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정의 딥톡스] “과거의 내게 감사해요.” '21세기 대군부인' '새벽의 Tango' '경주기행' 배우 이연과의 만남 ①

디톡스 하듯 깊은 호흡으로 배우에게 다가가는 토크. 영화 저널리스트 이화정이 만난 배우들.

배우 이연 (사진=이상엽)
배우 이연 (사진=이상엽)

“아주 큰 돈을 받아야겠어.” 도비서의 대사를 빌려 〈21세기 대군부인〉의 도비서를 향한 칭찬의 멘트를 전했다. 드라마 비서의 전형을 깬 이연의 연기가 통통 생기를 준다. 이러니 도비서만 따로 스핀오프로 보고 싶어진다. “정말요? 저희 엄마는 변우석 선배 멋있다고만 하지, 제 연기는 크게 쳐 주지도 않아요.” (웃음) 가족은 역시 칭찬에 박하다. 어쩔 수가 없다. 짧은 커트 머리에 딱딱한 수트 대신 팬츠와 폴로셔츠를 매칭한 보이시한 스타일링부터 감탄이 나왔다. 이연의 도비서는 어느 하나 부자연스러움이 없다. 작품의 해석도, 연기의 실현도 기존 틀에서 벗어난 ‘요즘’의 것이다. 이연의 진입으로, 로코는 새로운 21세기의 감각을 입는다. 정말 아주 큰 돈을 받기를 바란다.

〈21세기 대군부인〉 이전 넷플릭스 시리즈 〈D.P.〉(2021)와 〈소년심판〉(2022), 영화 〈길복순〉(2023), 그리고 TVING 시리즈 〈방과 후 전쟁활동〉(2023) 등 여러 OTT 기대작에서 이연의 지분은 확실했다. 사실 이연을 처음 인지한 건 독립영화 〈파고〉(2019)였다. 부모를 잃고 섬에 갇힌 채 살아가는 소녀를 연기한 이연은, 그 어둠 안에서도 관객을 움직이는 힘이 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게 첫 장편 데뷔작이었다. 이연은 연달아 성소수자의 사랑을 그린 〈담쟁이〉(2020)에서 눈치 보지 않는 용감한 멜로의 주인공으로 관객 마음에 내리꽂혔고, 〈절해고도〉(2023)에서는 복잡한 십대의 모습과 철든 승려로 거의 1인 2역에 가까운 연기를 완수했다. 이즈음부터 전여빈, 구교환, 박종환 같은 독립영화 출신으로 성과를 낸 배우들의 리스트가 업데이트되면서 이연의 이름 역시 자주 거론되기 시작했다.

〈길복순〉
〈길복순〉
〈길복순〉
〈길복순〉

‘중성적’이라는 지난 세대의 언어로 다 담기에 이연은 너무 새롭다. 짧은 머리와 얇은 선이지만 단단한 근육으로 뭉쳐진 이연은 ‘여성적’이라는 카테고리 하나에만 갇혀있지 않거나,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외형을 탑재한 배우다. 마치 〈네 멋대로 해라〉(1960)의 진 세버그나 〈청춘 스케치〉(1994)의 위노나 라이더 같은, 스크린이 사랑하는 숏컷 배우의 계보도에서도 이연의 헤어는 삐쭉 한 올이 삐쳐 나온, 요즘 스타일이다. 그렇게 시작부터 짧은 머리인 채로 씨네필과 대중에게 진입한 이연은, 굳이 자신을 변형시키지 않는 그 범주 안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 중이다.

성별과 나이를, 선과 악을, 장르를, 플랫폼의 경계를 자유롭게 오가며 관객과 시청자를 교란시키기를 꿈꾸는 새로운 종(種)의 배우의 도착. 이연이 넷플릭스 시리즈 〈소년심판〉에서 8살 아이를 살해하고도 뻔뻔하게 웃던 14살의 소년을 성인 여성 배우의 몸으로 연기했을 때, 사람들은 이연에게서 ‘악마를 보았다.’ 달라서 신선했고, 달라서 필요한 배우. 상당 부분 독립영화계의 주목할 만한 창작자들의 수혈을 받는 지금의 OTT 콘텐츠 시장에서 배우 이연은 촉이 있는 제작자나 감독이라면 놓치지 않을 법한 흥미로운 카드임에 틀림없다.

〈방과 후 전쟁활동〉
〈방과 후 전쟁활동〉
〈절해고도〉
〈절해고도〉


〈파고〉 이후 7년. 〈소년심판〉에서 ‘보는 순간’ 김혜수의 심장을 쿵쾅거리게 한 배우이자, 〈길복순〉을 함께 한 배우 전도연게서 ‘연기 천재’라는 칭찬을 들으며 호흡을 맞춘 배우. 2019년 시작부터 지켜 본 이연의 사진이 내 사진 폴더에 한가득이다. 지금의 이연의 생각을 나누고 싶어 연락을 취했다. “우리 인터뷰 할래요?” 앞뒤 잴 것 없이 이연이 말했다. “너무 좋죠. 너무 좋아요. 언제 만날까요?” 직진형의 이연다운 시원한 답변이 돌아왔다. 이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됐다.


배우 이연 (사진=이상엽)
배우 이연 (사진=이상엽)

얼마 전 MBC 〈전지적 참견 시점〉를 보면서 많이 웃었어요. 거침없이 다 보여주던데요. (웃음) 운전면허 갱신 안 한 게 이렇게까지 화제가 될 줄은 몰랐죠?

이 쑤시는 건 편집해주실 줄 알았는데 정말 다 나가더라고요. (웃음) 운전면허 갱신 안 한 걸로 전 국민한테 멍청이가 되고 보니, 괜히 말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냥 “면허 없습니다” 하면 됐거든요. 홍보팀과 얘기해 준비한 멘트도 있었는데 그걸 다 까먹은 거예요.

원래 성격 그대로 나오던데요. 배역으로 만나는 건 어쨌든 캐릭터라는 한 겹의 막이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건 완전히 다른 체감일 것 같아요.

그게 진실이니까요. 사실 저는 그렇게 예쁜 사람이 아닌데, 삐쭉삐쭉한 들꽃 같고 나무 같은데 그걸 다듬어서 내놓는다고 해서 그게 진실일까 싶은 거예요. 감정을 예쁘게 다듬는다고 보시는 분들이 그걸 진짜라고 느낄까요. 다듬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다듬어야 하잖아요. 앞으로도 활동을 계속해야 하는데 그 가꾸어진 모습에 책임질 수는 없을 것 같은 거예요. 배우는 자기 철학과 자기 인생으로 연기를 하는 거잖아요. 제가 진짜를 내보였을 때 피드백도 진짜잖아요. 재밌고 짜릿하고, 진짜 소통하는 것 같았어요.

〈21세기 대군부인〉

작품 선택이나 연기를 대하는 태도와도 비슷하게 들려요.

저는 배우 일이 인생을 조금 더 풍요롭게 만드는 과정 중 하나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연기는 저에게 부담 갖지 않고 쭉 갈 수 있는 일이에요. 제 목적은 딱 하나거든요. 죽을 때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게 작품 고를 때도 선택의 기준으로 이어지는 것 같아요. 제일 비겁한 건 안 하는 거라 생각하거든요. 선배님들도 언제나 “해봐야 한다”고 하세요. “해보고 느낀 다음에 왜 안 해야 되는지 아는 게 좋다” 라고요. 그래서 저도 “안 해보고 말하지는 말자” 라고 생각해요. 어떤 장르든, 어떤 감독님이든.

성소수자, 스님, 소년 등 다양한 캐릭터들을 보면서 선택이 대담하다 느껴왔는데요. 그런 가운데도 선택의 고민이 컸던 작품이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오히려 〈21세기 대군 부인〉을 하기로 하면서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대한 고민이 있었어요. 언젠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는데, 이렇게 빨리 하게 될 줄은 몰랐거든요. 결국 해야 되겠다 싶었죠. 저는 새로운 걸 도전할 때 모두가 처음인 밭보단 저만 처음인 밭이 좋거든요. 제가 처음이어야 배울 수 있더라고요. 저 빼고 다들 잘하는 사람들이 포진되어 있었잖아요. 내가 조금 삐그덕거려도 나를 잘 끌어줄 수 있는 곳에서 처음을 맞이하면 안정감이 생기고 더 열심히 하게 되는데, 이번 작품이 저한테는 그랬어요.

배우 이연 (사진=이상엽)
배우 이연 (사진=이상엽)

도비서는 전형적인 비서 역할에서 벗어나 이연만의 색깔을 보여주었는데요. 주어진 캐릭터를 어떻게 해석하고 새롭게 표현해야 하는지 귀신같이 찾아낸 이연의 ‘감’을 보면서 짜릿하더라고요.

감독님도 새로운 걸 원하셨고 그래서 저한테 많이 맡겨주셨어요. “네가 편하게 하는 게 맞다. 과하거나 부족하면 내가 잡아주겠다.” 저는 그게 가장 중요했거든요. 누군가 선을 정해줬을 때 오히려 더 자유롭게 펼쳐 보일 수 있는 것 같아요. 제 연기의 추구미는 더도 덜도 말고 그 역할처럼 보이는 거예요. 이번에도 어떻게 하면 진짜 그 사람처럼 보일까를 계속 연구하면서 했어요

스타일링, 성격, 말투까지 진짜 유학파로 경력을 쌓아 온 전문 비서, 도비서가 존재할 것 같은 결과물이었는데요. 따로 어떤 레퍼런스가 있었나요.

그냥 “나라면?”으로 시작한 것 같아요. 도비서는 고학력자가 아니다, 같은 객관적인 사실만 집어넣는 거예요. 만약 내가 영국 유학을 갔다 왔고, 어린데 유능해서 젊은 여성 CEO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비서를 하고 있다면 어떤 태도를 취할까. 어떻게 하면 서로 편해질 수 있을까 계속 연구했어요. 한 번도 다른 캐릭터에서 따온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대신 다큐멘터리를 많이 보거나 실제 인물을 많이 관찰해요. ‘저 사람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길 가다가도 생각해요. 그리고 결국엔 저를 믿는 것 같아요. 저라는 사람도 거리를 두고 보면 다른 사람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항상 저를 입히거나 제 안에서 파생하는 식으로 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좀 힘들었던 게 〈소년심판〉이나 〈파고〉 같은 작품들이었어요.

▶ 배우 이연과의 만남은 2부로 이어집니다.


씨네플레이 이화정 객원기자, 사진 이상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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