸 느꼈어요. 정말 그 주변에 있는 공기가 깨끗하다라는 걸 되게 많이 받았었어요. 저만의 비하인드가 있습니다.

시사회 때 많이 울었다고 들었는데, 어떤 부분에서 특히 눈물이 나셨나요.
정말 찍으면서도 감정적으로 너무 힘들었었어요. 저는 시사회 때 영화를 처음 봤어요. 근데 그 마지막 신 찍을 때가 너무 기억에 남아요. ‘이제 저들한테는 죽기 싫다, 차라리 그대 손으로 죽겠다’라고 얘기를 하고 마지막을 직감했을 때... 그날 현장이 정말 엄청 고요했었어요. 중요한 신인 거를 알았기에 그 현장에 계신 스태프 여러분들이랑 감독님까지 현장이 정말 고요했었거든요. 실제로도 밤 촬영이었고. 근데 (유해진) 선배님이 그날따라 저를 안 보시는 거예요. 저는 바로 눈치를 챘어요. ‘아 선배님이 저를 보면 감정이 깨지시겠구나’라는 걸 느껴서 최대한 멀리서 인사드리고 이제 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말 문이 딱 열리고 선배님이 딱 들어오시는데 와, 그게 리허설이었는데도 너무 울었어요. 정말, 정말 오랜만에 보는 아빠의 모습이랄까요?
(눈물이) 그렁그렁하는데... 정말 제가 느껴본 최고의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선배님과 이런 호흡을 할 수 있다니’ 뭐 이런 그 북받침도 있었고, 아 정말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의 모습인 것 같더라고요. 찍으면서도 제 얼굴을 찍어야 되는데 전 눈물을 너무 흘려가지고… 정말 가슴이 아플 정도로 너무 눈물을 흘렸었어요. 그날은 제가 다시는 느껴보지 못할 최고의 날이지 않았을까… 감정적으로 제가 얻을 수 있었던 선배님이 주신 에너지도 그렇고 최고의 날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댓글 (0)
댓글 작성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로그인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