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개봉 〈올란도〉 틸다 스윈튼에 관한 글은 첫번째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영국영화계의 이단아 데릭 저먼과의 만남은 꽤 의미심장하다. 데릭 저먼의 〈카라바조〉로 데뷔한 이후 연달아 8편에 출연했다. 데릭 저먼이 틸다 스윈튼에게 1차적으로 끌린 이유는 무엇보다 귀족적 외모 때문이었는데, 그가 비판하고자 하는 영국의 계급 사회를 표현하는 데 있어 그야말로 ‘맞춤형’ 배우였던 것. 〈카라바조〉에서는 작은 역할에서 점점 더 비중을 키워가게 되는데, 〈대영제국의 몰락〉에 이르러 하얀 드레스를 입고 절규하는 모습은 굉장히 강렬하다. 이후 〈에드워드2세〉를 통해서는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당시 친한 동료이자 틸다 스윈튼의 예술적 가능성을 열어준 멘토나 다름없던 데릭 저먼이 1994년 에이즈로 세상을 떠난 후에는, 1년 넘게 아무런 작품 활동도 없이 예술적 방황을 겪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오직 ‘말이 통하는’ 감독하고만 일한다는 감독 선택의 기준도 생겼다. 이에 대해 “데뷔와 동시에 마음이 통하는 한 감독하고만 쭉 함께 해서 생긴 습관”이라고 했다.

아마도 한국에 틸다 스윈튼 특유의 독보적 캐릭터와 이미지를 처음 알린 영화는 역시, 베니스국제영화제 수상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전세계에 알린 〈에드워드2세〉 이후 출연한 〈올란도〉다. 180센티미터의 큰 키에 선명한 금발과 창백한 얼굴, 그리고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강렬한 눈빛, 정말로 한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이미지라 해도 틀리지 않았다. 이를 두고 여러 언론에서는 ‘남장여자’나 ‘사이보그’에 비유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피터 월렌의 〈프렌드십스 데스〉(1987)에서는 외계에서 온 로봇 캐릭터를 연기했고, 〈맨 투 맨〉(1987)에서도 나치 독일 시절에 살아남기 위해 죽은 남편의 신분증을 가지고 남자로 살아가는 여자를 연기했다. 지난 2025년 제75회 베를린영화제에서는 명예황금곰상을 수상한 틸다 스윈튼이 직접 선정한 〈프렌드십스 데스〉가 스페셜 갈라 부문에서 상영된 바 있다.


당연한 수순이지만, 바로 그 독특한 자기만의 매력으로 이후 할리우드에도 진출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함께 출연한 대니 보일의 〈비치〉(2000)가 아마도 첫 번째 할리우드 스튜디오 영화일 것이다. 디카프리오가 태국 여행 중 우연히 맞닥뜨리게 되는 히피 공동체의 리더 역할이었는데, 틸다 스윈튼이 가진 독특한 이미지가 아니었다면 그 은밀한 공동체의 느낌이 잘 살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바닐라 스카이〉(2001)에서 생명현장 회사에서 일하는 신비스런 여자, 〈어댑테이션〉(2002)에서 니콜라스 케이지에게 소설 각색을 부탁하는 매력적인 스튜디오 간부도 비중은 적지만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역할이었다. 한편으로 〈영 아담〉(2004)은 이완 맥그리거의 전라 연기로 화제가 된 작품인데, 많은 이들이 오히려 틸다 스윈튼의 새로운 매력을 봤다. 언제나 눈에 띄는 이미지의 역할을 맡아왔다면, 여기서는 그와 달리 철저히 현실 속 여성 캐릭터였다. 이완 맥그리거가 유부녀인 틸다를 노골적으로 유혹하고 밀애를 즐긴다. 더불이 그들이 지내는 배의 여주인이자, 자신의 욕망에 당당한 여자였다.


이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의 시작을 알린 1편 〈나니아 연대기-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2005)이다. 고유한 개성에 ‘마녀’ 이미지를 더한 영화다. 온통 하얀 마녀가 북극곰이 끄는 썰매를 타고 등장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그리고 그 마녀 이미지의 결정판은 키아누 리브스 주연 〈콘스탄틴〉(2006)일 것이다. 키아누 리브스와 조곤조곤 대화하면서 자연스럽게 날개를 펼치는 가브리엘의 모습이 인상적인데, 마지막에 가서는 바로 그 본색을 드러낸다. 분명 CG일 텐데 그 날개가 전혀 특수효과로 느껴지지 않는다. 필모그래피 안에서 ‘마녀’와 ‘천사’ 그 모두를 섭렵한 대단한 배우라고나 할까. 그리고 2013년 칸영화제에 초청된 짐 자무시의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에서는 톰 히들스턴과 함께 뱀파이어로 출연했다. 마녀와 천사에 이어 뱀파이어까지, 세계영화사에서 그 셋을 다 연기해본 배우는 틸다 스윈튼말고는 없다.

세계영화사 이야기가 나온 김에, 공교롭게도 틸다 스윈튼은 아시아영화사에 특별한 인연이 있다. 오래전부터 국제영화제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적이 많은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참석한 영화제마다 아시아영화들이 큰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는 사실이다. 보통 아시아영화의 재발견이라고 얘기되는 순간이, 이른바 ‘중국 5세대’의 출현을 알린 1988년 베를린영화제에서 장이모우 감독의 〈붉은 수수밭〉(1988)이 황금곰상을 받았던 일인데, 바로 그때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 바로 틸다 스윈튼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한국영화가 국제적인 이슈 속에 놓이게 된 계기가 바로 2004년 칸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이후일 텐데, 대부분 심사위원장인 쿠엔틴 타란티노만 기억할 것이다. 한국영화에 대한 사랑을 유독 오랜 시간 피력해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틸다 스윈튼도 당시 홍콩 감독 서극, 프랑스 배우 엠마누엘 베아르와 더불어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다. 이후 박찬욱 감독이 제작하고,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한다고 밝혀온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에도 출연했으니 참으로 흥미로운 인연이다.

오래전 데릭 저먼이 세상을 떠난 후 방황하던 틸다 스윈턴은 1995년 런던의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더 메이비’(The Maybe)라는 이름의 퍼포먼스 전시를 한 적 있다. 유리로 된 관 안에 하루에 8시간씩 직접 들어가 있는 것으로, 무려 일주일 동안 계속됐다. 2013년에도 뉴욕현대박물관(MoMA)에서 퍼포먼스를 가졌다. 그걸 보면서 새삼 깨닫게 된 건, 틸다 스윈턴 그 자체가 살아있는 예술품이라는 사실이다. 영화 안에서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그림이고 조각인 하나의 예술품이라고나 할까. 그처럼 ‘천상의 피조물’이라는 표현을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배우가 바로 틸다 스윈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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