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릴 스트립의 모든 것 ① 멋진 언니의 시작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와 '아웃 오브 아프리카'

카렌 블릭센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나는 아프리카 은공 언덕 기슭에 농장을 갖고 있었다”라는 멋진 문장으로 시작한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메릴 스트립의 구체성과 정확성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메릴 스트립의 할리우드 오디세이의 초창기는 무척 험난했다.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안겨준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1979) 촬영 당시 더스틴 호프먼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일이 대표적이다. 사이가 좋지 않았다기보다 이제는 성추행 파문 등 그 실체가 거의 만천하에 드러난 더스틴 호프먼이 당시 일방적으로 그를 몰아붙였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노아 바움백의 〈결혼 이야기〉(2019)가 개봉했을 때 많은 이들이 실감나는 이혼소송 장면 등에서 비슷한 선배 영화로 입을 모았던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에서, 테드(더스틴 호프먼)와 조안나(메릴 스트립)는 부부다. 하지만 어느 날, 조안나가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생활에 염증을 느끼며 자기에게 남겨진 삶은 자신를 위해 써야겠다며 훌쩍 떠나게 된다. 그러다 조안나가 아들 빌리를 키우겠다고 하면서, 두 사람은 전쟁을 방불케 할 만큼 치열한 양육권 법정투쟁을 벌이게 된다. 철저하게 테드에게 몰입한 것 같은 더스틴 호프먼은 상대방의 감정을 자극해서 원하는 연기를 끌어내기 위해, 불과 42세에 폐암으로 사망한 메릴 스트립의 전 남자친구 존 카잘을 언급하며 신경을 건드리기도 했다. 존 카잘은 〈대부〉(1973)에서 마이클(알 파치노)의 둘째 형 프레드 콜레오네를 연기한 배우로 친숙하며, 〈디어 헌터〉(1978)에서는 메릴 스트립과 함께 연기했으나 안타깝게도 〈디어 헌터〉 개봉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디어 헌터〉 존 카잘(왼)과 메릴 스트립
〈디어 헌터〉 존 카잘(왼)과 메릴 스트립

로버트 벤튼 감독은 각색 과정을 거치며 배우들이 상당 부분 자신의 대사를 쓸 수 있게끔 배려했는데, 더스틴 호프먼의 목적은 오로지 조안나를 이기적인 아내로 만드는 데 있었다. 하지만 그와의 투쟁 속에서 메릴 스트립은 조안나를 ‘가정을 버린 악녀’로 만드는 것을 거부했다. 오랜만에 떨어져 있던 테드를 다시 만난 자리에서 했던, 메릴 스트립의 의지가 스며든 대사에 잘 담겨 있다. “난 평생 누군가의 아내나 엄마, 누군가의 딸로 살았어. 우리가 같이 살 때도 난 내가 누군지 몰랐어. 그래서 떠나야 했지. 근데 캘리포니아로 와서 지내면서 내 자신을 찾았어. 직장도 구했고 좋은 정신과 치료도 받고 있어. 난 지금 어느 때보다도 내 모습이 좋아. 내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됐어.” 촬영현장에서 더스틴 호프먼이 불같이 화를 내며 “그딴 페미니스트 앞잡이 노릇 좀 그만하고, 제발 그냥 연기를 해” 라고 윽박지르기 일쑤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영화에서 보여준 조안나의 ‘선택’에 대한 논란을 떠나 메릴 스트립은 조안나를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는’ 캐릭터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한 여성의 힘든 선택의 여정을 따라가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이후 〈소피의 선택〉이라는 영화가 나오기 이전에 이미 〈조안나의 선택〉이라는 영화가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한편으로, 메릴 스트립의 그런 면모가 사실상 별로 알려지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이후 국내에도 출간된 그에 대한 평전 〈퀸 메릴〉에 실려 있는 내용들이 꽤 의미심장하다. 그런 면모를 가족들이 알아서였을까, 그의 아버지는 배우가 된 딸 메릴에게 언제나 “나중에 혹시 아카데미 상을 수상하게 되면 무대에 올라가서 제발 정치 얘기는 꺼내지 말아라” 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또 예일 레퍼토리 시어터에서 연기를 배우던 때에는, 학생들에게 죽음을 즉흥적으로 연기하라는 과제가 있었는데, 메릴 스트립은 낙태하다가 죽는 여성을 연기했다고 한다. 다들 이른바 ‘비련의 여주인공’ 혹은 ‘극단적 선택’이라는 추상적 상황을 연기하고 있을 때 메릴 스트립은 너무나도 구체적 상황에 놓인 여성을 연기한 것이다. “나는 관객들이 대상화하기 쉽지 않은 배우나 연기를 좋아해요” 라는 그 자신의 관점이 이후 자신의 출연작에도 반영된 것이기도 한데, 우리가 메릴 스트립의 연기를 보면서 느끼게 되는 매혹의 본질은 바로 그 구체성과 정확성에서 온다 할 것이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

1910년대의 멋진 언니 농장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결국 배우란 대사를 통해서 영화의 주제를 전달하는 사람이다. 표정이나 제스처도 중요하지만 배우의 궁극적인 목표는 시나리오의 언어를 완벽하게 전달하는 것에 있다. 메릴 스트립을 명배우라 부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바로 ‘언어의 마술사’라는 점이다. 그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소피의 선택〉(1982)에서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자를 연기하며 폴란드인이 구사하는 억양의 영어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과거 소피(메릴 스트립)는 수용소로 가는 도중 독일장교가 소피의 미모에 반해 그녀의 아이 둘 중 한 명만을 살려주겠다고 했고, 어쩔 수 없이 한 아이를 선택하고야 말았다. 치유할 수 없는 전쟁의 상처, 두 자식을 두고 ‘선택’의 기로에 놓인 상황의 끔찍함은 바로 완벽한 언어 구사에서 온다.

〈소피의 선택〉

카렌 블릭센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5)는 “나는 아프리카 은공 언덕 기슭에 농장을 갖고 있었다”라는 멋진 문장으로 시작한다. 1910년대 격변기의 세상을 살아가는 한 여성의 ‘나’라는 1인칭으로 시작해, 역시나 세계 열강의 격전지였던 아프리카에서 ‘농장을 갖고 있다’는 당당함이,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멋진 언니’의 위엄을 보여준다. 영화는 1910년대 광활한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덴마크 여성인 카렌 블릭센(메릴 스트립)과 데니스 핀치 해튼(로버트 레드포드)의 애틋한 사랑과 이별을 그리고 있다. 시드니 폴락 감독과 워낙 친한 사이였던 로버트 레드포드가 남자 주인공으로 일찌감치 정해졌고, 상대 여성 주인공으로는 주디 데이비스, 줄리 크리스티, 케이트 캡쇼 등이 물망에 올랐다. 이미 스크린 테스트를 거친 배우들도 꽤 됐다. 무엇보다 덴마크어 억양을 구사할 수 있어야 했고, 작가라는 정체성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배우여야 했다. 〈소피의 선택〉에서 폴란드어 억양의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했던 것처럼 덴마크 출신 주인공이라는 설정을 메릴 스트립처럼 소화할 수 있는 배우는 없었다. 더군다나 메릴 스트립은 원작의 첫 문장처럼, 아프리카에서 홀로 거대한 농장을 경영하는 한 여성 주인공의 이야기라는 점에 끌렸다. 영화가 여성 주인공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영화가 드물던 시절이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
〈아웃 오브 아프리카〉

게다가 실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원작에 푹 빠진 메릴 스트립은, 카렌을 한층 더 풍부한 캐릭터로 만들고 싶었지만 시드니 폴락 감독은 아프리카의 풍광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사랑의 대서사시로 만들고자 했다. 실제로 두 사람은 딱 한 번 갈등을 빚기도 했다. 다른 여자와도 어딘가 필요 이상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한 카렌이 “내가 허락 못해요”라고 말하는 대사를 꺼려했던 것이다. 카렌이 공공연하게 질투하고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 같아 두 사람의 ‘밀당’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지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관계를 완성하려면 각자의 결함을 보여줘야 한다”는 시드니 폴락 감독의 얘기에 동의해 원하는 대로 찍긴 했지만, 속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영화의 주인공이 남편 브로 블릭센을 연기한 클라우스 마리아 브랜다우어와 로버트 레드포드 사이에서 카렌 블릭센이란 사실은 변함없다. 특히 카렌이 데니스의 부고를 듣고 보인 모습은 압도적인 연기다. 담배를 들고 있던 손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책을 다시 읽는다. 앞서 〈실크우드〉(1983)를 함께 했던 마이크 니콜스 감독은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바로 그 연기에 새삼 반해 〈제2의 연인〉(원제: Heartburn, 1986)을 함께 하자고 해서, 잭 니콜슨과 메릴 스트립의 만남이 이뤄졌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
〈아웃 오브 아프리카〉

게다가 영화에서 카렌을 좋아하는 펠리시티(수잔나 해밀턴)는 그를 향해 “언젠가 저도 당신처럼 제 사람을 살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펠리시티는 베릴 마크햄이라는 실존 인물을 모델로 삼았는데, 데니스의 또 다른 연인으로도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영화를 준비하던 당시 실제 생존해있었기에 시드니 폴락 감독이 만남을 청해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힐러리 클린턴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 모험가 중 한 사람”이라고 추천하며 유명세를 타기도 했던 베릴 마크햄의 〈이 밤과 서쪽으로〉는 국내 출간돼 있다. 18세 때 아프리카에서 여성으로는 최초로 경주마 조련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20대 말에는 비행기조종법을 배워 직업조종사가 되어 1936년에는 영국에서 캐나다 케이프브레턴 섬에 이르는 역사적인 북대서양 횡단 단독비행에 성공한 기념비적 인물이기도 하다. 어쩌면 흔한 말로 카렌 블릭센의 선한 영향력을 받은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넘어갈 수 없는 지평선은 없다”는 것이 베릴 마크햄의 지론이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
〈아웃 오브 아프리카〉

영화가 보여주는 인간사의 국면도 중요하지만, 사실 압도적인 대자연의 풍광이야말로 이 영화의 백미다. 그 풍광 아래서 데니스가 카렌의 머리를 감겨주는 장면은 이후 〈사랑과 영혼〉(1990)에서 패트릭 스웨이지와 데미 무어의 도자기 신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할리우드에서 가장 달콤하고 선명하고 상업적인 멜로드라마 이미지였다. 그리고 드디어 두 사람이 비행기를 타고 탄자니아 응고롱고로 분화구 위를 나는 장면은 그야말로 아름답다. 분화구 위를 비행기가 지나갈 때 비행기라는 기계는 그저 한 점에 불과하다. 그 비행의 경험은 실제로 카렌 블릭센에게 심오한 정서적 의미를 남겼다. “신이 인간보다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제 나는 천사가 된다는 게 어떤 건지 알 것 같다”는 게 실제 플릭센의 이야기였다. 웅장한 음악이 아니라 은은하고도 섬세한 존 베리의 영화음악도 그 분위기를 탁월하게 살려내고 있다. 실제로 메릴 스트립은 〈아웃 오브 아프리카〉라는 영화에 푹 빠져 지냈다. 실제로 영화를 찍고 미국에 돌아오자마자 뉴욕 도심을 떠나 코네티컷주 솔즈베리 교외로 집을 옮기는 계기가 됐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촬영하면서 매일 아침 숙소에서 일어나 창밖을 보면 안개 낀 킬리만자로산이 눈앞에 펼쳐졌으니, 돌아온 뉴욕의 집이 무척이나 답답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처럼 믿기 힘들지만 할리우드에서 ‘여성배우가 30대가 되면 전성기가 지났다’고 말하던 시절,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메릴 스트립에게 새로운 시작이 됐다.

▶ ‘메릴 스트립에 관한 모든 것’은 두 번째 글로 이어집니다.

영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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