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살 무렵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직업이 기업 협상가였던 아버지는 수시로 외국을 드나들었다. 아버지의 출장 선물은 대개 레고 같은 장난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선물로 앨범 한 장을 사오셨다. 바로 그 음반, 마이클 잭슨의 1987년작 〈Bad〉를 듣고 또 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물론 우리 집에는 카세트테이프보다 레고가 훨씬 많았다. 나중 이 레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보관했다면 값이 꽤 나가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주식이 오른 뒤에 한탄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가정법 과거완료의 노예다.

나의 11살이 저랬다면 11살 때부터 세계를 들었다 놨다 했던 인물이 있다. 당시 그는 그룹의 막내였고, 리드 보컬리스트였다. 자료를 보면 불과 6살의 나이에 네 명의 형인 재키(Jackie), 티토(Tito), 저메인(Jermaine), 말론(Marlon)을 뒤로 하고 무대 중앙 맨 앞에 섰다고 전해진다. 그렇다. 천재의 등장,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이다.

매니저는 아빠인 조 잭슨(Joe Jackson)이 맡았다. 아이들에게서 재능의 싹을 발견한 그는 혹독하게 아이들을 다뤘다. “생일 파티도, 크리스마스도 없었어요. 공연, 공연, 공연, 녹음, 녹음, 녹음. 이게 전부였죠.” 요즘이었으면 아동 학대로 잡혀갔을 거라는 데 모두가 동의한다. 심지어 조 잭슨은 아이들이 미성년이었음에도 성인 무대에 세웠다. 이걸 ‘치틀링 서킷(Chitlin' Circuit)이라고 부른다.
치틀링 서킷은 흑인 노예 시절 때부터 있었던 흑인들만을 위한 전용 무대다. 즉 백인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안전하게 코미디와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장소였다. 치틀링은 돼지내장을 의미하는 단어다. 노예들이 고기는 못 먹고 남은 내장으로 만든 음식으로 배를 채우곤 했는데 여기에서 유래했다고 보면 된다.

1968년 당대 최고 레코드 회사인 모타운과 계약한 잭슨 파이브(The Jackson 5)는 히트곡을 연속으로 발표하면서 최고 인기 그룹으로 부상했다. 이때 나온 노래 중 하나가 ‘I Want You Back’이다. 마이클 잭슨의 나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불과 11살. 계속해서 ‘ABC’, ‘The Love You Save’, ‘I’ll Be There’까지, 잭슨 파이브는 4장의 싱글을 1970년에 걸쳐 ‘연속’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려놓았다. 이른바 ‘흑인 아이돌 그룹’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잭슨 파이브의 등장은 시대적으로도 중요성을 지닌다.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는 비극적인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암살 사건(1968년 4월 4일), 찰스 맨슨(Charles Manson)이 이끄는 히피 집단에 의한 배우 샤론 테이트(Sharon Tate) 살해 사건(1969년 8월 9일), 롤링 스톤스(The Rolling Stones)의 공연에서 벌어진 흑인 청년 살해 사건(알타몬트의 비극) 등등. 그 결과, 사랑과 평화를 외친 히피에 의해, 혹은 그들이 모이는 장소마다 범죄가 발생한다는 책임론이 터져 나왔다.
그러면서 1960년대 이상적 미국을 꿈꿨던 정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약물 남용과 각종 범죄가 겹치면서 히피 운동은 점차 힘을 잃었다. 이런 절망 속에서 등장해 순수함과 밝은 에너지가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 그룹이 잭슨 파이브였다. 즉 잭슨 파이브를 통해 그래도 세상에 아직 희망이 남아있다는 위안을 얻었던 것이다.


마이클 잭슨은 당연히 솔로도 병행했다. 2집 〈Ben〉의 타이틀 ‘Ben’(1972)은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오르면서 크게 히트했다. 그러나 이 곡을 제외하면 강력한 한방이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마이클 잭슨의 야망은 실로 거대했다. 그가 1978년에 쓴 메모가 2013년 발견되었는데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나는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을 것이다. 나는 환상적일 것이다. 깊이 있게 파고들고 파고들 것이다.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들이 이루어 놓은 것을 넘어설 것이다.“

이 즈음 마이클 잭슨은 운명을 실현해줄 파트너를 만났다. 그렇다. 퀸시 존스(Quincy Jones)다. 당시 그는 〈오즈의 마법사〉의 흑인 버전인 〈더 위즈(The Wiz)〉에서 허수아비 역을 맡아 촬영을 하고 있었는데 퀸시 존스는 이 영화의 음악 담당이었다. 원래 재즈 음악가로 출발한 퀸시 존스는 1957년 프랑스로 가서 나디아 불랑제(여성 클래식 음악가이자 교육자)를 사사했다. 1960년대에는 작곡가, 편곡자, 프로듀서, 영화음악가로 명성을 떨쳤고, 흑인 최초로 음반사 임원을 맡기도 했다. 퀸시 존스의 지휘 아래 마이클 잭슨은 1979년 통산 5집 〈Off The Wall〉을 내놓으면서 솔로로서도 전설의 출발을 알렸다. ‘Don’t Stop Till You Get Enough’와 ‘Rock With You’로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랐고, 그래미에서는 최우수 남성 알앤비 보컬 퍼포먼스 부문을 수상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 모든 성공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1982년 마이클 잭슨은 팝 역사상 최고 걸작이라 할 〈Thriller〉를 발표했다. 이 음반은 심지어 경영난에 빠져있던 소속사 CBS만이 아닌 미국 음반 산업 전체를 구했다. 퀸시 존스는 앨범 제작 전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Off the Wall〉이 800만장 정도 나갔잖아? 이번엔 600만장만 나가도 대성공일 거야.” 퀸시 존스의 희망은 보기 좋게 부서졌다. 〈Thriller〉는 보수적으로 추산해도 6000만장 이상이 팔렸다. 1억장이 넘는다는 주장도 있다. 이 음반 덕에 1983년 미국 음반 산업은 4.7%나 성장했다. 사실상 이 앨범 하나가 멱살 잡고 하드캐리한 셈이다.
▶ 마이클 잭슨에 관한 배순탁 작가의 글은 두 번째 기사로 이어집니다.
배순탁 음악평론가,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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