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의 여인〉
논란의 여성 정치인을 연기한다는 것
마가렛 대처라는 논란의 정치인을 소재로 다뤘다는 점에서 〈철의 여인〉(2011)은 사실상 ‘메릴 스트립이 마가렛 대처를 연기했다’는 그 자체가 큰 의미를 가진다. 어떤 관객에게는 오직 그것만이 전부일 수도 있다. 마가렛 대처가 2013년에 세상을 떠났기에 살아있을 때 이 영화가 개봉하긴 했는데, 보지는 못했다고 한다. 다만 ‘정계 은퇴 이후 대처의 정신적 쇠락을 우습게 묘사했다’고 격분한 영국 보수당 정치인들은 많았다. 다른 한 편에서는 대표적으로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가 ‘논란 많은 인물에 대해 영화의 태도가 불분명하다’고 비판했다. 영화는 26세의 야심만만한 옥스포드 졸업생 마가렛(철의 여인)이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지방 의회 의원 선거에 나가지만 낙선하고, 이후 남편의 전폭적 지지 속에 의회 입성에 성공한 뒤 모두가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로 선출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연거푸 3선에 성공하며 ‘철의 여인’이라 불리면서 정계를 떠난 뒤의 삶도 담아내고 있다. 개봉 당시 영화는 메릴 스트립의 높은 싱크로율이 화제였는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수상과 더불어 마크 쿨리어와 로일 헬런드가 분장상도 받았다. 메릴 스트립은 〈소피의 선택〉 때부터 오직 한 명에게만 헤어를 맡겨온 것으로 유명한데,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지나 〈철의 여인〉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그의 헤어를 담당해온 로일 헬런드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메릴 스트립은 이 작품을 택한 이유에 대해 “실존 인물을 연기한 적은 꽤 있으나 〈철의 여인〉처럼 40여 년의 긴 세월을 연기한 적이 없어 흥미로웠다”며 “마가렛의 싸우고자 하는 열정, 싸움에 대한 그 욕구가 가장 흥미로웠다”고 했다. 사실 정치적 성향에 따라 마가렛 대처는 그저 “배우는 주어진 역할에 충실할 뿐”이라는 명제를 적용하기가 힘들기도 하다. 메릴 스트립같은 대배우에게 있어 어떤 기회라고 보기도 힘들다. 그렇기에 ‘배우로서 40대부터 80대까지 한 인물의 긴 세월을 연기해보고 싶었다’라거나 ‘정치적 성향을 떠나 그 인물의 싸움에 대한 욕구를 들여다보고 싶었다’는 말을 무척 흥미롭게 들린다. 앞서 메릴 스트립과 함께 〈맘마미아〉(2008)를 성공시켰던 여성감독 필리다 로이드는 “정치 영화가 아니라 남자만 있는 세상에서 여성 혼자서 느껴야 하는 고립과 고독감에 집중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당연히 메릴 스트립과 정치적 견해가 같을 수 없는 인물을 연기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메릴 스트립은 한 인터뷰에서 “계급주의와 성차별을 뚫고 정당하게 차례로 단계를 밟아 총리 자리에 오른 여성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정말 어마어마한 일을 해냈다. 사람에 따라서는 역사적 논란을 가라앉힐 수 있을 만큼 가치있는 일을 해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일단 세상에는 ‘여성 정치인’을 다룬 영화 자체가 드물기도 하다. 또 하나, 시나리오를 쓴 애비 모건이 바로 이후 여성 참정권 투쟁을 그린 〈서프러제트〉(2015)의 작가이기도 하다.

사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아웃 오브 아프리카〉나 메릴 스트립의 평소 철학과 맞닿아 있는 부분도 있다. 가령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남성들만 가득한 클럽에서 그 회원들이 카렌을 클럽에 초청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난 너희 클럽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딱 한 잔 마시고 나왔다”라고 얘기하는 장면을 메릴 스트립도 무척 좋아했다. 남성들 속의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남성 세계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여성의 숭고함이라는 테마는 그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관통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이름으로도 이어진다. 남편 성을 따르는 관습을 벗어나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는 “내 이름을 불러주겠어?”라는 카렌 블릭센의 마지막 말에, 하인 파라(말릭 보웬스)는 떠나는 그를 향해 남편의 성 블릭센을 떼고 “마님은 카렌입니다”라고 얘기한다. 〈철의 여인〉에서도 마가렛 대처가 아니라 정치인을 꿈꾸며 맨 처음 출마했을 때의 이름인 마가렛 로버츠라는 원래의 이름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그 이름을 준 아버지는 언제나 마가렛 로버츠에게 “남에게 휘둘리지마. 네 생각대로 살아”라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그런 점에서 두 영화의 주인공 모두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사회분위기의 시대 배경과 겹쳐서 보자면 ‘집안에 갇혀있기를 거부한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과 〈플로렌스〉
메릴 스트립의 완벽한 두 얼굴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2013)은 메릴 스트립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예민하고 어두운 내면을 그린 영화다. 메릴 스트립의 가장 피곤한 얼굴이 바로 이 영화에 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뿔뿔이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어머니 바이올렛(메릴 스트립)을 찾아 함께 모이는데, 애도의 마음은 잠깐뿐이고 서로를 헐뜯고 상처를 후벼파는 막장 드라마가 펼쳐진다. 줄리아 로버츠, 이완 맥그리거, 베네딕트 컴버배치, 크리스 쿠퍼 등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하는 이 영화에서 메릴 스트립은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아내이자, 집안의 가장 높은 어른을 연기한다. 오랜 기간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가발을 쓰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외모가 망가졌지만, 언제나 담배를 손에서 놓지 않고, 약 기운이 올라올 때면 마음에도 없는 얘기를 마구 쏟아내는 독설가가 됐다.

그러는 가운데 가족 내의 숨겨진 비밀이 드러나고 바이올렛은 그야말로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명연기를 펼쳐 보인다. 그야말로 배우가 보여줄 수 있는 ‘테크닉’의 최고 경지랄까. 정신이 약에 완전히 지배당한 상태로, 중얼중얼 발음과 호흡을 대충 흘리는 것처럼 연기하는 순간에도 모든 대사가 귀에 쏙쏙 들어온다는 게 놀랍다. 스스로 ‘못되고 고약한 엄마’라고 고백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경이롭다. 그처럼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은 주변 배우들과의 절묘한 호흡이 빛나는, 이른바 앙상블 연기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으로부터 어쩌면 가장 멀리, 메릴 스트립이 가장 귀엽고 낙천적인 캐릭터로 등장한 영화가 바로 〈플로렌스〉다. 1940년대 미국에 실존했던 음치 소프라노 플로렌스 젱킨스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인데, 플로렌스(메릴 스트립)는 막대한 재산으로 음악가들을 후원하면서 자신이 직접 오페라 공연을 펼치며 소프라노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하지만 기본적인 음정과 박자도 소화하지 못하는 음치였고, 매니저이자 남편인 베이필드(휴 그랜트)의 도움으로 그걸 모르며 살 수 있었다. 그런 플로렌스가 급기야 카네기홀 공연도 가지게 된다. 메릴 스트립의 필모그래피를 굳이 살펴보자면, 코미디 영화가 드물다는 점에서 〈플로렌스〉는 보석과도 같은 작품이다. 캐릭터에 완전히 동화가 돼서 공기 반 소리 반으로 음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노는 메릴 스트립을 보고 있으면, 실로 경이롭기까지 하다. 동시에 예술을 대하는 우리의 이중적 태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한편으로 메릴 스트립이라는 배우가 없었다면 과연 〈플로렌스〉라는 프로젝트가 제작 궤도에 오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배우가 산업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 딱히 과장이 아닐 수도 있다.
▶ ‘메릴 스트립에 관한 모든 것’은 세 번째 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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