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레트로 무비투어 ② 주성치의 '희극지왕', 하루종일 바다만 바라봐도 지겹지 않은 섹오비치

〈희극지왕〉 속 영화촬영장이나 나이트클럽 정도를 빼면 홍콩섬 동남쪽 끝에 자리한 섹오 비치에서 거의 모두 촬영됐다.

섹오비치 (사진=주성철)
섹오비치 (사진=주성철)

홍콩영화 중 〈희극지왕〉만큼 공간의 정서가 깊이 배어든 영화는 없는 것 같다. 영화 속 영화촬영장이나 나이트클럽 정도를 빼면 홍콩섬 동남쪽 끝에 자리한 섹오 비치에서 거의 모두 촬영됐다. 사우(주성치)는 대배우의 꿈을 갖고 있지만, 정작 영화 촬영장에서 대사도 없이 고작 시체 역할 같은 엑스트라만 맡으며 살고 있다. 물론 아무리 작은 역할이라도 언젠가 멋진 배우가 되리라 꿈꾸며 진심을 다해 연기한다. 어려운 형편에도 그는 마을 복지회관에서 무료로 연기 수업을 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는 피우(장백지)가 동료들과 함께 연기 수업을 받으러 온다. 손님들 앞에서 즐거운 척 연기를 잘해야 매상을 높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연기 수업이 생각보다 제대로 이뤄지지 않음에도, 영화 내내 힘들게 살아가는 인물들이 오직 이곳 마을회관에서만큼은 더없이 여유롭고 평화롭다. 그런 회관에서 손님 하나 없는 연극을 하는 주성치와 그를 구경하는 꾀죄죄한 동네 사람들,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으며 세월을 버텨온 회관 마당의 늘어진 나무, 그리고 주성치와 장백지가 헤어지던 날의 그 눈부신 바닷가 풍경이 잊히지 않는다.

〈희극지왕〉
〈희극지왕〉

섹오 비치에 가려면 MTR 샤우케이완역 A3출구로 나와 버스터미널에서 9번 버스를 타고 종점인 섹오 비치에서 내리면 된다. 터미널에서 내려 섹오 비치 쪽으로 쭉 걸어가면 너른 주차장과 함께 유난히 하얗게 빛나는 섹오 비치가 반긴다. 거기서 섹오 빌리지 로드를 따라 들어가면 주황색과 파란색 등 원색의 소박한 집들이 반긴다. 곧장 왼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희극지왕〉에서 동네 조무래기들의 집합 장소인 마을 사당이 있다. 주성치가 얼마나 싸움을 잘 하는지 모르겠으나, 그는 그 나이 어린 친구들에게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표정으로 호신술도 가르쳐준다. 물론 주성치에서 배운 기술은 하나도 써먹지 못하고 실컷 얻어터질 뿐이다.

〈희극지왕〉 마을회관 촬영지 (사진=주성철)
〈희극지왕〉 마을회관 촬영지 (사진=주성철)

영화 속 모습 그대로 섹오 비치는 조그맣고 한적해 하루종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평화로운 공간이다. 그 영화 속 마을 사당의 양 옆으로 양옆으로 조그만 누들집과 레스토랑이 있다. 그늘 아래 테이블에서 넋 놓고 앉아 있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더 멀리 걸어갈 생각이면 바다가 나올 때까지 섬의 아기자기한 집들을 구경하며 쭉 걸어가도 좋다. 이런 데서 한 달 정도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예쁜 집들이 정말 많다. 그러다 탁 트인 바다와 만날 때의 기분은 그 무엇으로도 바꾸기 힘들다.

〈희극지왕〉 속 마을 사당 (사진=주성철)
〈희극지왕〉 속 마을 사당 (사진=주성철)

〈희극지왕〉의 주무대이자 주성치가 숙식을 해결하던 마을회관에 가려면 맨 처음 섹오 버스 터미널에서 내렸을 때, 섹오 비치쪽을 바라보는 위치에서 왼편에 섹오건강원(石澳健康院)이라 쓰인 커다란 입구를 찾으면 된다. 돌로 된 큰 아치문이라 못 찾을 염려는 없다. 그곳을 지나 쭉 들어가면 정말 영화와 똑같은 회관과 마당이 등장한다. 주성치와 장백지가 키스를 하던 늙은 나무가 서 있는 그 사랑스런 모습 그대로다. 이 나무에 기대고 있는 장백지의 턱을 손가락으로 치켜세우고는 엉덩이를 쭉 빼고 서 있던 주성치의 엉거주춤한 모습이 바로 영화의 포스터였다. 하지만 오래된 나무라 그런지 축 늘어져 영화 속 각도처럼 꼿꼿하게 서 있지 못해 마음이 아팠는데, 실제로 몇 년 전 홍콩에 큰 태풍이 몰아쳤을 때 그만 쓰러져서 뽑히기 직전까지 갔다. 다행히 지지대를 받쳐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이곳을 올 때마다 계속 기울고 있으니,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곳이 더 사랑스럽고 운치가 있는 건 마을회관을 지으면서 나무를 심은 게 아니라, 원래 있던 나무가 다치지 않게 설계해 그것을 피해 건물을 지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그 나무를 중심에 두고 빙 둘러싼 마당을 보면 알 수 있다. 어쨌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나무에 기대 폼나게 사진을 찍어보길 바란다.

〈희극지왕〉 촬영지임을 보여주는 게시판 (사진=주성철)
〈희극지왕〉 촬영지임을 보여주는 게시판 (사진=주성철)

마을회관은 얼핏 보면 그리스 산토리니의 온통 하얗고 파란 건물을 그대로 가져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많은 CF와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기도 했는데 기억에 남는 또 다른 작품은 〈성항기병〉의 3편인 유덕화 주연 〈홍콩탈출〉(1989)이다. 한때 ‘유덕화와 알란탐’만큼이나 콤비처럼 참 많은 영화를 찍었던 ‘유덕화와 막소총’의 영화다. 중국 본토에서 건너와 암흑가 조직에 발을 잘못 들여놓았던 유덕화는 여자친구와 함께 지긋지긋한 홍콩을 벗어나 파나마로 떠나는 게 꿈이다. 결국 그 꿈은 이뤄지는데 바로 〈홍콩탈출〉의 마지막 장면에서 파나마로 연출된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장강반점’이란 팻말과 더불어 회관 마당에 야자수를 몇 개 더 설치하고는, 유덕화가 멋진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손님을 맞고 있었다. 정말 감쪽같이 남미의 해변으로 탈바꿈한 것.

〈희극지왕〉
〈희극지왕〉

여기서 주성치는 동네 어르신들과 꼬마들을 모아놓고 ‘중국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조우의 연극 〈뇌우〉와 이소룡이 일본인들과 당당히 맞서 싸우던 영화 〈정무문〉을, 자기만의 새로운 버전의 연극으로 요약하여 무대에 올렸다. 영화 속 영화촬영장에서 정작 대사 한마디 없고 도시락 하나 받아먹기 힘든 엑스트라지만 마을회관에서만큼은 최고의 연기자다. 이곳 마당에서 연기를 가르치고 배우면서 장백지와도 가까워진다. 아쉽게도 나무 바로 뒤에 주성치와 장백지 사이로 보이던 세로로 긴 네모난 입구는 이제 사라졌지만, 건너편으로 보이는 백사장은 그대로다. 하지만 가진 게 없는 자신을 장백지가 사랑할 리 없다는 생각에 주성치는 선뜻 다가가지 못한다. 장백지는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그런 주성치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을 숨긴 채 애써 밝은 얼굴로 그 입구의 계단을 내려가 떠난다. 예전부터 고백을 할까 말까 망설이던 주성치는 용기를 내어 그때서야 저 멀리 떠나가는 그녀를 향해 외친다. “내가 먹여 살릴게!”

벤스 백 비치 바 (사진=주성철)
벤스 백 비치 바 (사진=주성철)
벤스 백 비치 바의 주성치 기념 사진 (사진=주성철)​
벤스 백 비치 바의 주성치 기념 사진 (사진=주성철)​

이제는 입구가 사라져 빙 둘러서 가야 하지만, 그 건너편 백사장까지 가면 영화에서 깡패들이 돈을 뜯어내던 노천카페가 있다. 카페라고 하기엔 너무나 소박하게 간단한 주류를 파는 바다. 촬영 당시 주인장과 주성치가 함께 찍은 사진과 사인이 말 그대로 덕지덕지 붙어 있다. 주인의 스타일을 그대로 일러주는 벽이다. 물론 지금은 그 벽을 포함해 영화 촬영의 흔적을 있는 그대로 두었던 그때 모습을 다 바꿔서 아쉽긴 하지만, 한동안 폐업한 것처럼 버려져 있다가 이제는 ‘벤스 백 비치 바’(Ben's Back Beach Bar)라는 이름으로 예전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한 가게 들어서 섹오 비치의 새로운 명소로 떠올랐다. 방문할 때마다 지나치게 번듯한 건물들만 새로이 생겨나고 영화 속 정서는 쇠락해져 가는 것 같아서 늘 쓸쓸하다가, 이 바가 다시 문을 열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 홍콩 레트로 무비투어 기사는 3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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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와 하우스트래블이 함께 하는 홍콩 무비투어, 그 다섯 번째 여행을 다녀왔다. 이번 투어의 핵심 테마는 영화를 통한 홍콩의 과거와 현재의 만남이었다. 1960년대 홍콩을 배경으로 한 오우삼 감독, 양조위 주연의 〈첩혈가두〉(1990), 홍콩의 고즈넉한 해변 마을 섹오비치를 배경으로 스타를 꿈꾸는 단역배우 주성치의 일상을 그린 〈희극지왕〉(1999), 그리고 1980년대 홍콩을 상징하는 혼돈의 무법지대 구룡성채를 재현한 〈구룡성채: 무법지대〉(이하 〈구룡성채〉, 2024)에 이르기까지, 옛 홍콩의 향수를 깊이 느끼고 돌아온 ‘홍콩 레트로 무비투어’라고나 할까. 각각 양조위와 주성치, 그리고 류준겸에 이르기까지 홍콩영화계의 세대교체를 느낄 수 있는 여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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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홍콩 개봉 당시, 역대 홍콩 박스오피스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운 정바오루이 감독 〈구룡성채: 무법지대〉(이하 〈구룡성채〉, 2024)는 1980년대 홍콩 장르영화 유산을 적극적으로 끌어온다. 사실상 그것 자체가 목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단 이제는 사라진 ‘구룡성채’(九龍城寨)라는 공간 자체가 그를 대표하는 상징과도 같다. 왕가위 감독 〈아비정전〉(1990)의 마지막 장면, 담배를 입에 문 양조위가 외출을 준비하는 낡은 집 장면이 바로 구룡성채에서 촬영됐다. 홍콩으로 건너와 은행강도를 벌이던 중국 본토 친구들의 비극을 그린, 맥당웅 감독 〈성항기병〉(1984)에서 출구 없는 미로에 갇혀버린 주인공들이 최후를 맞이한 곳도 바로 구룡성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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