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와일드 호스 나인'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https://cdn.www.cineplay.co.kr/w900/q75/article-images/2026-09-15/250c9e3b-e87c-49ae-9412-8778d6678860.jpg)
미국의 CIA가 세상을 쥐락펴락하던 1973년, CIA의 베테랑 요원 크리스(존 말코비치)는 동료이자 후배 요원 리(샘 록웰)와 함께 이스터 섬으로 떠난다. 그들이 활동한 칠레는 1970년에 사회주의자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취임했지만, 두 사람은 그의 운명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이제 두 사람의 손을 떠난 일. 크리스와 리는 이스터 섬에서 시간을 보낸다. 서로에게 좀처럼 말하지 못한 비밀을 품고서.

극작가 출신 마틴 맥도나 감독의 다섯 번째 장편영화 〈와일드 호스 나인〉는 그의 전작들보다는 한결 가볍다. 가볍다는 말이 적당할지는 모르겠다. 크리스의 말에 따르면 CIA는 세계 곳곳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그것은 당연히 은밀한 곳에서 벌어지는 공작이며, 대부분은 ‘미국이 원하는 자유세계’에 짜 맞추기 위해 행해진다. 그런 사람들이 등장하는 영화를 가볍다고 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는 고민해 볼 문제다.
그러나 아예 강간 살인사건으로 촉발되는 〈쓰리 빌보드〉나 평생 친구가 손가락을 자르니 마니 하는 〈이니셰린의 밴시〉 같은 전작들에 비하면 크리스의 괴짜 같은 발언들과 제멋대로인 그에게 심통이 나다가도 내심 동정과 존경의 눈빛을 보내는 리의 여행기는 시종일관 웃음을 자아낸다. 물론 그 웃음의 수위는 마틴 맥도나 감독 작품답게 센 편이다. F워드는 기본이고 성적인 농담까지 오가는 과정은 조금 불쾌할 수 있는데, 존 말코비치와 샘 록웰의 능청스러운 연기와 다소 순화된 자막 덕분에 그렇게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웃고 끝나는 영화라면 〈와일드 호스 나인〉가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초청되고 존 말코비치가 남우주연상을 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말할 순 없으나 〈와일드 호스 나인〉는 미국 역사를 뒤흔든 한 사건을 둘러싼 ‘음모론’을 정설로 내세운다. 그리고 크리스가 해당 음모론의 톱니바퀴였다는 점을 설정하면서 크리스와 리, CIA 칠레 지부장 MJ(스티브 부세미) 간의 기묘한 신경전으로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와일드 호스 나인〉의 매력은 관객들을 웃게 하는 크리스와 리의 케미가 그 뒤편에선 심리전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남아있고, 여행객을 빼곤 인적도 드문 이스터 섬에서 친구처럼 구는 이들은 각자의 시선에서 보면 달성해야 하는 목적이 있다. 비밀을 저변에 깔고 이어지는 이들의 여행은 코미디와 첩보전의 줄타기처럼 보이는데, 마틴 맥도나의 빼어난 각본이란 설계도를 토대로 배우들이 적재적소에 펼치는 연기로 만개한다.

그렇게 보는 재미가 쏠쏠한 〈와일드 호스 나인〉은 한편으론 참 모호하다. 그렇기에 더욱 깊은 여운을 남긴다. 1973년 이스터 섬의 두 CIA 요원은 우스꽝스럽지만 그들은 모두 조국을 위해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은 인물들이다. 그들은 은밀하게 일하며 드러나선 안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농담은 일견 세상을 향한 조소로 여겨지기도 한다. 분명 CIA라는 조직과 역사를 뒤흔든 사건(과 음모론)을 중심 소재에 갖다놓았지만 한편으로 그저 오랜 시간 함께한 동료 사이가 갈라서는 순간의 안타까움, 그림자에서 세계를 원하는 대로 쥐락펴락한 노병의 회한 등이 뒤엉킨 회화로 보인다. 좋은 작품 대부분이 그렇듯, 〈와일드 호스 나인〉은 관객이 어느 점에 초점을 맞추냐에 따라 다양한 방향으로 읽힐 수 있는 신비한 작품이다. CIA와 음모론에 초점을 둔다면 특정 국가의 패권이 쏠린 과거와 현재 세계의 원류 찾기로 보이는가 하면, 크리스라는 인물로 영화를 들여다본다면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노인의 씁쓸한 반추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와일드 호스 나인〉은 아주 잘 만든 오락영화임과 동시에 곱씹을 만한 작품이다. 주요 인물이 고작 해야 서너 명인 영화가 긴장 상태를 촉발하는 순간이나 코믹하게 지나간 대사가 돌아와 걸쭉한 감성으로 마음에 꽂히는 찰나는 문장으로 정확히 담아내지 못할 쾌감과 여운이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수차례 언급됐고, 적어도 내년 아카데미까지는 언급될 수밖에 없는 존 말코비치와 샘 록웰의 연기가 있다. 스티브 부세미와 파커 포시의 깨알 같은 존재감도 놓치면 아쉽다. 〈와일드 호스 나인〉는 오는 11월 4일에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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