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배우 이연과의 만남은 1부에서 이어집니다.


〈소년심판〉이나 〈파고〉는 상황은 다르지만 십대 청소년의 어두운 면을 연기하는데요. 이연의 밝음과는 상반되는 그 어두움이 버거웠을 것 같아요.
현실과 너무 괴리가 커서 준비할 때부터 과정이 어려웠어요. 저한테 계속 그들의 심리 상태를 입혀 나가요. 상상 속에서 저한테 상처를 내보기도 하고, 도덕적인 지점을 끊어보기도 하고. 근데 상상을 하면 실제 감정이 묻어나잖아요. 그게 쌓이면 진짜 우울해져요. 그런데 그렇게 해야 결과가 잘 나오니까. 그런 경험을 하면서 ‘무엇이든 될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해요. 여러 관계와 상황, 환경이 지금의 나를 만든 거구나. 만약 다른 환경이었다면 내가 어떤 사람이 됐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구나. 계속 그 가정들을 인물에 씌우다 보면 진짜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특별한 역할이 이연을 찾는 것 같은데, 그럴 경우 과감하게 선택하고 아낌없이 투자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절해고도〉의 출가한 소녀 ‘지나’이자 십대 비구니인 ‘도맹’(법명) 연기를 예로 들어볼게요. 김미영 감독님이 ‘도맹 역할을 해준다면 가발을 준비하겠다’ 제안했고, 소속사도 그 조건을 검토 중이었는데, 오히려 거두절미하고 “괜찮아요, 삭발하겠습니다” 한걸로 알고 있어요.
그게 가장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힘들 것 같으면 이 역할을 안 하면 되잖아요. 적당히 모자나 가발을 쓰고 하는 게 더 이상해요. 왜냐하면 저는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자신감이 떨어져요. ‘내가 이 사람으로 보일 수 있어’ 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하고, 어느 순간 모니터를 보면 정말 제가 그 사람으로 보여요. 그런데 적당히 준비하면 그 순간이 오지 않더라고요. 말 그대로 ‘연기’하는 게 느껴지고요. ‘이보다 더 몰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라는 감각을 느낄 때까지 가기 위해서, 그 사람을 저한테 ‘묻히는’ 작업을 계속 하는 것 같아요.

배역을 완수하려는 욕심 한편으로, 앞뒤 재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또 욕심이 없는 것 같아요. 가령, 준비하던 다른 작품들도 있었을 텐데 머리를 민다는 것이 굉장한 모험이죠.
그 걱정은 산업이 만든 환경도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여성 배우들한테는 더 그렇고요. 역할 다양성이 부족한 환경에서 ‘머리를 빡빡 밀면 다음 작품이 안 들어올 수도 있다’는 고민을 과연 남자배우들도 심각하게 할까요. 물론 이것도 제 성향 같은데, ‘해야 되면 해야지’ 라고 뒷일을 크게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아요. 지금 나한테 주어진 게 이거고, 내가 선택했다면 여기에 최선을 다해야 그 다음이 있다고 봐요. 다행히 당시 차기작이 정해진 게 없어서 더 그랬던 것 같기도 하지만. (웃음)
어떤 면에서는 이연 스스로 매 작품 강렬한 이미지로 그 전의 이미지를 갱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품 이미지로 선입견이 생기거나 하는 경험은 없었나요.
있었죠. 〈담쟁이〉 찍고 나서 DM이 진짜 많이 왔어요. 외국 친구들한테도 글로벌하게. “Are you queer?”나 LGBTQ 관련한 메시지가 많이 왔어요. 제가 중성적으로 생긴 건 사실이니까 그건 어쩔 수 없어요. 근데 저는 배우는 어떤 것도 확정 지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질문에 “노”라고 하고 싶지도 않고 “예스”라고 하고 싶지도 않아요. 관객이 상상한 대로 마음대로 상상해라, 하고 싶은 만큼 해라, 그냥 그렇게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냥 언제나 맡은 캐릭터를 완벽하게 연기해야 하고, 그 순간 진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 같아요.

커리어의 서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독립영화인 〈절해고도〉에서 삭발을 한 것이 넷플릭스 시리즈 〈소년심판〉과 굉장히 잘 어울렸어요. 마치 뒤를 예상한 전략처럼 엄청난 행운으로 볼 수 있죠.
물론 대중적으로 더 잘된 작품은 있죠. 하지만 그건 제 손을 떠난 결과일 뿐이고요. 전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걸 한 거예요. 그런데 말씀하신 것처럼, 그 과정들이 다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신기해요. 사실은 〈담쟁이〉를 잘 봐주신 김미영 감독님과 만나 〈절해고도〉를 하게 됐다고도 할 수 있고, 머리 빡빡 밀고 〈소년심판〉만 한 게 아니라 〈D.P.〉도 했거든요. 〈D.P.〉 캐스팅 제안이 들어왔을 때 우리 소속사에서 “지금 머리가 빡빡이다” 라고 했는데, 한준희 감독님이 “뭐 어때요? 가발 쓰면 되지” 하셨어요. 〈약한영웅 Class 1〉(2022) 때도 〈방과 후 전쟁활동〉을 하느라 숏컷이었는데 가발 쓰면 된다고 하셨고요. 그래서 외형이 어떻든 감독이 배우를 정말 원하면 어떻게든 같이 하게 된다고 믿기로 했어요. (웃음) 그래서 더더욱 현재 나한테 주어진 걸 잘 해내려고 하는 거죠.
외형적인 부분을 장벽으로 느낀 적도 있나요. 또래 여성 배우들에 비해 보이시한 스타일은 분명 관습적인 캐스팅 라인업에서 벗어나 있는데요. 지금은 강점이 된 부분이 예전에는 ‘나는 다른 배우들이랑 너무 다른가?’ 하고 비교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그런 고민을 안 해본 건 아니었어요. 실제로 소속사에서도 그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거든요. 배우를 과일로 비유하자면, 저는 딸기는 아닌 것 같다, 거봉 같다고 했어요. 좋은 시나리오를 많이 하고 싶은데 제 이미지가 거봉이다 보니까 쉽게 제안이 들어오지 않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나도 조금 더 딸기가 되어야 하나? 그래야 딸기 옷을 입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엄청 많이 했어요. 근데 죽어도 딸기는 못 되겠는 거예요. ‘이건 진짜 내가 아니잖아!’ 하는 생각이 올라오는 거죠. 이렇게 하면 배우로서도 자연인으로서도 편하게 살 수 없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대표님한테 “혹시 저한테 딸기 시킬 생각이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대표님이 웃으면서 “딸기 시킬 생각이 전혀 없다”며 “넌 거봉 해. 최고의 거봉 하자. 네가 거봉이라서 같이 하자고 한 거다” 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제야 속이 시원해졌어요. 저는 최고의 거봉이 될랍니다.

이연 배우만의 그런 매력이 여러 감독과 제작자에게 호기심과 자극을 주는데요. 그처럼 자신만의 무기를 입증한 작품도 많았죠. 특히 〈길복순〉으로 ‘전도연 배우와 연기하고 싶다’던 꿈을 마침내 이루었는데요. 변성현 감독뿐만 아니라, ‘배우 전도연이 눈 여겨 본 배우, 인정한 배우’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을 것 같아요.
제가 롤모델로 생각하는 두 분이 있는데, 고 김영애 선생님이랑 전도연 선배님이에요. 두 분 연기를 보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냥 그 사람 같아요. 그게 저한테 되게 큰 울림을 줬고, 그게 배우로서 가닿아야 할 지점이라고 느꼈거든요. 그런 도연 선배님이 〈길복순〉 때 함께 하자고 연락을 주셨잖아요. 제 목표는 딱 하나였어요. 사랑하는 선배님 앞에서 내가 연기 못하는 후배로 기억되면 절대 안 된다! 그래서 선배님이 이후에 드라마 〈일타 스캔들〉(2023) 때 남행선(전도연)의 어린 역할로 어떠냐고 연락 주셨을 때 정말 감사했고 큰 안도가 됐어요. 내가 선배님과 함께 연기할 때 나쁘지 않았다는 증거인 거잖아요. 정말 기뻤죠.
▶ 배우 이연과의 만남은 3부로 이어집니다.
씨네플레이 이화정 객원기자, 사진 이상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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